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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베니토 무솔리니 (1883~1945ㆍ62세)ㆍ파시즘

by 당대 제일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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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ㆍ1883~1945.04.28ㆍ향년 62세)"는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 정치인ㆍ"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ㆍ이탈리아 제국 원수로,  1936년 이후, "무솔리니"의 공식 칭호는 "정부 수반이자, 파시즘의 두체이며, 제국의 설립자이신 불세출의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두체 (Duce): 그는 1925년부터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이 칭호를 사용)  "무솔리니"는 "국가주의ㆍ협동조합주의ㆍ생디칼리즘ㆍ팽창주의ㆍ사회진화론ㆍ반공주의"와 같은 다양한 정치이념들을 조합하여, "이탈리아 파시즘"을 만들었다. 

1.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ㆍ1883~1945.04.28ㆍ향년 62세)

이탈리아 총리 (27대ㆍ1922~1943)ㆍ이탈리아 외무부 장관이탈리아 왕국 두체(11921~1943)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두체(11943~ 1945.04.25)명 언 : 사회주의 이론은 죽었다. 남은 것은 원한뿐이다.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를 막기 위한, 검열의 필요성을 선전하였다.

출 생 : 이탈리아 왕국 프레다피오 (포를리 인근의 작은 마을)            사 망 : 이탈리아 왕국 귀리노             사 인 : 총살 ("공산주의 파르티잔"에게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 (Clara Petacci1912~1945.04.2833세ㆍ29세 나이차)와 함께)             정 당 : 이탈리아 사회당(1901~1914)파시스트 혁명 행동(1914~1921) → 국가 파시스트당(1921~1943)→ 공화 파시스트당(1943~1945)

 가 족 : 부- 알렉산드로 무솔리니ㆍ모- 로사 무솔리니             동생- 아놀도 무솔리니(1885~1931)             : - 클라라 페타치 (1912~ 1945.04.28ㆍ향년 33세)             본처 - 라첼레 무솔리니 (라첼레 귀디) 1915년 결혼내연 - 이다 달세르 (트렌토 인근의 소프라몬테 출신) 아들 1후처 - 도너 리첼 무솔리니 (또는 리첼 가우디 무솔리니1890~1979)  / 아들- 로마노 무솔리니 (화가ㆍ피아니스트ㆍ예술인ㆍ1927~2006)  /  손녀 - 알레산드라 무솔리니 (모델우익 정치인1962~ )  /  이모- 소피아 로렌 (이탈리아의 영화배우ㆍ1934~ )

※ "연좌제도"에 의해 정계 진출이 제한된 "독일의 히틀러 일가ㆍ호엔촐레른 왕가"와 달리 "무솔리니"의 후손들은 연좌제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경 력 : 제1차 세계대전ㆍ제2차 세계대전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알바니아 침공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정 당 : 이탈리아 사회당(1901~1914)파시스트 혁명 행동(1914~1921)→ 국가 파시스트당(1921~1943)→ 공화 파시스트당(1943~1945)

초기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1933년 "나치 독일"이 "엥겔베르트 돌푸스(무솔리니의 우군ㆍ오스트리아 파시즘 지도자)"을 암살하자, "히틀러"와 사이는 매우 악화되었다. 1938년, "히틀러"와 각별한 사이가 된 "무솔리니"는 "나치"를 뒤쫓아, 인종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무솔리니"는 스스로 "제국 제일 원수계급"을 제정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이 칭호를 사용하여, "이탈리아 군의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후 도주하여, 망명 정부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고, 그 수반이 되었다. 1924~1939년까지 그는 "폰티네 습지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문제"라 불리던 "로마와 바티칸 시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였다.이와 같은 업적으로 "무솔리니"는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35년,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이탈리아 조약"을 채결하는 등, "프랑스"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1940년에 들어, 외교적 위치를 바꾸어, "추축국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뒤 도주하여, "망명 정부"를 세웠으나, 1945년 "공산주의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으며, 특히 "축구"를 좋아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를 이용하여, "파시즘"을 홍보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1934년 FIFA 월드컵"이 변질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공연을 보러 온 "무솔리니"가 "토스카니니"에게 "파시스트 찬가를 작곡할 것"을 부탁하자, "토스카니니"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결국 "무솔리니"가 고집을 굽혔다 한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1867~1957ㆍ20세기 최고의 클래식 음악지휘자ㆍ첼리스트ㆍ작곡가)

2. 무솔리니 처형 ("공산주의 파르티잔"에게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1945.04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는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Clara Petacci1912~1945.04.2833세ㆍ29세 나이차)"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는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04.27일, "공산주의" 계열의 "파르티잔인 제52 가리발디 여단 정치부 소속 우르바노 라차노"는 "코모 호 인근의 마을 동고"에서 "무솔리니ㆍ페타치"를 체포하였다. 체포 당시, "무솔리니"는 "독일군"으로 위장한 병사들과 함께, "독일 장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무솔리니ㆍ페타치"는 "메체그라"로 연행되어, "데 마리아 가족"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튿날 "파르티잔"은 "무솔리니"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무솔리니ㆍ페타치"를 총살하였다. 

