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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승만ㆍ김구ㆍ박정희ㆍ정당

중앙정보부 ④ 코리아게이트ㆍ김대중 납치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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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정치인 "김대중(金大中ㆍ1924~2009ㆍ85세)"이 1973.08.0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도"의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이후락 (李厚洛ㆍ1924~2009ㆍ85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5일 만인 08.13일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5~9대ㆍ1917~1979ㆍ62세)"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김대중"을 처리하려 했던 사건이다.

 

1. 1973.08.08,  오후1시경 : "김대중" 납치사건

 일 정계를 뒤집어 놓고, 1970년대 내내 "박정희"를 괴롭힌 사건 ("이후락 정보부장"의 정치생명 단축유신체제의 명운 단축) HR 정보부의 최악의 과오 "박통 지시"가 아닌 HR의 단독소행(?)

 72.10.17 : 유신 발표 시, "김대중" "동경"에 있었음  귀국을 포기하고, "유신 반대" 성명 발표  미국일본을 왕래하며, "반 유신 강연"과 조직 활동하는 망명객

72.10.17 : 유신 발표 시, "김대중""동경"에 있었음 귀국을 포기하고, "유신 반대" 성명 발표 미국일본을 왕래하며, "반 유신 강연"과 조직 활동하는 망명객

73.08.08 : 11(동경) 그랜드 팰리스 호텔 501(김대중의 방)에 투숙ㆍ222212(양일동 (민주통일당 대표)김경인(2선 의원)의 방)에서 대화를 나눔 6인조 (정보부 해외파트윤진원외 5)의 호텔 222210실로 끌고 간 후,

73.08.09 : "용금호""김대중" 강제 탑승 (중정 운영 공작선승무원 201,536 TonL= 52M) CIA와 주한 미국대사(도널드 그레그)가 살해 저지 73.08.13 : "액션 그룹""자택(서울 동교동)"에 귀환시킴 10:14분경, "동아일보 편집국""구국동맹 행동대"를 자처한 "액션그룹"이 제보 전화 수사를 이유로 김대중 연금조치 북한(김영주)HR을 납치주역으로 지목깡패와 대화할 수 없다는 성명으로 대화단절

73.09.05 : 일본은 "김동운(한국 대사관 서기관)" 지문 획득 일본치안 유린 법무성경찰 강경 09.05 "김동운 서기관" 출두 요청서울로 도주 비노출 요원(윤영조유영복홍성채유춘국) 출국 남산 팀 "김기완(노출요원)": 납치 사건 반대서울행 비행기 표로 비행장에서 미국으로 출국"김형욱"을 만나, "김대중 납치사건" 설명

77.06.22 : "김형욱""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김대중 납치범" 명단 발표 "김경재"에게 사건내용 설명 회고록 작성

< 사건의 경과 > 일본 : "김대중""일본"으로 데려다 놔라원상복귀 요구외교 문제화ㆍ총리 JP"가나야마(전 주한대사)" 비밀특사에게 "유감표시로 해결하자"고 제안

73.10.25 :"김동운(한국 대사관 서기관)" 면직 → 10.26 :"김대중" 연금해제여권 발급 : (3~7년 전 선거법 위반사건으로 공판, 출두소환)

73.11.02 : JP"다나카 수상" 면담 "박통"의 유감표시 친서 전달 납치사건 후 민심 나빠지고, 미국관계 악화유언비어불신풍조 만연되는 악순환 74년 이후, "긴급조치" 남발 79.10.26까지 이어지게 됨. 박통도 "부마사태" 등 민심이반 시, "이건 모두 김대중과 HR 때문이다"고 토로

73.12.03 : 이후락 경질 (후임 신직수) → 12.19 : HR 정보부장 실각 후, 신변위협으로 단신으로 출국 홍콩영국바하마(중미 휴양지) 국가 기밀 및 정권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건들지 말라는 시위 → 74.2월 중순 : "주영 대사관"에 전화 박통과 "귀국 후, 신변안전 보장" 교섭 → 74.02.28 : 귀국 후 칩거 → 78.12 : 10대의원 총선HR에게 "공화당 공천권"을 주지 않자, "무소속"으로 출마 지원(정보부장내무장관시장군수기관요원 등) 서영수(공화당후보)는 판세가 불리해지자, "김대중 사건"공공장소에서 최초로 공표 HR 당선 6개월 후 긴급조치 9호 위반(유언비어 유포)혐의로 구속직전, 1026으로 긴급조치 라져, 해금 조치

