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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시성ㆍ철학ㆍ음악ㆍ미술ㆍ작가

작가 (독) : 그림형제 (1785)ㆍ백설공주ㆍ신데렐라ㆍ헨젤과 그레텔

by 당대 제일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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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그림 형제 (야코프 그림ㆍ빌헬름 그림)"은 독일 민중들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들을 수집하였고, 형제는 함께 "그림 형제 동화집"을 출판하였다. 모두 "언어학"을 연구하여, "독일어 음운변화에 관한 법칙"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그림 형제"는 본래 언어의 변천사를 연구하던 "언어학자들"이었으며, "그림 동화"는 연구 과정에서 연구에 쓰인 "옛날이야기ㆍ고서들"을 엮은 것이다.

 

1. 그림 형제 : 독일 야코프 그림(Jacob Grimm) +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

이들이 "독일 지방"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동화"를 편찬한 것은 당시 여러 도시국가로 나뉘어있던 "독일 지방"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하나의 공통적인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독일의 전통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말년의 그림 형제는 "독일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여, 1854년 출간하였다.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 "1,000 마르크"짜리 독일 지폐에는 그림 형제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형 "야코프"는 평생 "독신"이었으며, 동생 "빌헬름"은 "헨리에테 도로세아"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도르트헨"이란 애칭으로 불리던 "빌헬름의 아내"는 "그림 형제"와 빨간 두건을 함께 들으며 자란 소꿉 친구였다.

 대표 동화

백설 공주ㆍ신데렐라ㆍ헨젤과 그레텔ㆍ라푼젤ㆍ잠자는 숲속의 미녀ㆍ개구리 왕자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ㆍ브레멘 음악대

야코프 그림 (Jakob Ludwig Carl Grimmㆍ1785~1863ㆍ78세): 독일 언어학자ㆍ동화 수집가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로, "독일어 문법(Deutsche Grammatik)"에서 독일어뿐만이 아니라 게르만어 전체의 문법적인 특징을 비교하였다. "게르만어 자음"과 여기에 대응하는 다른 "인도유럽어족 자음"과의 관계에 일정한 법칙이 있음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림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다.

빌헬름 그림 (Wilhelm Grimmㆍ1786~ 1859ㆍ73세): 독일 언어학자ㆍ동화 수집가

1814년 "카셀의 도서관" 사서가 되고, 뒤에 형과 함께 "괴팅겐"에 부임하여 교수가 되었으나, 1837년, "하노버 왕 어네스트 오거스터스"의 명을 어겨 파면되었다. 1841년, 형과 함께 "베를린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저서 : 독일 영웅의 전설ㆍ독일 답운사 연구

그림 형제가 살아있는 동안, 동화집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에 수록한 이야기의 개수는 최종판을 기준으로 총 211개이며, 판을 거듭하면서 삭제된 이야기까지 합하면 241개다.  판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추가되었으며, 일부 아동에게 적합하지 않은 성적인 내용이나, 잔인한 장면들은 삭제되기도 하였다.

1812년 :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초판) :  86편의 이야기            1814년 :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증보판) : 86 + 70편 이야기 추가 = 156편             18161818: 독일 전설 : 585편의 전설을 수록수록된 많은 이야기들은 각종 연대기의 기록과 관련이 있으며, 드워프거인괴물과 같은 가공의 생명체들이 등장한다.             1819~1822년까지 :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2): 보다 많은 민담을 수집하여 170여 편 수록

2. 동화 내용ㆍ 상당 부분, 잔인한 묘사ㆍ선정적인 묘사

그들의 완전한 창작이 아닌, 기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아 엮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림 형제의 민담집"이 나왔을 때, 그저 구전되던 민담들을 수집해 책으로 냈을 뿐, 아동을 위한 글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출판사에서 은근슬쩍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이라는 제목을 붙여 내기 시작했고, 그 뒤 "그림 형제"의 이야기들이 마치 "아동을 위한 문학"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차츰 이야기들이 상당히 각색시켜, 많은 사람들은 순화한 이야기를 주로 알고 있다.