처형 기록에는, "무솔리니 총살"을 지휘한 사람이 "발레리오 대령"이라 되어있다. "발레리오 대령"의 실명은 "왈테르 아우디시오"이었으며, "무솔리니"를 처형한 후, 이 사실을 "전국 민주 평의회"에 통지하였다. 처형 당일,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가 구금되어 있는 집으로 가서, "나는 당신을 구하러 왔다.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나?"라고 말하며, "무솔리니"를 안심시킨 뒤, 차에 태워 마을 교외로 데리고 나갔다.

"아우디시오"는 으슥한 곳에서 "무솔리니"에게 "내려"라고 명령했다. "무솔리니ㆍ페타치"는 서로를 끌어안고, 공터에 서있었다. "아우디시오"는 먼저 "페타치"를 쏘았다. "페타치"가 쓰러지자, "무솔리니"는 재킷을 열고, "가슴에 쏴라"고 말했으며,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의 가슴을 관통시켰다. "무솔리니"는 쓰러졌으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아우디시오"는 다가가, 가슴에 다시 1발을 쏘았다. "무솔리니"는 몹시 고통스러워하였다. "아우디시오"는 그의 운전병에게 "저 작자 좀 봐, 이제야 얼굴에 감정이란 게 나타나는 군."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와 함께 있었던 병사들도 그날 밤 총살되었다.

1945.04.29일, "무솔리니ㆍ페타치ㆍ함께 처형된 파시스트들의 시체"는 트럭에 실려, "밀라노"로 보내졌다. 새벽 3시, 그들의 시체가 "일라노의 피아자 로레토"에 내려졌다. 그곳은 일전에 "파시스트 당"에 의해, 15명의 "반 파쇼운동가"가 처형된 곳이었다. 수많은 군중에 의해 차이고, 짓밟힌 그들의 시체는 "주유소 지붕"에 거꾸로 매달렸다. 다만 "페타치"는 이 때,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거꾸로 매달았을 때, "팬티"를 노출했다. 이에 어떤 사람이 "페타치"의 "치마"를 묶어서, "팬티"가 드러나지 않게 했다.

같은 날, 한때 "무솔리니가 신이다."라는 발언을 한 "파시스트 왕당파 아실레 스타라체" 역시 붙잡혀 처형된 뒤, "무솔리니"가 매달린 "피아자 로레토"로 실려 왔으며, "파르티잔들"은 곳곳에 숨거나, 저항하던 "파시스트들"을 붙잡아 처형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를 여기에 매달아 두었다.

3.  업 적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집권했다. 집권기간 동안 공을 많이 들여, "로마" 시내의 여러 유적을 대규모로 발굴했다. 현대 로마 시내에 남은 여러 유적은 대부분 "무솔리니 정권" 시절에 발굴된 것이다. 하지만 "로마 유적"을 발굴하려면, 그 위에 자리 잡았던 여러 건물을 일단 철거해야 했는데 그는 독재자답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마찰을 무시하고 오로지 유적 발굴에만 집중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건립된 다른 가치 있는 여러 건물도 많이 철거했다. 그러면서도 "포룸 로마노" 등의 로마 유적 사이에 길을 뚫어놓고는 "황제의 거리(Via dei Fori Imperiali)"라는 이름을 붙였다.

토목ㆍ건축으로, 로마ㆍ이탈리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뒤바꿔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뚫어둔 "화해의 길ㆍ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광장ㆍ이탈리아 최초의 고속도로" 등 이 모든 걸 그가 만들었다. "로마" 관광의 중심가에 가면 "무솔리니가 만든~"이란 말을 빼놓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다. 또한 도시계획에도 관심을 가졌는지 현대 로마에서 "EUR (에우르)"라는 신도시 구역을 계획해 만들고 이곳에 "로마문명 박물관"과 함께 "파시즘"을 상징하는 "노동 문명궁"을 만들었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이탈리아의 혼란이 해결되고, 경제도 발전했다는 점도 있다.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해 "바티칸 시국"과의 오랜 문제를 해결했고, 집권 기간, "마피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기도 했다. 특히 "마피아"의 본진인 "시칠리아"를 북부 정권에 반항하는 남부 사람들의 기질을 제압하고자 더욱 공들여 탄압했다. 전쟁 후에도 한동안 "시칠리아"에 파견되는 사법 공무원들은 무솔리니 시절의 후광을 입기 위해 당시 "시칠리아"에서 근무한 공무원들의 자손들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또한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낙후된 "남 이탈리아"에서 "말라리아"를 몰아낸 것 역시 그의 치세이다.