 73.10.19 : 최종길 (42, 서울 법대교수)고문치사 사건간첩 혐의로 조사 중, 투신자살로 처리ㆍ동생- 최종선(29) 중정감찰실 81.01월까지 근무)

2. 74.08.15 (AM 10:23) : "육영수" 저격 사건

73.08.08 "김대중 납치사건"의 연장선 : 일본 내의 소수 민족인 한국인들이 납치사건 후, 모멸감을 당하고, 교포 2세 젊은이의 좌절감도 크고, "유신정권정보정치"에 대한 반감이 증폭된 시기에 터진 사건

74.08.15 :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피스톨 박종규(경호실장)"가 무너짐차지철 후임자 (1950년대 "이등 중사", "박정희김종필김용태"와 인연ㆍ61.05.16- "박정희 부의장" 경호부대 책임자로 14년 동안 근무)

문세광(23)이 권총(일본경찰 도난품)으로 "광복절 29주년 기념식"에서 저격한 사건 : 문세광(51.12.26일 생)박근혜(52.02.02일 생) : 당시 객관적인 정황으로는 "문세광""육영수 여사"를 쏘았을 가능성이 가장 많기는 하나, "3의 인물"이 다른 방향에서 쏘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문세광 : 23세로, 일본에 5살 연상의 부인 "강성숙" 첫 돌 지낸 아들을 두고 온 유부남이었다. 8년 전 병사한 "문병태"와 당시 47세였던 "육말란"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난 그에게는 49세의 "육영수 여사"가 어머니와는 종씨라서, 어떻게 보면 이모뻘이 될 수도 있는 사이였다.

"재일교포 민단" 계열의 "청년동맹회원"으로 있다가, 제명북한 독재자 김일성의 사주를 받아서 그랬는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가 싫어서 그랬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일련의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1972"민단 계통의 청년동맹"에서 제명당했다고 한다 "문세광"의 방 안 책꽂이에는 "김일성 선집모택동 선집" 등이 있었고, 대문 앞에는 "남조선 인민의 투쟁을 도와주자"는 내용의 구호가 걸려 있어, "조총련"과 전혀 관련이 없다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사건개요 >

07.18 : "일본 오사카" 시내의 "다카쯔 파출소" 숙직실에서 어느 간 큰 도둑이 들어와서 잠든 경의 주머니에서 창고열쇠를 훔쳐, 창고에 들어가서 권총 2개를 가져간 사건 발생 07.24 :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1950년생)"란 이름의 여권이 발행된다.

08.06 : "문세광""요시이(여자 친구의 남편)" 이름으로 "오사카 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 "조선호텔 1030호실"에 투숙한다. 이 때, "일본 오사카" 파출소에서 도난당한 권총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숨겨 들여왔다 08.08 : "모닝투어" 버스에 2,500원을 내고, 서울시내 관광을 다녀왔다   08.10 : 혼자 "택시""청평"으로 가서, 모 여인과 "나이아가라 호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08.15 : 10시에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고, 11시에는 "청량리 지하역"에서 "수도 전철울 지하철 1호선의 개통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AM 08:00 : "조선호텔"에 최고급 리무진 차를 한1대를 내달라고 했고, 호텔에서는 없다고 했다. 마침 "파레스 호텔" 소속 "포드 20M 고급차"가 들어오자 그 차를 타고 갈 것을 권유, "장충단 공원 국립극" 현관까지 바로 들어감. (고액권 5천원 짜리 2장을 주고 기다리라고 함 "최고급 검은 차"를 타고 온 관계로, "출입증" 없이도 인사 받으면서 유유히 입장했다. 소지품 검사도 당연히 대충 건너뛰었다. "문세광"이 주머니에 권총 든 손을 넣고서는 복도에 서서 계속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경호실 직원"이 와서는 정중하게 "각하께서 입장할 시간이 되었으니, 장내에 들어가 계시죠." 하는 바람에 복도에 더 이상 있지 못하고 행사장에 그냥 들어와 버렸다. "가운데 줄 C" 맨 뒤에서 "3번째 줄의 통로" 바로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앉았다.

