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인물 - 시성ㆍ철학ㆍ음악ㆍ미술ㆍ작가

작가 (덴) : 안데르센 (1805)ㆍ미운 오리새끼ㆍ성냥팔이 소녀ㆍ인어공주

by 당대 제일 2023. 1. 22.
반응형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1805~187570세)"은 세계 최고의 덴마크 동화 작가ㆍ소설가로, 전 세계적으로 친 덴마크 정서의 발흥에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1872년까지 발표한 총 160여 편의 동화 작품은 모두 유명해져서 연금 수령, 안데르센의 그림이 들어간 우표 발행이라는 영광을 누렸다.

 

1.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ㆍ1805~1875ㆍ70세) : 185cm

"안데르센"은 성공한 "미운 오리새끼"이며, 고결한 "인어공주"다. "꿋꿋한 양철 병정"이자, 왕의 사랑을 받는 "나이팅게일"이며, 악마 같은 "그림자"다. 우울한 "전나무"이기도 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이기도 하다.

대표 동화

미운 오리 새끼ㆍ벌거벗은 임금님성냥팔이 소녀인어공주그림 없는 그림책나이팅게일ㆍ눈의 여왕ㆍ백조 왕자엄지공주ㆍ빨간 구두하늘을 나는 가방공주와 완두콩외다리 병정5개의 완두콩어머니 이야기모래장수 올레 (Sandman 올레)

② 안데르센 동화 특징

동화가 유치하지 않고, 어른이 읽어도 이야기에 깊숙이 몰입해 가슴 속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 또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불우한 추억들과 주변 환경을 상당히 투영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읽기엔 이야기가 너무 암울한 경우가 많고, 아예 "배드 엔딩ㆍ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들도 많다. 자신의 동화에 자신과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캐릭터화 시켜서 등장시키는 작품도 많다. 그의 동화들 중에는 분명 작가가 있는데도 발단이나 결말 등에서 판본이 여러 가지인 작품이 제법 있다.

2. 양성애자독신

양성애자였던 그는 평생 어떤 사람과도 결혼하거나, 사귀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그가 독신으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릴 때 쓴 그의 일기에는 "평생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다짐이 적혀있다고 한다. 한편 젊은 시절 짝사랑했던 "리보르그 보이트 (Riborg voigt)"에게 차인 것이 충격이 되었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로 놀림을 당해,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그가 난생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상당히 긴 편지로 "르보르그"에게 고백을 했건만, 겨우 2줄밖에 안 되는 답장으로 무참하게 차였다. 대신 "르보르그"는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그가 쓴 "동화의 애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신으로 살겠다."던 초년의 맹세가 아주 굳건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게, 그 이후에도 그는 "소피 외르스테드(Sophie Ørsted)ㆍ후원자의 딸인 루이스 콜린(Louise Collin)"등에 관심을 표한 바가 있다. 하지만 결국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실패했고, 동화 "나이팅게일"을 쓰는데 영감을 준 "제니 린드(스웨덴 오페라 가수)"에게도 고백했으나, "린드"는 그를 친오빠처럼 생각했기에 거절했다고 했다.

한편 유명한 동화 "인어공주"는 연하의 남성 "에드워드 콜린 (Edvard collin)"과의 관계를 반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친구 사이었지만, 내심 "콜린"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그는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며, 절절한 편지로 고백을 감행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콜린"은 이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백을 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콜린"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린다. 이 일 때문에 "안데르센"은 굉장히 상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쓴 작품이 "인어공주"로, 그의 연구자들은 왕자가 "콜린"을 상징하고,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상징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래도 "콜린"은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이때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은 "안데르센"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몰랐고, 그 때문에 그가 더 많이 상처 입었던 것이라고 썼다. 못내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그가 사랑했던 남자로는 "덴마크"의 댄서 "해럴드 샤르프 (Harald Scharff)ㆍ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가 있지만, 역시 사귀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늘 짝사랑 상대에게 집착에 가까운 편지와 관심을 보여줬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그의 짝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그가 훗날 쓴 편지에서 말하기를, 자신에게 행복은 가정의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었지만 대신 "뮤즈"가 되어 찾아와 주었다고 했다.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종교적 신조에 반하는 일이었던 만큼, 남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은 일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 평 가