그림 형제가 수록한 "민담"이 담고 있는 내용이 "어린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견해는 줄곧 있어왔다. 초판본에는 "잔인한 묘사ㆍ선정적인 묘사"가 상당히 나와,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이로 인해 일부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록된 이야기 자체를 빼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이런 "민담" 속에서 아이들에게 읽히기 부적절한 묘사가 나오는 것은 비단 "그림 동화"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민담" 속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에, "그림 동화만 잔인한 묘사가 많다"고 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한국의 대표 민담인 "콩쥐 팥쥐"에도 잔인한 묘사가 많다.

"못된 계모를 때려잡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계모 = 나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어 낸 주범이며, 어린 아이들은 "계모"의 뜻이 "나쁜 엄마"라고 아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실제로 상당 부분의 원판본 혹은 전승에서는 "계모"가 아니라 "친모"이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경우, 친부모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는 것을 우려하여, 상대적으로 죄책감 없이 적대감을 돌릴 수 있는 "계모로 대체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사회는 "재혼"이라는 것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한편, 전해오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페어리(Fairyㆍ요정)"은 모두 "마녀"로 기술한 점, 모든 "프린스(Prince)"는 "왕자"로, 모든 "프린세스(Princess)"는 "공주"로 등장시키고 있는 점 등은 이 동화집이 "독일의 실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림 형제"가 "독일인"이었기에, 동화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유대인"을 괴롭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한 암시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노간주 나무

우리 엄마는 나를 죽였고, 우리 아빠는 나를 먹었네.  누이동생 마를렌은 내 뼈를 빠짐없이 추슬러서, 곱디 고운 비단으로 정성껏 싸서,  향나무 밑에 두었네. 짹짹 짹짹! 나같이 예쁜 새가 또 어디 있을까!  동화 내용 자체가 호러엽기로 "계모"가 "의붓아들"을 살해해서 수프를 끓였으며, 아버지는 그걸 잘만 먹는다(모르고 먹긴 하지만). 이후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어쨌든 여동생의 도움으로 "계모"가 아들의 환생인 "새"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진 돌절구에 압사당한다는 게 엔딩이다.

 어리석은 한스

"바보 한스"가 신붓감을 데려오자, 어머니가 "한스"에게 그런 아이에게는 따뜻한 눈길을 던져줘야 한다고 말했더니, "한스"는 외양간에서 갓 떼 낸 따끈따끈한 "가축 눈깔"을 신붓감에게 던져줬다.  당연히 "눈 테러" 당한 그 예비 신붓감은 이 멍청한 "사이코패스"를 차버리고 갔다.

아이들이 돼지잡기를 흉내 낸 이야기 (아이들의 사람 죽이기 놀이)

초판본에는 "아이들이 돼지잡기를 흉내 낸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야기도 있었다. 한 아이가 아버지가 돼지 도축하는 걸 보고는 "돼지잡기 놀이"라며, 동생을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일가족이 몰살당했는데, 이걸 본 동네 아이들이 "돼지 잡는 놀이"를 하며, 자신의 친구나 동생의 목을 자르는 사건이 논란이 되어서, 아이의 부모ㆍ선생ㆍ교장ㆍ시장ㆍ왕 등에게 그 책임이 계속 미뤄진다는 막장스토리다. 정작 Page는 모든 그림 동화에서도 짧은 편인, 2~3page 밖에 없는 단편동화인데, 참 충격적이라 오래 생각하게 된다.  후에 이 초판본은 당 시대에도 충격적이라 생각했는지, 이후 출간한 책은 이 이야기를 빼버렸다.

3. 1807년부터 "민담"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민담"을 수집한 전례로는 이미 1780년대 "요한 카를 아우구스트 무샤우스"의 작품이 있었다. 그러나 "무샤우스" 작품은 수록 량도 적고, 대중에게 알려지지도 않았다. 방대한 규모의 "독일 민담"을 채집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것으로는 "그림 형제의 동화집"이 최초라 할 수 있다. 