AM 10:20 : 10시가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입장하여, 식이 시작되었다. " ~이처럼 말로는 평화통일과 민족의 단합을 운위하고 있으나, 그 실은 민족의 분열과~ "  박정희 대통령이 연단에서 북한 정부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를 낭독하고 있을 때, 가운데 뒷자리 부근에서 "!"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남자 한 명이 중앙 통로로 발을 절룩절룩 거리며, 총 같은 걸 들고서는 앞 쪽으로 급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문세광"이었다.

"!" 소리는 "문세광"이 땀에 쩔은 손이 주머니에 달라붙어서 총 쥔 손이 주머니에서 얼른 빠져 나오지 않아서, 억지로 빼려다가 방아쇠가 당겨져서 그냥 총알이 격발되어 버렸는데, 주머니 속이라서 총소리가 좀 이상해져 버렸다. 그리고 절룩거린 이유는 주머니 속에서 발사된 총알이 자기 자신의 대퇴부와 다리에 맞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피가 철철 나는 다리를 이끌고 20걸음이나, 와서는 대통령 바로 앞 10미터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통령 연단을 향해서 두 손으로 정 조준하여 "!"하고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방탄으로 되어 있는 연단을 관통시키지는 못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키가 원래 작았던 데다가, 연단의 높이가 150cm나 되어 "박대통령"이 머리를 숙여, 몸을 구태여 숨기지 않더라도 바로 연단 앞에서는 대통령의 모습이 잘 안 보일 상황이었다 이 때 "문세광"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본 "박종규 경호실장" 왼쪽 뒷주머니의 권총을 꺼내면서 앞으로 튀어 나왔다. "박종규"는 꺼낸 권총을 오른손으로 옮기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박종규"오른손의 신문지를 떨어트리는 과정에서 "!" 하고 잘못 발사가 되었는지, 아니면 제3 경호원의 오발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때 이미 육영수 여사의 몸이 오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뒤늦게 "박종규""육영수 여사" 을 몸으로 가리려 했고, 또 같은 시각에 정체불명의 남자가 연단으로 뛰어 들더니 "육영수 여사"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다리에서 피도 계속 나오고, 이제 더 이상 쏠 데도 마땅히 없는 "문세광"이 약간 주춤거리자, 때서야 용감한 "대통령 경호실 직원들"이 저격범 "문세광"을 덮쳤다.

"문세광"은 그냥 쉽게 무너졌고, "문세광"이 놓친 권총은 허공에 튀어 올랐다가, "김영목(32서울시립 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의 뺨에 2cm의 생채기를 내고는 땅에 툭 떨어졌다 권총에는 아직도 총알 1발이 남아 있었는데, 원래 4발이 들어 있었는데, 1발은 자기 발에다 쏘고, 1발은 대통령 연단에다 쏘고, 1발은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쏘고, 나머지 1발은 아직 권총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데없이 "문세광"이 쓰러진 직후에 또 1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 총에 맞은 사람은 엉뚱하게도 맨 오른쪽 줄 앞에서 8번째 줄에 앉아 있던 "장봉화 (광복절 합창단 성동실업여자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3. 1973년도 : "서울대 문리대"의 "반 유신" 데모

73.10.02 : "서울대 문리대"에서 "나병식정문화이근성김병곤"이 주도 80명 연행돼, 구속(21)제적(23)자퇴(18)무기정학(56)  73.11. : 동맹 휴학수업 거부 등 73. 12 : 개각HR 경질  12.07 : 민관식(문교부장관)"의 건의로, 학생전원 석방처벌 무효화

74.01.07 : 정구영(공화당 초대총재)예춘호(사무총장) 탈당계 제출

74.01.08 : "중정""유신 헌법"에 의해, "긴급조치" 발표 부장 : 신직수 (법가적 스타일) : 군법무관정보부 차장검찰총장법무장관 /  검사 : 김기춘 (92년 법무부장관)현홍주(92년 주미대사) /  차장 : 김재규

75.01.22 :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공고 투표에서 지면, "박통 하야" 조건→ 02.12 : "유신헌법" 투표일 (공고 후, 불과 20일후 투표) 투표율 79.80% , 찬성 73.11%

