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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시성ㆍ철학ㆍ음악ㆍ미술ㆍ작가

작가 (러) : 도스토옙스키 (1821)ㆍ죄와벌ㆍ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by 당대 제일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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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ㆍ1821~1881ㆍ60세)"는 러시아의 소설가로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며, 20C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흥 자본주의"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간질 발작 증세가 있었으며, 사회주의자→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 변모했다.

 

1.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ㆍ1821~1881ㆍ향년 60세)

"시베리아 유배" 시절에 악화된 지병인 "간질"과 취미로 즐기던 "도박" 등이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작품 속에 중요한 요소들로 "간질ㆍ도박" 등이 자주 등장한다.  "도박"은 그의 인생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는 나날을 보냈다.

① 대표 작품 : 죄와 벌 (1866)ㆍ백치 (1869)ㆍ악령 (1872)ㆍ미성년 (1874)ㆍ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880)

1처 :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 (미망인ㆍ1828~ ㆍ1857년 재혼)       ③ 2처 : 안나 스니트키나 (속기사) : 바쁜 일정 때문에, "죄와 벌ㆍ도박꾼" 등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구술필기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작품은 비단 "문학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종교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진보적 사회 운동을 하다가, 탄압받은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그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인텔리겐치야)"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ㆍ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소설은 흔히 "이질적ㆍ극단적" 심리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주고, 당대 "러시아"의 정치ㆍ사회ㆍ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때로 그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하는데, "발터 카우프만"은 그의 소설 "지하실의 수기"를 "실존주의를 위한 최고의 서곡"이라 묘사한 바 있다. 1880년,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그 즈음, 이미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그가 침대 누워 구술한 것을 아내 "안나"가 속기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01.28일,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사망했는데, 임종 직전, 아내에게 "시베리아 형무소"에 있었던 시절, 지니고 있었던 성경책을 읽어 달라했고, 그날 밤, 11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죽었다.

젊은 시절, 그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를 중심으로, 작가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가하였다.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정치 모임들을 감시하였는데, 그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 되어, 1849.04.23일 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 대해 경고하고자 직전에 특별 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2. 죄와 벌 (罪와 罰) :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1866.01~12월)ㆍ1867년 단행본

명 문장 : 나는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다. 주의(主義)를 죽인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조 섞인 독백)

최고로 꼽히는 명작으로, "합리적 원리ㆍ비합리적인 원리"와의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에 직면한 주인공의 심각한 고민은 투철한 심리분석ㆍ극적인 박진력으로 훌륭히 묘사되고 있다. "인간성ㆍ종교적 심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1860년대, "러시아 사회"의 사상적 혼란기에 방황하는 청년들을 대표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 "추상적 이론"이 인간에게 가한 학대와 그것에 대한 인간성의 보복을 그려 내고 있다. 빗나간 신념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의 후회와 갈등ㆍ그리스도적 사랑의 화신, 소냐.  "소냐"는 작자가 이상으로 여긴 "복음서적인 사랑ㆍ인종의 사도"이며, "무신론자 라스콜니코프"에 대립되는 "구원의 담당자"로 묘사되고 있다.  에필로그에서 그녀의 감화에 의한, 주인공의 "종교적 갱생ㆍ정신적 부활"이 그려지고 있다.

그리스도적 사랑의 화신, "소냐"   : 창작 노트에 "소냐"의 말로 "저는 죽은 나사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저를 되살려 주셨던 것입니다"라는 글이 있다. 이는 소냐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한 번은 죽었다.  곧 자기 의지대로 자신을 죽였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생명이 주어졌다. 사랑에 의한 구원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소냐"가 살 길이자, 그녀의 사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물론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종국적으로는 부와 권력이 없고, 사랑과 형제애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사회로 이어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에 의해 부와 권력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또한 부와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예루살렘", 곧 "지상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나사로의 부활"을 낭독할 때, 보여 준 "소냐"의 태도에서 그 비밀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보고 있는 방향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곳도 하나이고, 목적도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랑이 "2가지 진실의 결투"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④ 줄거리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작고 지저분한 방에 틀어박혀서, 기묘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 "인류는 범인(凡人)ㆍ비범인(非凡人)"의 두 부류로 크게 나뉘는데, "범인"은 법률을 따르는 "대중"이고, "비범인"은 법률을 만드는 선택된 "소수"로, 개혁을 위해서는 장애물을 넘어설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그는 "경제적으로 인류의 행복에 공헌한다면, "이(蝨ㆍ나쁜 관리의 폐해)"에 불과한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이는 것 정도는 별것 아니다.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론"만으로는 "살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가미된다.

