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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승만ㆍ김구ㆍ박정희ㆍ정당

중앙정보부 ⑤ 10ㆍ26 사태 (1979)ㆍ광주 사태 (1980)

by 당대 제일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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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당시, "인종주의자 히틀러"를 추종하였던 "차지철(청와대 경호실장ㆍ권력 2인자ㆍ1934~1979ㆍ45세)은 "크메르 루즈의 폴포트는 백만 명을 죽이고도 살아남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라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한국형 인종주의자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 앞에 그 비굴한 삶을 마감했다. 1979.10.26일, "장준하(1918~1975ㆍ57세)"를 존경했던 "김재규(1926~1980ㆍ54세)"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그리고 "유신독재"는 허물어졌다.

 

1. "차지철ㆍ김재규"의 갈등

74: 차지철 경호실장육사(12) 시험에서 낙방 육사출신에 반감 "전두환" 산하 부대원으로, "중령" 예편 후, 국회의원

77년경 : "국기강하 식" 시행 (작전 차장보들(전두환 등)이 제병지휘) 경복궁 연병장(수경사를 경호 목적상, 경호실장이 군 지휘권을 갖게 만들었음) "국군의 날" 사열식을 본뜬 것으로, 차지철이 사열관 자격으로 로열박스에 앉고, 국회요직 공화당 간부장관을 주변에 세우고, 군 정예부대인 "수경사3033경비단공수단특경대" 등이 경호실 화기를 도열하고, 벌이는 국기하기식

경호 차장 : 현역 "중장"이나 "소장"이 보임 "경호실"을 병영화 차장 밑에 "행정작전 차장보"를 현역 "준장"으로 보임하게 함  경호 차장 : 정병주(9)문홍구(8)이재권(8)    •  작전 차장보 : 전두환노태우김복동(11)

김정렴 비서실장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김재규차지철 견제)

1970: 차지철(경호실장)의 국기 강하식에 불참김재규(중정부장)의 청탁도 거절

차지철의 모략 : "차지철김재규서종철이세호노재현""부총리 남덕우재무장관 김용화덕진 등 문민 테크노 파트 실력자" 이 연대함.

78.12.12 : 10대 의원 선거후, "득표율 패배"책임을 "김정렴과 그의 경제팀"에 책임 전가 김정렴 주일대사 임명 후임 비서실장 김계원 (김재규의 천거) 부가가치세 실시물가 상승신 품종벼(노풍)의 실패 "공화당"이 총선 투표에서 과반수 의석은 확보했으나, "신민당"에 투표율이 1.1% 뒤짐

차지철(경호실장)김재규(중정부장)의 갈등

 백두진 파동 : 차지철이 "백두진(유정회)""10대 국회의장"으로 천거하자, "신민당"이 반기 79.03.24 : "이만섭(공화당)" 본회의 강경발언야당에 1.1% 득표율 진 것을 발언

79.05.30 : 신민당 전당대회 : 차지철이 "신도환" 의원 지원원내의 "김영삼"과 원외의 "김대중" 세력 견제용 →  체제 절충적인 대표 최고위원 "이철승"을 지원하고자 했으나, 불안하여 중도에 변경

김재규 : 보안사령관시절, "종친회장"을 역임한 그가 같은 금녕 김씨인 "김영삼 총재"에게 경선 포기하도록 회유와 협박 "김영삼"은 선명 투쟁선언

윤보선김대중은 가택연금 속에서"김영삼" 지원 : 유신과 타협적인 "이철승 지도부"에 대한 반기

1차 투표 : 이철승(292)김영삼(267)이기택(92)신도환(87)김대중이 이기택에게 YS 지원 지시

2차 투표 : 김영삼(378)이철승(367)"유신 정권"과의 정면대결 선언

79.05.30 : "김영삼""무소속민정회 의원" 7명을 합당시켜, 공화의석과 동일한 68석 확보

③ 백두진 (白斗鎭1908~1992ㆍ황해도 신천ㆍ식산은행 은행장ㆍ유신정우회 의장ㆍ국회의장)