75년 : "이병건(변호사) 구속김지하 재 구속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광고탄압 → 75.04 : 서울대연대 데모 임시 휴강 → 75.04.08 : "인혁당" 대법원 판결8인 사형선고고대 데모 대통령 긴급조치 7호 → 75.10.08 : 김옥선 의원 제명(긴급조치 시국상황 강한 비판ㆍ반 유신체제에 도전)→ 김영삼 총재 계보

4. 인혁당(2차) 사건 : 민청학년의 배후 조종죄 → 사법 살인 행위, 법이 정치권력의 시녀

"조봉암(1899~1959ㆍ향년 60세)"이 교수대에서 사라진 이후, 냉전시대의 살인

 75.04.09 : "대법원" 사형 확정된 다음날 새벽 05:00, "여정남ㆍ도예종ㆍ서도원ㆍ하재완ㆍ송상진ㆍ이수병ㆍ김용원 (8인)" 사형집행  시체 8구중 3구만 가족에게 인계3구는 나중에 인계2구는 가족의 동의 없이 화장처리 극심한 고문에 의해 엉망 가족 면회도 불허 장례식 거행될 "성당"으로 가던 중, "교도소 영구차""기동 경찰버스(3)와 출동 후 "화장터"로 직행 "화장터"에서 장례식

74.01.10 : "민청학련" 결성일 "반 유신시위" 지속 결성 (서중석유인태이철나병식) 서중석 (67학번서울대 문리대 시위 핵심성대 사학과 교수) 조영래이현배김지하윤보선장준하지학순 주교(원주 팀)백기완 면담 유인태 : 서울과 지방 대학 연계 이 철 : 서울 단과대 조직 (73.11 : 사회학과 복학생(카츄샤 제대)) 나병식 : 기독교계 + 전남대 규합

"이철유인태""대구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접촉한 "여정남"이 대구의 "도예종서도원하재완" 알고 지냈다는 것이 "인혁당과 민청학년을 연결하는 실마리"라고 판단 1,024명 조사 : 비상 군법회의 공판(253)훈방(745)

75.07.08 인혁당 : 사형(8)무기(8)징역 20( 6)  /  75.07.09 민청 : 사형(7)무기(7)징역 20(12)징역 15(6)

"민청" 배후 지원세력 조사 : 김동길 연세대 교수 : "민청학련" 배후로 구속75.02월 집행정지 (73.10, "천마산" 등산 시에 "반유신 토론" 내란 예비음모)

윤보선지학순 주교 : "민청학련"에게 돈을 준 것이 "내란 선동죄"로 처벌 (윤보선 박형규 목사 나병식 / 지학순 김지하 서중석)

74: 강신옥홍성우 변호사(민청학련사건 담당 변호사)정보부 조사 후, "강신옥" 법정구속 : 74.07.08 강신옥 : 악법은 지킬 필요 없다,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 : 강경변론으로 긴급조치 위반 및 법정 모독 혐의로 구속 75.02월 형 집행정지  88.03월 무죄선고

5 "김영삼"의 최연소 "야당 총재" (47세)

74.08.22 : 신민당 "유진산" 서거(74.04.28) 당권당수 선출 전당대회 : 청와대 비서실차지철(국회 내무의원)이 관여(정보부 배제) "고흥문" 지지 고흥문김영삼 비밀 합작 (1차 투표 시, 많은 표를 받은 사람 돕는 것으로 합작) : 김영삼김의택정해영고흥문이철승이 경선

1: 김영삼(197)김의택(143)정해영(126)고흥문(111)이철승(107)

2: 김영삼(324)김의택(203)정해영(185)고흥문 김영삼 지지이철승 김의택 지지

3: 투표 전, "김의택" 지지파, 결선투표 내일로 지연 : "김영삼" 투표 연기 결단 "김의택" 패배인정"김영삼" 최연소 야당총재(47)

6. 1976년 : 포항 석유개발ㆍ민주구국 선언 발표(명동성당)ㆍ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76.01.19 : 연두기자 회견 시, "포항석유개발" 발표 1960년대부터, "정성엽""국립지질 조사소" 싸움 1975년부터, "중정 유전개발팀" 추진