"민담"을 수집하게 된 데에는, "루트비그 아힘 폰 아르님ㆍ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사비니 교수"의 집을 왕래하며, "그림 형제"와 친분을 쌓고 있었다. 1805년, "아르님ㆍ브렌타노"가 독일 민요 모음집인 "소년의 마적"을 출간한 일은 "그림 형제"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사비니 교수"의 추천으로 "민요집 2권" 작업에 참여하게 된 그림 형제는 1806년부터 방대한 양의 "민요"를 모았다. "그림 형제"는 이 과정에서 "민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12년 "그림 동화"로 널리 알려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가 출간되게 되었다. "그림 동화"는 대부분 여러 지역에서 전해오던 독일 민담ㆍ위그노의 구전 설화ㆍ프랑스에서 전해온 이야기 등도 수록되어 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림 형제"는 "민담"을 모으면서 몇몇 이야기의 소재에 대해 "격노" 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중세 말부터, 이미 "그림 형제"의 동화집과 같은 "중산층 가정"을 위한 동화집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림 형제"는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서문에서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가 "헤센 주"에서 수집된 것이라 밝히고 있으나, 그림 동화가 온전히 독일의 고유한 문화적 소산의 결과라 할 수는 없다. "그림 형제"보다 100년 전에 이미 "프랑스"에서는 "샤를 페로"가 "옛날이야기와 교훈"을 발표하였고, "그림 동화"에 실린 이야기 가운데 8편이 "페로"의 것과 유사하다. 또한 "그림 형제"의 민담 수집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도로테아 피만"은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이었다.

4. 생 애

고향은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하나우"로, 형 "야코프 그림"은 1785년, 동생 "빌헬름 그림"은 1786년에 태어났다. 9남매 중 셋은 어려서 죽었다. 고향에서 목가적인 생활을 하던 "그림" 일가는 아버지가 1790년 "한센 공" 수하의 일자리를 얻어 도시로 이사하였다. 179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은 다시 "하나우"로 돌아왔으며, 2년 뒤 할아버지마저 사망하여, 어머니와 그의 가족들은 이곳저곳을 전전하였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양아버지 밑에 있게 된 "그림 형제"는 후일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데렐라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그림 형제"의 이야기가 전해오던 "민담"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심슨ㆍ라우드(2000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러한 해석을 부정한다. "그림 형제는 체록한 이야기를 윤색하지 않고 그대로 출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들은 이야기가 교훈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전해온 그대로 기록되어야 가장 사실적인 이야기를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토머스 오닐"은 199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12월 호)"에서 그림 형제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그림 형제의 매혹적이나 냉혹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꾸 "이게 무슨 뜻일까?"하고 묻는다."

그림 형제는 "카셀"의 "프리드리히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마르부르크 대학교"에는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그림 형제는 그로 인해 과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림 형제는 20대 초반부터, "언어학ㆍ문헌학"을 연구하여, "그림 법칙"을 정립하였다. 그림 형제는 "언어학의 자료"로 삼기 위해 이야기들을 수집하였다. 연구의 부수적 자료로 수집한 이 이야기들은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1808년, 형 "야코프 그림"은 "베스트팔렌 왕국"의 국왕이었던 "제롬 보나파르트"로부터 "수석 언어학자"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812년, "그림 형제"는 그 동안 수집한 이야기들을 묶어, 1번째 이야기 집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그들이 농부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들과 함께 다른 언어로 이미 출간되어 알려져 있던 "샤를 페로의 이야기" 같은 것들도 수록되었다. 형 "야코프"는 학문적 연구를 보다 중요시 한 반면, 동생 "빌헬름"은 아동에게 알맞은 문학적 요소를 보다 강조하였다. 그들은 "민속학ㆍ원시 문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1816년, "그림형제"는 "카젤의 도서관"에 취직하였다. 그 후 2년간의 작업을 거쳐, 독일의 전설과 초기 문학을 묶어, 2번째 이야기 집을 펴냈다.

그림 형제는 "그림 법칙"을 비롯한 "독일어 연구"를 계속하였고, 1830년 "괴팅겐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형 "야코프"는 1830년 "괴팅겐 대학교"의 언어학 교수이자, 도서관장으로 취임하였고 "빌헬름"은 1835년 교수가 되었다. 1837년, "그림 형제"와 "괴팅겐 대학" 5명의 교수들은 "하노버 왕국"의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 1세"가 "자유 헌법을 철폐"하려하는 것에 반대하는 청원을 제출하였다. "괴팅겐의 7인"으로 불리는 이들은 이일로 인해 파면되었다. 이듬해인 1838년 "프로이센 왕국"의 초빙으로 "그림 형제"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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