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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일파ㆍ안중근ㆍ이토히로부미ㆍ총독부

사건- 38.12 : 간도특설대 (백선엽ㆍ김백일ㆍ송석하)

by 당대 제일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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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특설대 (間島特設隊ㆍ간도특설부대ㆍ간토 토쿠세스부타이)"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ㆍ동북항일연군ㆍ조선의용대ㆍ대한독립군단(만주 북서부"에 잔존)"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독립군 토벌부대"로, 독립운동ㆍ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1939~1943)" "열하성하북성"에서 "팔로"과의 전투(1944~1945)를 수행했다.

 

1. 간도 특설대 (間島特設隊간도특설부대간토 토쿠세스부타이)

• 창립 취지 : "만주사변(1931)ㆍ중일전쟁(1937)" 이후, 필요성 절감ㆍ이이제이 (以夷制夷):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인들이 잡아야 한다.

 일 시 : 1938.12.01~1945 (108회 출동)     •  소 속 : 만주국 육군       본 부 : 젠다오 성 (간도 성 - 연변지역)

•  선 발 : "" 지원, 검증 후, 대원으로 선발    

•  대원 구성 : 대대 급 특수부대800여 명 (대장- 일본인외, 나머지 대원- 전부 조선인) / 조선인 대원 : 김백일 (5김찬규)백선엽 (9)송석하강재호김석범신현준이용충식윤춘근박창암마동악최남근

역 할 : 항일 조직 토벌 전문타격대토벌 대상(동북항일연군(양정우 지휘)조선인한족 "연변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연군"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1939~ 1943 :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과 전투 수행172명 살해 /  1944~ 1945 : "열하성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 수행 103명 살해62명 체포

간도 특설대

"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 "이범익(李範益1883~ 1950? (납북))""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인들이 잡아야 한다."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로 상당히 악명 높고, "조선인이 조선인을 잡음"으로써 상당히 가혹하게 우리 민족을 스스로 같은 민족으로서 탄압했던 아주 악명 높은 부대이다.

"팔로군"의 주요 인물들은 해방 후, "북한 인민군 창설"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생존한 이들은 해방 후, "김일성"을 지도자로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집권층이 되었고, 되돌아간 "특설부대원들""한국 국군"의 주축을 이루었다광복 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그대로 "국군 지도부"가 되었다.

특히 "간도 특설대" 출신들은 "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1948"제주 43 사건"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1950"한국 전쟁" 때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백야전 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하고, 32세에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던 "백선엽"이 대표적이다"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 운동"을 대거 탄압하였으므로, 현재 알려진 "간도 특설대" 소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일본군"에 복무해도,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 놓았다그러나 "간도 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하고, "독립군 말살"이라는 그 임무 때문에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2. 부대가

193912월부터 1945년에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는 간도특설대의 정신을 잘 말해준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3. 개 요

당시, "간도"에서 "조선 독립군중국인"이 연계한 "반일- 반 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 중국 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 "이범익""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 육군"에 소속되었다.

"동북항일연군" 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관헌 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 채, 은신하면서, "게릴라 전"을 전개하고 있었다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게릴라 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조직을 진압하는 부대의 특성상, 대부분의 조선 사람으로부터 거부되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국"에서 살고 있던 "친일파 군인들" 다수가 소속되어, 독립운동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필립 조웰(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일본군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간도 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간도 특설대"에 장교로 활동했던 조선인은 한국에서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의하여 "친일 부역자"로 분류했는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 특설대"에서 근무한 것이 조사되었다.

4. 활 동

1939.05, "일본 수비대"를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림 속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체포를 하고 보니, 산나물을 뜯는 부근 마을의 백성이었다그런데도 "염천 대대장산천 중대장"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버렸다1939.07.01, 부대는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고, "일본군 수비대" 협동 작전을 하여, "천보산"을 토벌했다교전 중, "항일연군" 1명이 희생되었는데, "특설부대"는 충혼비에 제를 지내기 위해, "항일연군" 전사자의 배를 가르고, 간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메고 가던 인부가 허기를 달래려고, 통조림인 줄로 알고 훔쳐 먹다가, 생고기인지라 버렸다고 한다.

1941년 겨울, 부대의 3개 중대는 "원부시 대대장"의 지휘 아래, 3개 현(안도돈화화전)에 대한 토벌을 진행, "2 중대기포 중대"대원 3명이 변복한 "항일군" 2명을 체포하였다1명은 "1중대 취사반"에서 잡일을 하게하고, 1명은 "기포련"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는데, 취사반에 던 사람이 도망을 한 것을 "도목구"에서 다시 붙잡아다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 시키고, "부의 부관 옥량 중위"가 군도로 머리를 베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1941.01, 부대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 리 떨어진 산림에서, "항일연군 여전사" 4명을 체포, 압송 도중 강간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였다1942.08, 부대 "1중대""변의대"를 조직하여, "차조구"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중,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 2명이 "양민증이 없다"는 구실로 형벌을 감행한 후, 체포하였다.

