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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시성ㆍ철학ㆍ음악ㆍ미술ㆍ작가

고대 그리스 ⑪ 히파티아 (AD 370)ㆍ남성을 압도한 수학자ㆍ굴 껍질

by 당대 제일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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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 (Hypatia370(351)?~41544(59?))"는 "동로마 제국 (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철학자ㆍ수학자ㆍ물리학자ㆍ천문학자로, "히파티아의 굴 껍질 (Ostrakois of Hypatia)"의 주인공이다. 보통 남자들은 다른 분야라면 몰라도, "철학ㆍ수학"만큼은 언제나 남성이 여성을 압도해 왔던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ㆍ수학" 분야에선 남성을 압도한 여성이 바로 그녀이다.

 

1. 히파티아 (Hypatiaㆍ370(351)?~415ㆍ향년 44세(59?))

• 출 생 :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직후, 동로마 제국 (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사 망 : 동로마 제국 (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학 파 : 신플라톤주의        연 구 : 수학천문학        명 언 :생각할 권리를 마음껏 누려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ㆍ인생은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우선 가까이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다.

2. "히파티아"의 업적

그녀와 비견할 수 있는 "여성 과학자"는 1600년 후에 태어나는 "마리 퀴리 여사" 뿐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철학 분야 :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를 완성        ② 수학 분야 : 디오판투스의 대수학 (Diophantus' Arithmetica)을 완성        물리학 분야 : 비중이 다른 두 액체의 상대 비중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하이드로미터 (Hydrometer)" "수중 투시경 (Hydroscope)"을 발명        천문 분야 : 그녀의 아버지(수학자 테온 (Theon Alexandricus)) 이름으로 발표된, "천구의(天球宜, Astrolabe)"를 실질적으로 제작했던 천문학자

3.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에 등장하는 20명 중, 유일한 여성

"바티칸 시국"에 위치한 "교황 궁"중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가 이른바 "라파엘로의 방"이다.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장식된 이 방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이다.  이것은 "아테네"에 있었던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실제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ㆍ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을 모두 모아서, 하나의 그림으로 제작한 거대한 벽화이다.

"히파티아"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20명의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그림 속의 인물들 중에서는 유일한 여성이다. 또한 "라파엘로"는 "철학"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중요한 인물부터 중앙에 우선적으로 배치했는데, 그녀는 그림 중앙부 왼쪽에 위치한 "소크라테스"의 바로 앞쪽에 서 있다. "히파티아"는 "그리스ㆍ로마 철학"에서 실제로 그 이상의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철학자"였다. "히파티아"는 "암흑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인간은 개인의 이성과 개명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사회 전체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당시 "로마 제국" 전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유럽에서는 "이성과 개명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무지와 야만의 암흑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유럽인들은 그 사실조차 1,000년쯤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4. 죽음 : 히파티아의 굴 껍질 (Ostrakois of Hypatia)ㆍ오스트라코이스 (굴의 껍질)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을 "경제ㆍ문화적"으로 선도하던 도시였고, 그곳에서 "히파티아"가 갖고 있는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총독인 "오레스테스 (Orestes)" 역시 그녀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는 "키릴루스(Cyrilus)"였는데, "키릴루스"는 "기독교사"에서는 영웅이었다. 그는 "에페수스 종교회의"에서 "이단자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몰아낸 뛰어난 신학자이며, 저술가였으며, 후일 "신앙의 기둥(Pillar of Faith)"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성인"으로 시성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당시, 현실 세계의 "키릴루스"는 "성직자"라기보다는 "정치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고, 위험한 선동가이기도 했다. 그가 "주교"가 된 다음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다신교도"들을 몰아내기 위해, 폭동 수준의 소요를 지속적으로 일으키고 있었다. "키릴루스"는 권력을 원했고,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총독인 "오레스테스"와의 밀접한 관계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히파티아"에 비하면, 무척 초라한 수준이었다.

414년 가을,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라고 "오레스테스"에게 요구했다. 

"오레스테스"가 이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자, "키릴루스"의 사주를 받은 "기독교 성직자"들은 "오레스테스"가 "올림포스 신"들을 위한 제물을 바쳤다고 신도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심각한 소요와 함께, "기독교도"들의 습격을 받은 "오레스테스"는 선동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그러자 "교회"와 "총독부"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6개월 내내, 기독교도들의 폭력적인 소요와 이에 따른 대대적인 검거가 반복되자, "키릴루스"는 공격방향을 돌려, 선동하기 시작했다.  "오레스테스"가 아니라, "히파티아"를 "기독교도"들의 "적"으로 규정했다. "키릴루스"는 자신과 "오레스테스"의 관계를 방해하고 있는 존재가 "히파티아"이며, 그녀만 제거되면, "교회"와 "총독부"의 관계도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히파티아"는 격렬한 소요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그녀는 숭배의 대상이자, 자랑거리였다. "히파티아"는 원래부터 "여성복"이 아니라, 남자 강사들이 입는 풍성한 "튜닉"을 입었으며, 남자들처럼 자신이 직접 전차를 몰고, "알렉산드리아"를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그러던 415.03월 어느 날 오후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베드로(Peter the Reader)"라는 세례명을 가진 "니트룸 수도원"의 "수도승"이 주동이 되어, 수도승과 광신도들로 이루어진 "폭도"들이 "아카데미"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던 "히파티아"의 마차를 습격했다. 수도승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그녀의 옷을 모두 찢어, 나체로 만든 다음, 거리로 그녀를 질질 끌면서 돌아다니다가, "캐사리온 교회"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상" 바로 아래에서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잔인한 의식이 행해졌다. 