1934, 일본 "도쿄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의 직원이 되었으며, 1945년 광복과 함께 "조선은행" 이사가 되었다.정부가 수립된 뒤, 1949"외자관리청장(外資管理廳長)"에 임명되었고, 그 해에 "한국식산은행(韓國殖産銀行) 두취(頭取은행장)"로 선임되었다"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1951년에는 "재무부장관 겸 기획처장"으로 발탁되었다1952, "국무총리" 등용되어, 1954년까지 재직하였다"국무총리"에서 해임된 뒤, "자유당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야인으로 지내다가, "419혁명" 후에 실시된 1961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이천"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국회의원" 직을 상실했으며, "정치활동금지법" 묶여 또다시 야인이 되었다1967, "박정희 정권""민주공화당 총재 상담역"으로 기용되고, 곧이어 "전국구 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1970,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재임하였다1971,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소속의 "전국구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회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72,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함에 따라, "국회의원" 직을 상실하였다가,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의 의장 겸 정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1979, 10"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또다시 "국회의장"선출되었다1979.10.26"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유신체제가 와해됨에 따라 그의 공직생활도 끝났다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아무런 공직에도 발탁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지냈다.

 

2. 79.08.09 : YH 여공 사건

"YH 무역회사" 여공 200명이 생계대책 호소하며, "신민당 사(서울 마포)"에 집합 : 신민당사(연건평 900지하 1지상 5) "이철승"이 서울시 땅을 임대하여, 신축

79.08.11 : "이순구(서울시경 국장)" 지휘로, 여공 강제 해산을 위한 무차별 폭력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 YS 제외한 현역의원, 기자 12명 등 폭력

79.08.13 : YS 생포 작전 시작 신민당원 원외지구당 위원장 명의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제출

 

3. 79.10.26 : 10ㆍ26사태

 79.10.16~ 10.20 : 부마사태 발생 (마민주항쟁부마민중항쟁)

1979년 여름부터, "김재규 중정부장" 경질설이 나돔 "김재규""박통"로부터 면박을 당하고, "차지철 실장"에게 밀리고 있었음.

79.10.26 : 박정희김계원(비서실장)차지철(경호실장)가수 심수봉모델 신재순 "심수봉"이 총에 맞은 "박정희"를 살필 때, "박정희"가 한 말, "나는 괜찮아" 61.05.16 새벽 한강다리를 넘을 때, 1한강교 북단에서 쿠데타 저지 현병들이 다리를 건너 북상중인 "박정희 부대"에 사격 시, "한웅진 준장"의 만류에 한 말, "나는 괜찮아"

 79.10.27 : 새벽 12:00 박정희 유고 확인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

새벽 00:20 김재규 체포 "남산 정보부"로 가려다가, "육참총장 정승화"와 함께 "용산"으로 갔음 "국방장관 실""국무회의" 도중, "비서실장 김계원""정승화 총장"에게 범행 통보 "전두환(보안사령관)""김진기(헌병감)에게 지시체포  "김재규" 증언 시, "전두환(보안사령관) 입회"1212사태"의 빌미 : "정승화 총장도 사건현장에 있었고, 함께 차를 타고 육본까지 갔다"고 진술

79.10.27 : 04"계엄령" 선포"계엄사령관""정승화 육참총장"합수부 구성ㆍ"합수본부장" 전두환(보안사령관)보안사가 정보사를 조사하며, 실권 장악

"박통" 서거 직전,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명 후에, "계엄령 하"에서는 보안사령관이 합수본부장이 정보부검찰경찰 지휘케 함"양자"라고 소문난 "전두환 소장"에게 전권이임 (계엄 사령관 : 정승화 육참총장)

 