교전 중 전사한 이들에게는 "16 용사 기념비"를 세웠으며,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전사자 중 "반장 현상"에게는 "경훈장", "남일록(南日錄)" 15명에게는 "주국장"을 발급하였고, 생존자 중 끝까지 저항했던 "현학춘(玄鶴春)"에게는 "3급 무공장"을 수여하였다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 세력민간인"172명에 달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고 한다또한 "관내방면 석갑진"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36차례의 토벌을 수행하여, 103명을 살해하였으며, 62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5. 일본 패망 후, 한국에서의 인식

광복 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그대로 "국군 지도부"가 되었다특히 "간도 특설대" 출신들은 "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1948"제주 43 사건"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1950"한국 전쟁" 때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백야전 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하고, 32세에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던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 운동"을 대거 탄압하였으므로, 현재 알려진 "간도 특설대" 소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친일인명사전"에는 "일본군"에 복무해도,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 놓았다그러나 "간도 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하고, "독립군 말살"이라는 그 임무 때문에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6. "간도특설대" 활동

"간도특설대""만주국" 내에서 항일 투쟁을 하는 "독립군(1939~1943)""열하성하북성"에서 "팔로군(1944~1945)"과 전투를 수행했으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였다"팔로군"의 주요 인물들은 해방 후, "북한 인민군 창설"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그가 썼던 대부분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아예 다루고 있지 않다(다만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에만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고 소회를 밝힌 바는 있으나"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에 대해, "그러나 한 가지 역사상의 비극적인 그것(역사적으로 불가피했었던 도특설대 대원)만큼은 너무도 유감스럽다."는 간소한 사과만 했을지언정, 국민들 앞에서 진지한 사죄를 한 적은 아직도 없다는 비판이 있다.

허나 그가 직접 "독립군"을 토벌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009년 인터뷰에서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 독립군을 직접 토벌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일어판 저서에서는 "우리들이 쫓았던 게릴라 중에는 조선인이 섞여있다" 식의 서술을 한 적은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간도특설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일본의 대대적인 만주에 대한 사전토벌로 "한국계 독립군""자유시 참변" 등으로 소멸되거나, 존립하더라도 "팔로군" 휘하의 공산군으로 편입되어, 후일 625당시 "남침의 선봉대"가 되었기에, 사실상 그에 의해 죽은 한국계 독립군 세력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절대적이다.

7. "백선엽 장군" "도특설대" 활동 회고

"간도특설대"에서의 "백선엽"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백선엽"이 남긴 "회고록(군과 나)"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인다"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金爛奎)송석하(宋錫夏)김석범(金錫範)이용(李龍)신현준(申鉉俊)임충식(任忠植)윤춘근(尹春根)박창암(朴菖岩)" 등과 함께 근무했다.

그는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우리"라고 표현했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소부대 행동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썼다"간도특설대""비정규전 특수부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동타격공작정보매복추격섬멸작전"을 주로 행했고, 또한 "만주군 헌병대"에도 "2차대전" 종전까지 근무하여, 향후 "국군 육군 정보국장"을 하고, "한국 전쟁", "빨치산 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는 그의 일본어 저서 "대 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같은 "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 "비정규전 부대인 "특공여단"", 후방 "2군직할부대"로서 창설하는 것으로 맥을 잇는다"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간도특설대"1938.12.01,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보병기갑 혼성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 가까이로 늘어났다고 한다"부대장""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50%"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이 부대는 1938.12월 창설 직후, "간도길림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양정우진한장최현" 등의 "반만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1941.12.30, "만주국군관학교(봉천군관학교)"9기로 졸업하고, "견습 군관"을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2"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근무하였다1943.12, "러허성(열하성)", "간도특설대 기박련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1944년 봄, "열하성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이에 "일제""만주군 3개 여단"을 파견했다"간도특설대백선엽" "만주군 철석부대" 산하에서 정보수집반공 선전체포된 항일세력 심문 등을 맡았다.

1944년 여름, "간도특설대""열하성"을 떠나, "하북성"으로 이동했다여기서 "간도특설대백선엽" 1945.0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벌였다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 복귀 명"을 받고 귀대했다1944년 가을, "노인숙""평양"에서 결혼하였다1945.08, "일본" 패망할 당시, 그는 "만주국군 헌병 중위"였다그는 "만주"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 해제"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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