폭동을 일으킨 자들은 교회 안에서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 "굴의 껍질"을 의미한다.)"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아직 살아 있는 "히파티아"의 피부를 벗겨내기 시작했고, "히파티아"는 이 잔인한 의식 도중에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그녀의 "살"을 "뼈"로부터 모두 발라낸 다음, 조각난 시체들을 거리 곳곳에 뿌리고, 일부는 불태웠다.

"키릴루스"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약 200년 후, "이집트 콥트 교회"의 "요한(John of Nikiu) 주교"에 의해서, 남겨진 기록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반영한다. "당시 히파티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교도 여자 철학자가 나타나, 공을 들여 마법과 천구의와 악기를 연구해서 사탄의 계략으로 많은 사람들을 홀렸다.(중략)  이에 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심판자 베드로의 인도에 따라, 그 도시의 사람들과 총독에게 사악한 주문을 걸어놓은 그녀를 찾아 나섰다.(중략) 그들은 캐사리온이라고 불리던 위대한 교회로 그녀를 질질 끌고 들어갔다. 그때는 마침 단식일 기간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옷을 모두 찢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거리를 따라 도시의 구석구석으로 그녀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리고는 마침내 키나론(Cinaron)이라는 곳에 도달해 그 시신을 불태웠다."

"히파티아"는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됐고, "키릴루스"는 그토록 원하던 권력을 얻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카데미"는 폐쇄되었고, 그녀의 제자들은 모두 "아테네"로 옮겨, 그곳에서 "아카데미"를 다시 열었다. 그리하여 "철학ㆍ수학ㆍ문화"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테네"로 이동했다. "키릴루스"는 이날로부터 10년쯤 후, 소집된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숙적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교회로부터 몰아내고, 그 공로로 "신앙의 기둥"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성인(Saint)"으로 불리게 된다.

5. 생 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건설된 "이집트"의 유서 깊은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가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4세기 말엽, "히파티아"는 바로 그 도시를 상징하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테온 (Theon Alexandricus)"의 딸이었다. "테온"도 그의 딸만큼이나 뛰어난 수학자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그의 저서는 유럽에서 18세기까지 "수학 교과서"로 사용될 정도였다.

"히파티아"가 태어난 정확한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서기 370년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이집트"로 이주했던 "그리스 인"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저술 작업에 참가하면서, 내일이 기대되는 천재로 명성을 얻었다. "테온"은 "히파티아"가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아테네"로 유학을 보냈다. 그녀는 "아테네"에 잠시 머물다가, "로마ㆍ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 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플라톤 아카데미"의 책임자로 강의 시작

유학 중에, 그녀는 "로마"에서 약 100년 전에 "플로티누스(Plotinus)"에 의해서, 제창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와 접하게 되었다."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ㆍ로마 철학"의 다양한 갈래 중에서, 고도의 형이상학적인 경향을 갖는 새로운 풍조였다. "히파티아"의 아버지 "테온"은 귀국한 그녀를 자신이 운영하던 "플라톤 아카데미"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녀가 젊은 나이에 이 아카데미에서 "철학ㆍ수학"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자, "신플라톤주의"는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차 "난해한 이론체계"를 앞세우며, "신비주의"로 치우쳐 가고 있던 기존의 철학 경향을 배격하고 "논리ㆍ이성"에 의한 이해를 강조했다.  그녀는 대중 앞에서 강의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녀의 강의는 이해하기가 매우 쉬웠으며, 그녀의 명성은 곧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전 "로마"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그녀의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서, 다른 도시로부터 "철학자 지망생"들이 몰려들어, 아카데미는 항상 수많은 청중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쉬우면서도 심오한 강의뿐 아니라,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갖추고 있는 갖가지 미덕들은 그녀를 그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만들었다.

그녀와 같은 시대, "콘스탄티노플"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역사학자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히파티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으니, 그녀는 철학자 테온의 딸이다.  문학과 과학 분야에서 남긴 그녀의 업적은 이 시대의 모든 철학자들을 능가한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가르침을 계승한 그녀는 청중들 앞에서 철학의 원리를 강의하곤 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그녀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먼 곳에서부터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마음의 수양을 통해 길러진 침착함과 이해하기 쉬운 강의법을 갖추고 있는 그녀는 고위 관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하는데 남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해도 전혀 꺼리지 않는다. 

남자들은 그녀의 위엄과 미덕에 압도되어 그녀를 더욱 숭배하게 되곤 한다.  그녀는 올림포스의 신을 섬기는 다신교 신도였지만,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선발하면서 그들의 종교를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제자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먼 후일 키레나이카(현재의 리비아)의 수도인 프톨레마이스의 대주교에 임명되는 저명한 신학자 시네시우스(Synesius)도 그녀의 직계 제자였다.  그는 그리스 출신으로 젊은 시절 히파티아에게 배우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아카데미로 유학을 왔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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