4. 79.12.12 : 12ㆍ12사태

79.12.12 : "전두환(보안사령관)노태우(수도경비사령관)"이 사태 주도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참총장" 체포 당일 "9사단" 병력이 미군 통보 없이, 서울로 이동  (전투부대 작전권 : 한미 연합에 위촉된 한미방위조약을 위반한 것임)

"1026 사건수사 시, "정승화" 관련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노재현(국방장관)"에게 3번이나 체포를 건의하였으나, 묵살 당함"전두환" "동해방위 사령부"로 좌천될 것이라는 풍문

"정승화"가 군을 10년 장악할 경우, 11~ 17기까지는 10년 기다리거나, 끝난다는 불만과 우려

80.03월말 : "전두환(보안사령관)""신현확(국무총리)을 만나, 스스로 "정보부장" 겸직하겠다고 통보"보안사정보부"를 정권 창출의 2개축으로 사용하고자 함"신현확"은 반대

61.5.16 79.12.12 사태의 주도 세력은  "대령"

1212사태 시, 17기 대부분이 "대령"으로, "연대장 직"을 맡고 있었음.

1961516 주도세력  (8기) 김종필 (예편 8) 중심의 8

(8기) 육사 11기와 잘 통한 8기생들로, 79.12.12 사태 이후, "8기 그룹"을 형성이희성(육참총장계엄사령관)차규헌(수도군단장)진종채유학성(정보부장)

 

5. 79.11월 이후의 상황

79.11.24 : YWCA 위장 결혼식 (하객 500여명) : 명동성당 앞 YWCA 1층 강당에서,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계엄당국 눈을 피해 결혼식을 위장한 집회"대통령 보궐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국민 선언문" 유인물 배포 김상현함석헌양순직 등 96명 연행80.01.16 구형공판

80.04.04 : 신민당재야인사 통합 협상 04.07 : 완전 결별 선언

80.05.14 : 신민당(이기택 의원 등 66)"비상계엄 해제 건의안" 국회 제출

80.05.16 : 결별한 "김영삼김대중" 만나, "계엄 해제정부주도의 개헌포기"6개항시국수습 성명발표

< 3 김 >

김종필 : 유신 헌법의 통대는 안한다.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의 대통령)

김영삼 : 부마사태 1026  상도동에 대통령 월계관이 온다.

김대중 : 80.01.17 연금해제 후  재야와 옥중을 전전한 왕년의 대통령 후보.

 

6. 80.05.17 : 비상계엄 전국 확대 (쿠데타)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시작 : 주영복(국방장관)3군 총장합창의장 회의 종료 후, 결의 내용에 대해 "전두환" 결재 후, "국무회의" 상정

회의 전, "국보위(국가 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설치"국회 해산" 등 예정

전 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정치활동 중지전국 대학 휴교령계엄 포고령 발표

처리 방안 : 정보부 법률조언 - 손진곤 판사(안기부 차장)정경식(부산 지검장)이건개(서울 지검장)ㆍ박철언(14대 의원) 김영삼 : 정계퇴진 김대중 : 내란음모(사형) 권력형 부정 축재자 : 모든 공직에서 추방 (김종필이후락 (194)박종규 (330)김진만김치열오원철이세호장동운) 사회혼란 및 학생노조 배후조정자 (문익환김동길인명진고은이영희)

 

7. 80.05.18 : 광주 사태 (장세동 : "진주 민란"이나 "홍경래의 난"과 같은 것)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 사망자 193(군인 23경찰 4) 포함해서 278

80.07.09 : 2급 공무원~ 장관 : 232명 숙청

80.07.15 : 3급 이하 : 3,495명 숙청

80.07.18 : "전두환" 후임으로, "유학성 대장""중정부장" 취임 80.12.19 :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 후, 첫 안기부장 "유학성"

80.08.05 : "전두환" 대장 진급 후, 예편  08.27 : "전두환" 대통령 취임최초의 "남산" 출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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