심한 노이로제ㆍ생활고ㆍ여동생의 약혼(오빠를 위한 희생)을 알리는 어머니의 편지ㆍ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와의 만남ㆍ세상의 부정에 시달린 불쌍한 민중의 상징과도 같은 그 가족의 이야기ㆍ술집에서 듣게 된 학생과 사관의 대화(이는 그의 생각과 완전히 같은 내용의 이야기였다)ㆍ길가에서 우연히 주워들은 노파의 여동생과 행상의 대화(그는 내일 밤 7시에 노파가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등의 우연들이 겹쳐지면서,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그를 실제 행동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우연히 아무런 문제없이 범죄를 결행하고, 약간의 금품을 훔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이론이 무너지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것은 두 측면의 싸움이 기둥이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예심판사 포르피리"와의 지적 결투이고, 긴박한 대결이 3번 이루어진다.

"포르피리"는 여러 가지 심리적 증거로 미루어,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전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포르피리는 체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자수를 권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자가 현행 질서에 항복하는 것이고, 자기 사상의 파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적 결투"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신념에 동요가 생긴다. 그것을 더욱 부추긴 사람이 "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 자기 욕망을 위해, 도덕을 무시하는 절망적인 "니힐리스트"의 모습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이론의 추악한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기둥은 "소냐"와의 대결이다. 범행 직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제 완전히 고독한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이 그를 괴롭힌다. 촛불이 하나 밝혀져 있을 뿐인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읽는 창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살인자. 이것은 이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에 키스를 한 다음, "당신에게 키스를 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뇌에 키스를 했다"고 말한다. "소냐"는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해, 자기가 가진 신앙의 길로 이끌려고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으려 하지만, "소냐"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영원한 고독을 뜻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그는 결국 "소냐"의 사랑에 굴복해, 자수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죄수들로부터 소외당하고, 그 죄수들이 "소냐"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는 사이에 드디어 자기 사상의 패배를 인정하고, "소냐"의 진실에 굴복하게 된다.

3. 카라마조프의 형제 (1880)

마지막 소설로, "소설"이 너무 난해하고, 방대하다. 그가 평생 고민해 온, "인간 존재의 본성과 다양한 사회적ㆍ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고"가 집약된 문학의 정수이며, 또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정확하게 투영한 내용으로, 작가의 사회 비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미완성 대작"은 그를 평생 괴롭힌 "신과 악마ㆍ선과 악"의 두 원리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야심작이다. 이 "두 원리의 대결"은 "이반의 극시 - 대심문관(大審問官)"과 "장로 조시마의 수기"와 대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결국 두 원리의 통일이 성취되지 않은 채 끝나고 있어, 작자 자신의 "자아 분열이 얼마나 심각 했었는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등장 인물

 표트르 (카라마조프 가()의 가장): 골수까지 광대 근성이 밴, 미천한 계급으로부터 입신양명한 사람으로 탐욕스럽고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지주였다.             드미트리 (장남): 부친의 음탕 방자한 피를 이어받아 청년의 정열에 탐닉하여 이를 전혀 제어할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풍부한 시적 감수성이 뛰어나, 영원한 것에 대한 순진한 동경심을 품고 있다.             이반 (차남): 철저한 무신론자합리주의자이다. 그의 왕성한 지적 탐구는 "불사(不死)란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허용되고 있다"고 하여, "도덕적 허무주의"를 도출해 낸다.             스메르자코프 (서자): 간지(奸智)에 뛰어난 "비열"한으로, 이반의 심오한 이론에 대해, 자기 나름의 비속한 해석을 내리고, 유산을 한몫 차지할 생각에서, 부친살해를 결행한다.             알료샤 (막내 아들): "종교심"이 두터운 순결유화한 사람으로, 그의 맑고 선의에 찬 마음은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동정에 넘쳐 있다.