76.03.01 : 민주 구국 선언 발표 (명동성당 31절 기념 미사에서) 검찰은 "정부 전복 선동사건"으로 발표 : 김대중문익환문동환함세웅 등 11명 구속 / 정일형함석헌 등 7명 불구속 / 윤보선김대중 1심에서 징역 82심에서 5년 선고

76.08.18 (AM 10:45):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미국병사 2명이 "북한 경비병"의 도끼에 맞아 죽음 (데프콘 3 (전투태세) 발효 데프콘 2 (전쟁돌입)데프콘 1 (발포교전) 미국 측에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 계획한국군은 경호담당 "박희도 준장"(육참 총장) 휘하"김종현 소령" 64명으로 "1공수 특전여단특공부대" 편성ㆍ미국 측에서 무기 휴대금지 통보하였으나, 한국군은 "M16수류탄권총"으로 무장 작전 완료 : 08.21 AM 07:00~ 07:55 국군이 북측 불법초소 4개소 박살, 도로 차단기제거 시, 권총으로 미군을 위협 미군트럭 이용

7. 코리아게이트 (프레이저 위원회 재판) : 박동선 + 김한조 + 박보희(통일교 핵심인사)

"박정희 정권""미 국회의원"""으로 매수하려던 사건  /  70년대 미국 : 주한미군 감축군원삭감 독재정부가 뇌물로 미 의회행정부를 부패시켰다고 생각 : 76.10.25 - "워싱턴 포스트" 지가 "박동선 + 김한조""코리아게이트" 스캔들 폭로 : 77.06.22 - "김형욱"이 공식석상 등장 (42개월만)

< 목 적 >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보완책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특별지원책주한 미군 유지  /  한국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 계속 유지  /  한국 정부(유신체제)에 대한, 미국 내 비판 무마 등

1965년 : 박동선 등장

62: 조지타운 대학 졸업 → 65: 박통 면담, 박동선이 "리챠드 헤너(하원의원)한국정부"를 설득해, 미국 양곡수입 대리인이 됨 → 66: "조지타운 클럽" 설립박동선이 이권으로 900$의 커미션 획득

"해너"에게 20$, 그 외 정치인에게 75$의 정치헌금ㆍ"김형욱"300$(한국정부 보유금)"박동선의 거래은행"에 예탁해, 클럽운용 자금으로 융자

71: 박동선의 "이권(대리인)" 박탈 "일본 쌀" 구매 시도 시, "김형욱"의 앙숙이던 "박종규""미 하원의원" 동원하여 교섭 철회  71.12 : "이후락"""을 움직여, "미국 쌀 구입 대리권" 회복

1973년 : 김한조 등장 (코리아게이트의 다른 축)

백악관 보좌관국회의원학계종교계기자퇴역 군인회와 접촉

1954년. : 도미ㆍ고학으로 대졸ㆍ화장품 회사 설립 (존 앤드 버디) → 73.07 : "황재경 목사" 소개로 "청와대"에 점심식사 박정희 대통령 부부정보부와 연결 → 75.01.08 : "박통 찬양문""뉴욕 타임즈"에 기고 → 75.05 : "미 핀들리 대학"(김한조 모교재단이사) "신직수"에게 명예박사학위 받게 도와줌

"코리아게이트"의 발단

73.12.08 : "박동선""앵커리지 공항 세관검사대"에서 휴대품에 대한 "통관세"를 내지 않으려다 시비 서류 홀더에서 "미 의회 70~ 80"의 명단과 편지 발견 "코리아게이트"의 자료

75.04 : "낸시 하우(베티 포드(미 대통령 부인)의 여비서)" 남편인 "제임스 하우"가 권총자살 "박동선"이 연류 되어있음을 여기자 "맥신 체셔(워싱턴포스트)"가 추적

76.10.25 : "워싱턴 포스트" 지가 "박동선 + 김한조""코리아게이트" 스캔들 폭로

76.10.25 : "워싱턴 포스트"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워싱턴" 거주 한국인 "실업가(박동선김한조)와 공작원", "미국 의회의원들정부 관리들"에게 매년 50~100만 달러를 현금선물정치 자금으로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미국언론들은 "닉슨 정권" 하의 불법도청 사건이었던 "워터게이트"에 빗대어 "코리아게이트"라고 이름 붙였다.

