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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승만ㆍ김구ㆍ박정희ㆍ정당

독도 문제 ① 독도 강치 (바다사자ㆍ일본 강치) 잡이

by 당대 제일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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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강치 (바다사자)"는 동해의 상징과 같은 동물이었다 "강치" "독도"를 포함해, 일본ㆍ러시아 등에서 서식했는데, 1900년대 초반에 수만 마리가 "독도" 인근에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멸종됐다.

 

1. 황금 알을 낳아준 "독도 강치 (바다사자)"

일본인들이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시작한 것은 1890년대로 거슬러 간다. "강치"의 가죽ㆍ기름 등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일본인들이 독도로 몰려들었다. 봄철 산란기 때, 잡은 "어린 강치"는 생후 6개월~1년 사이가 훈련시키기에 좋아, 도쿄ㆍ오사카ㆍ고베 등 일본 전역의 동물원으로 팔려 나갔다.

독도

1903년, 독도 침탈의 원흉 "나카이 요자부로"가 처음 "독도 강치" 조업 개시

그의 첫 시험조업 일지를 보면, 우리 돈 6,000만 원을 들여, 선박ㆍ선원ㆍ장총 등을 마련해 "독도"에서 불과 1주일 만에 3억 4천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독도 강치"가 돈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나카이"는 1904.09월, 일본 정부에 "독점 조업권"을 신청해 1905년, 결국 "일본의 독도 강제 편입"이라는 역사적 갈등과 왜곡의 출발점이 된다.

1905년에만 3,200마리의 강치가 잡혔다. 1905년부터 10년 동안의 "독도 강치 독점조업권"을 확보한 "나카이"가 1905~1912년까지 8년 동안 독도에서 잡은 강치의 숫자는 11,000여 마리가 넘었다. 해마다 1,000~2,000여 마리씩 새끼부터 어미까지, 총ㆍ그물을 동원해 마구잡이로 남획을 했다. 

당시 강치 1마리의 가죽 가격은 약 16엔,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320만 원"정도였다. "나카이"는 해마다 "강치 가죽"으로만 수십 억, 기름ㆍ뼈ㆍ고기 등을 합치면 연간 100억 원대가 넘는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나카이"에게 "독도 강치"는 그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다. 조업 기간은 해마다 강치 산란기인 4월부터 태풍이 몰려오기 전인 8월까지 평균 5개월 정도였다.

1905.08.16일, "시마네현 지사"와 함께 처음으로 독도 시찰을 했던 "오쿠하이 헤키운(향토사학자)"는 기행문에서 "독도의 바위마다 강치 수만 마리가 올라가 있어, 장관을 이뤘다"고 기록했다. 1905~1924년까지 10년씩 2차례에 걸쳐 독점 조업권을 따냈던 "나카이"는 "독도 강치"가죽으로 최고급 가방을 만들어 "메이지 일왕 부인"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고, 세계만국박람회에 최고급 품질의 "독도 강치" 가죽 제품을 출품해 상까지 받았다. 이렇게 "나카이"가 "독도 강치"를 남획하면서, 불과 20여 년 만에 강치 개체수가 크게 줄어들자, 일본정부는 1927~1932년까지 6년 동안 독도에 "강치조업 금지령"을 내렸다.

1933년, "독도 강치잡이"가 다시 시작됐지만, 연간 개체 수는 8마리에 불과했다. "태평양전쟁"으로 "강치잡이"가 중단된 1941년까지 독도에서 잡은 강치는 해마다 10마리 안팎에 불과했다. "나카이"가 "독도 독점 조업권"을 넘긴 1925년부터 이미 독도에서 강치는 멸종 상태에 접어든 것이었다. 씨를 말린 "독도 강치잡이"를 통해 갑부가 된 "나카이"는 후에, 지역 국회의원이 돼 "독도 개척의 아버지"로 불리며 동상까지 세워졌다. 우리 민족에게 피 끓는 아픔과 눈물을 안겨주고 있는 "독도 침탈의 앞잡이"가 일본에서는 "영토 개척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2. 독도는 "도 강치 (일본 강치)"의 천국

• 1905년, "독도"를 자국영토에 편입한 뒤, "강치잡이 전담회사"를 설립하여, 포획

• 1904~1913 : 1,400여 마리/년 포획ㆍ1913 이후 : 100~400여 마리/년 포획

• 1972년까지 확인됐으나, 1975년 이후 멸종된 것으로 추정

"독도"는 "가제바위" 등 주변에 "강치"가 쉬기에 좋은 바위가 많고, 난류ㆍ한류가 뒤섞여 먹이가 풍부해 강치들의 주요 번식지이자 서식지였다. 그래서 "강치의 천국"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C 들어, 일본 어부들이 한 해에 많게는 3,000~3,200마리를 잡았으며, 이후 포획량이 줄어 년간 1,000~2,000마리 정도 남획하다가, 결국 멸종되었다고 한다.

"이예균 회장(푸른 울릉ㆍ독도가꾸기 모임)"은 "일본 자료를 살펴보면 독도는 단순히 바다사자가 살던 섬이 아니라 바다사자의 최대 번식지였다. 일본의 다케시마 어렵회사가 1905년부터 8년 동안 독도에서 14,000여 마리나 집중 포획하면서, 바다사자가 멸종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가 활약할 당시만 해도 20~30마리씩 떼를 지어 독도 연안에서 서식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말했다.

"독도"를 비롯한 동해 연안에 19C만 해도 약 30,000~50,000여 개체가 서식했었으나, 1950년대에는 300여 마리가 남아 있다가, 이후 잘 발견되지 않아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멸종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가죽을 얻기 위해, "다케시마 어렵회사"의 남획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고 이후 지속된 어업ㆍ수렵을 원인으로 꼽는다.

3. 강치 (Otaridae물갯과) : 동해 연안에서 번식하는 유일한 물갯과 동물

강치

크 기 : 몸길이 2.5m 내외       서식 장소 : 깊이 50m 이내의 해역

수 명 : 20(큰 수컷의 몸무게 = 490kg)       생 식 : 일부다처제 방식으로 짝짓기

 분포 지역 : 북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연안갈라파고스 제도

생활 양식 : 군집을 이루어 생활하며, 낮에는 대부분 연안(沿岸)의 육지로 올라와 휴식을 취하거나 다에 들어가 먹이를 사냥한다. 멸치오징어꽁치고등어 등 어패류를 먹는다.

독도에서는 1972년까지 확인되었으며, 1975년 이후 멸종된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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