② 줄거리

"카라마조프 가"의 "친부살해"를 소재로 한다. "표트르 카라마조프"는 "돈 문제"로 "장남 드미트리"와 다퉜는데, 그날 밤 "표트르"는 누군가에게 피살되고, "장남 드미트리"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 살인을 저지른 것은 서자인 "스메르자코프"였다. 아버지 "표트르"는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번 졸부지만, 탐욕스럽고 방탕하게 살면서, 3명의 아내에게서 4명의 아들을 얻었다. "서자 스메르자코프"는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받는 차별 때문에,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한다. 또한, 아버지 "표트르"와 아들 "드미트리"는 "그루셴카"를 사이에 두고, "애욕의 투쟁"을 벌인다. 한편, "드미트리"는 동생 "이반"과 함께, 두 여성 "카테리나ㆍ그루셴카"와 사랑ㆍ질투의 관계를 형성한다.

어느 날, "드미트리"는 "돈 문제"에 쪼들리면서, 아버지와 몸싸움까지 하며, 다툰다. 그리고 아버지 "표트르"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서자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이었으나, 살해되던 날, "간질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게 된다. 결국 장남 "드미트리"는 살인범으로 체포, 투옥되고, 재판을 받게 된다. 차남 "이반"의 추궁을 받던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털어놓지만, "이반"이 말했던 "신만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이 자신의 범죄를 부추겼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다. 더군다나 "드미트리"가 "카테리나"에게 보낸 편지에, "평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는 내용이 공개되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저지른 살인도 살인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기 죄를 인정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4. 생 애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마린스키 자선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7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나, 15살 때까지 생가에서 지냈다. 아버지 쪽이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의 신분은 "중인 계급"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으며 매우 엄격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자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1837년,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자녀들에게 천사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838년, 그는 "공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군사 교육을 받게 되었다. 소심하고 예민하며, 병약했던 소년 그에게 군사 훈련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문학은 유일한 위안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습작을 서로 평가하고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1839.06.06일,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후, 영지로 내려가 생활했는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던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형제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기작가 밀레르"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1841.08월, 그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성 제도국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문학으로 기우는 열정을 저버리지 못하고, 작가가 되어 문학에 전념하기 위하여, 1844.10월 제대하였다.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비평가 벨린스키"로부터 "제2의 고골리"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데뷔 전에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직접 작품을 건네받아 읽었던 "네크라소프"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밤중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데뷔는 화려했을지 모르나, 이어서 발표한 "백야ㆍ분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 때부터 "서구주의 사상"에 끌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페트라셰프스키"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젊은 시절, 그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를 중심으로, 작가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가하였다.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정치 모임들을 감시하였는데, 그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 되어, 1849.04.23일 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 대해 경고하고자 직전에 특별 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온 이 경험으로 인하여, 몇몇 사람은 공포ㆍ충격으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백치" 등의 작품에, "사형 집행 직전"의 심정을 묘사하는 등 이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감옥 수형과 출소 후에 수도로 복귀하지 못하고, "시베리아"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는는 1854년까지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수형 생활을 한다. "성서" 이외에는 일절 출판물이 허용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성서"에 대한 깊은 독서와 감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혔던 죄수와 민중들의 생생한 삶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의 사상적 변화를 겪게끔 하였다. 이 시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일 "죽음의 집의 기록"을 펴냈다. 출소 후, "세미팔란치스크 수비대"에서 4년 간 사병으로 근무하며, 당시 남편이 있었던 여성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를 만난다. "마리야"의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는 1857년 당시 29세였던 그녀와 결혼한다.

그는 가까스로 1859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뒤,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공백을 메꾸고자,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다. 1861년, "형"과 함께, 잡지 "시대"를 발간하고, "학대받는 사람들ㆍ죽음의 집 기록"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듬해 "발행 금지"를 당하였다. 1864년, "형"과 함께, 새로운 잡지 "세기"를 창간하였으나, 실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866년, 걸작 "죄와 벌"을 완성하였다. 1867년부터, 외국, 특히 "드레스덴"에 거주하면서, "백치ㆍ악령"등을 쓰고 귀국하였다. 1874년, "미성년"을 발표하여, 큰돈을 벌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죄와 벌ㆍ도박꾼" 등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구술필기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속기사였던 "안나 스니트키나"는 훗날 그의 2번째 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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