76.11.24 : "김상근(워싱턴 중정요원참사관)"이 미국에 망명 "김한조""서울 중정"의 연결고리 역할자

76.11 : "코리아게이트"를 차단하려고, "양두원 차장보" 경질 (중정- 신직수 부장차장보- 양두원) "김상근"이 후임 공사인 "김용환"에게 보고 없이, "양 차장보"에게만 보고하여 찍힘본부 소환명령 하달전 상관인 "김형욱"의 도움으로, "미 법무부" 보호 하에 은신

76.12.04 : "신직수" 경질"김재규(건설부장관)"이 정보부장으로 취임 (정권의 심장부를 향해, 야수의 마음으로 총을 겨눈)

77.01 : 카터 행정부 (인권과 도덕) 출범  : 미국은 FBI(국무부 연방수사국)CIA(정보부)법무부국방부 국방안전과 (NSA)를 동원하여, "코리아게이트" 실체 추적

77.01.1702.14 : "김재규"가 도미하여, "김형욱"에게 3차례 귀국 권유 김종필정일권김동조한병기백두진장경순 등이 도미하여, 귀국 권유

77.06.05 : "김형욱""뉴욕 타임즈"와 인터뷰 자신이 중정부장일 때, 박동선에게 로비 부탁김한조에게 로비 활동자금 60$ 전달

77.06.22 : "김형욱" "프레이저 위원회" 출석하여 증언 (AM 9:45~ PM 5:00) 박동선김한조통일교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주동자 명단에 대한 증언

77.08. : "손호영"(뉴욕 총영사관 소속)김형욱 귀국 공작공작실패로 귀국 명령미국으로 치 망명망명 시, 76년 대미 공작방안이라는 계획서를 미국에 전달 (로비예산 70$)

77.09.22 : 박동선 기소 (36가지 죄 혐의) 04.03 : 공개증언증거 불충분  /  09.27 : 김한조 기소 (위증매수 음모 혐의)04.08 : 유죄 평결 받았으나증거 불충분

78.02.28 : "박동선""미 상하원 윤리위"에서 비공개 증언7일간 40시간(특별검사 재워스키)

78.08 : 한국 정부의 비협조 비난하며, "특별검사 재워스키" 퇴임

78.10.31 : 프레이저 소위는 "한국관계 종합 보고서" 발표하고, 18개월간 조사활동 마감

78.11.28 : "윤일균""터너(CIA국장카터대통령 심복)"을 만나, "코리아게이트"의 합리적 종료 요청

78.12.06 : 그날 밤, "미 하원 윤리위""한미 CIA 친선 파티" , 종료 처리 "한국 로비에 관한 최종보고서"를 채택함으로서, "조사 종료" 발표

79.06.29 : "지미 카터" 미 대통령 공식방한 (YS는 반대)

79.06.30 : 청와대에서 1차 정상회담 후, "미 대사관(정동)"에서 "지미 카터" 대노하여,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주장

문제 : 주한 미군 문제인권문제 → 박통 "굳이 가겠다면, 미군 무기와 장비는 두고 가라. 그냥 주지 못한다면, 돈을 지불하겠다. 인권 문제는 내 국민이니,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간섭 말아라"

처리 : 통역의 오역으로 해명하고, 한미 정상회담 마무리  한미관계가 풀리면서, "박통"은 자신감 충만하여, "강경 드라이브" 시작

⑨ 1977년 가을 : 미국에서 "김형욱"은 "김경재"와 회고록 집필

1977.06.22, "프레이저 위원회" 증언이후, "민족 반역자"로 치부되는 것에 대한 반발

1977년 가을 : "윤일균"(남산 차장보황해도 안악 출신)김형욱(황해도 신천 출신) 면담ㆍ7시간동안 회고록 중단 종용 : "김형욱"은 회고록 중단 조건으로, 몇 십만 달러 요구남산에서 몇 만 달러씩 송금ㆍ"김형욱""사본(최후의 무기)"을 남겨 둠 78, 일본잡지 ""에 요약본 출판 (주변사람들이 출판한 것으로 추정)

77.12.31 : "김형욱 응징하는 법" 논의ㆍ반 국가행위자의 "재산 몰수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표 82.03: 5공 들어와서, 검찰은 "영구 행불자 김형욱"에게 "징역 7자격정지 7" 선고 90.05: 6공 때, "신영순(부인)" "김형욱 재산회복"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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