"창작동화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동화는 그림형제처럼 민담을 재구성하거나, 저자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축약ㆍ왜곡ㆍ구전되어오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그것이 동화의 전부였었다. "안데르센"도 초창기에는 "그림 형제"처럼 민담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썼으나, 점차 자신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의 비중을 늘려나갔다. 그의 동화는 자칫 교훈적이고 도구적인 의미로만 흐를 수 있는 동화라는 장르에 예술성을 불어넣어, 동화가 민담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 동화 스스로가 문학적으로 훌륭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동화"라는 장르의 "예술적 자율성"을 불어넣은 셈이다. 당장 우리가 알고 있는 창작 동화의 규격ㆍ틀ㆍ이야기 구조ㆍ문체 등과 같은 바운더리는 전부 "안데르센의 창작 동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의 동화는 이러한 "근대 동화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이 괜히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다나카 요시키(은하영웅 전설의 작가)"는 자신의 추리 모험소설 "월식도"의 마물에 "찰스 디킨스ㆍ안데르센"을 등장시켰는데, 상당히 소심하고 정서불안증이 있는 어린아이 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작가의 말로는, "안데르센"에 대해 조사하니 실제로 그런 성격이었다고 한다. 처음 "안데르센 동화"가 나왔을 당시, 평단ㆍ대중들로부터 "이런 비교육적인 이야기를 애들 보는 동화라고 쓰다니!" 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물론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이런 혹평은 점점 설 곳을 잃어갔다. 그런데 "안데르센 동화" 중 몇몇 편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애들 보라고 쓴 게 아닌 것 같은 수위를 자랑하기도 한다. (Ex, 부시통ㆍ큰 크라우스 작은 크라우스 이야기)

4. 생 애

"덴마크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일용직 노동자 신세로 전락해 버린 까닭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훗날 연극배우가 되려고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으나, 정규 교육 부족으로 인해 배우로서 필요한 자질인 문법이나 발음이 어색해서 연극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안데르센"의 집안은 할머니가 "병원청소 노동자"로 일할 정도로 가난하여, 안데르센의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인 어머니는 그에게 예수를 공경하는 순수한 개신교 신앙을 심어주었고, 아버지는 "인형극ㆍ독서"를 통해, 어린 그에게 "옛날이야기ㆍ아라비안나이트"를 자주 들려주며 상상력ㆍ교양을 심어주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가장의 자리가 비게 되자 그는 어린나이에 공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빨래를 대신해주는 일을 했다.

1819년, 연극배우의 꿈을 품고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변성기 이후 목소리가 탁해지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더구나 가난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서 문법ㆍ맞춤법이 엉망인 그의 연극대본은 극단주에 의해 반송되었기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마음의 고통에 시달렸다. 그가 글 솜씨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안 "국회의원 요나스 콜린"의 충고로 라틴어 학교에 뒤늦게 입학하여 문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생활도 학교장과의 갈등으로 인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이 학교장은 훗날 60세가 넘은 안데르센의 악몽에서도 등장하는 등 그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교장은 안데르센의 모든 창작 활동을 금지하고 하찮게 여겼으며,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에게 악담을 내뱉었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 영향을 주었다. 의외로 처음에는 주로 "소설"을 집필했다. "동화"로 유명하지만 다수의 시ㆍ희곡을 집필한 시인ㆍ 극작가이기도 했다. "동화"를 제외하고 잘 알려진 안데르센의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 "즉흥시인(Improvisatoren)"이 있다. 소설가로서의 재능도 상당해, 거의 첫 소설이었던 "즉흥시인"의 경우, 문단과 대중 양쪽의 호평을 받으며 바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30살인 1835년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현대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어린이를 속이는 글이나 쓴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은 모양이다. 다만 명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앞에는 "즉흥시인"을 집필한 뛰어난 소설가"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843년 발표한 "미운 오리 새끼"가 대성공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이 "안데르센 동화"에 빠져들었다. 그의 유명세가 대단해서 심지어 그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고, 말년에는 정부로부터 특별 연금까지 수령하는 등 국내외적인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를 애호하던 유명인사 가운데서 "찰스 디킨스"는 그와 여러 번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다. 1872년, 침대에서 떨어져 다친 뒤로 제대로 걷지 못했고, 이후 여러 합병증 증상을 보이며 자리에 누워 병마에 시달리다가 1875년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에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ㆍ루이세 왕비"까지 참석했다.

 찰스 존 허펌 디킨스 (Charles John Huffam Dickensㆍ1812~1870ㆍ58세): 영국 소설가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디킨스"는 가장 중요한 영향을 "아리비안 나이트"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묘비명 :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고 박해 받는 자들의 동정자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영국의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를 잃었다.               대표작 :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ㆍ니콜라스 니클비(1838~1839)ㆍ크리스마스 캐럴(1843)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황폐한 집(1852~1853)어려운 시절(1854)두 도시 이야기(1859)위대한 유산(1860~1861)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