경제 정책은 강력한 보호무역과 국책사업 투자를 통한 "자급자족" 지향이었다. 때문에 침략전쟁을 하지 않으면 망하는 수준이었던 "나치 독일ㆍ일본" 같은 다른 주축국과는 사정이 달랐다. 그러나 "이탈리아" 역시 오래 유지되긴 힘든 경제이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축구 강국이 된 것도 그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1898년에 시작한 "세리에 A"가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리그로 전환된 것은 그의 공로이며,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의 성공적 개최도 그의 공로가 크다. 

"무솔리니" 집권 전후의 이탈리아의 혼란 상황ㆍ경제 업적ㆍ탁월한 개인숭배화 능력ㆍ우민화 정책을 생각하면, "2차 대전"에 참전하지만 않았어도 "종신 독재"를 했을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실제로 20년 넘게 장기 집권했고, 전후에도 "파시스트" 잔당들은 꽤나 잔존했다.

4. 생 애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신의 비천한 출생을 내세우며 "인민의 아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국방경비대 중위"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대장간일 틈틈이 사회주의계 언론에 참여하기도 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므로, 그의 주장만큼 비천한 배경은 아니었다. 가족들은 낡은 "팔라초 2층"에 마련된 비좁은 방 2칸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선술집 논쟁으로 소일했던 아버지는 그나마의 수입을 첩에게 탕진하기가 일쑤였으므로 가족의 끼니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반항적이고 다루기 힘들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난폭했고 집에 들어와서는 변덕스러웠다. 교사들은 이러한 학생을 감당하지 못하여 "파엔차"에 있는 엄격한 "살레지오회 수도원 학교"에 보냈으나, 동료학생을 주머니칼로 찌르고 체벌을 가하려던 수사에게 덤벼드는 등 말썽은 계속되었다. "포를림포폴리"의 "조수에카르두치 학교"에 편입한 그는 다시 동급생을 공격함으로써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명석했던 그는 어려움 없이 졸업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고, 교사자격증을 취득, 얼마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내 교사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강인한 턱과 꿰뚫어보는 듯한 검은 눈을 가진 작고 창백한 19세의 그는 "마르크스"가 새겨진 니켈 메달만을 간직한 채, "이탈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갔다.

청년 무솔리니는 이후 몇 달 동안 이일 저일을 전전하면서 간신히 연명해갔다. 이 무렵 그의 기묘한 매력과 특출한 말재주는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일관성 있는 자신의 사상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칸트ㆍ스피노자ㆍ크로포트킨ㆍ니체ㆍ헤겔ㆍ카우츠키ㆍ소렐"에 심취했던 그는 비범한 인성과 당당한 풍모를 지닌 미래의 혁명가로서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저널리스트이자 대중연설가로서 명성을 쌓은 그는 노동조합의 선전운동에 관여해 파업을 주동하고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의 사용을 옹호했으며, 거듭 복수의 날이 다가올 것임을 역설했다.

1904년 로마의 일간지들은 그의 귀국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귀국 후 얼마동안 무솔리니의 동정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 후, "우디네" 북쪽 "베네치아알프스" 지역에서 다시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나, 그것은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이 "도덕적인 타락의 연속"이었다. 쓸모없는 허송세월에 염증을 느끼고, 노동조합운동ㆍ저널리즘ㆍ급진주의 정치노선으로 다시 복귀했으며, 체포ㆍ투옥의 나날이 이어졌다. 

1909년, 자유의 몸이 된 그는 16세의 "라첼레 구이디"와 사랑에 빠졌고 "포를리"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얼마 후 그들은 결혼했는데, "라첼레"는 아버지의 정부의 2째 딸이었다. 결혼 직후, 그는 통산 5번째의 구금생활을 맞이하지만, 그 무렵 가장 촉망되는 동시에 가장 위험스러운 청년 사회주의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회주의 일간지의 논객이었던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계급투쟁(La Lotta di Classe)"지를 창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1912년 사회당 기관지 "전진(Avanti)"의 편집장으로 위촉되었다.

그는 "전진(Avanti)"의 발행부수를 2배 이상 끌어올리면서, "반군국주의ㆍ반제국주의" 논조를 통해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곧이어 심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의 혼란이 사회혁명을 촉발시킬 여건을 조성해주기도 한다는 "마르크스"의 언명에 마음이 흔들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전주의자를 자처했던 태도를 바꾸어, 대뜸 전쟁개입을 옹호하는 논설과 연설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패배할 경우, 유럽의 자유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변명의 요지였다. "전진(Avanti)"의 편집장직을 사퇴했고, "사회당"은 그의 당적을 박탈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한 출판업자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인민"지의 편집을 담당하게 된 그는 이제 분명하고 뚜렷한 어조로 새로운 철학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후 이탈리아 민족은 단지 이탈리아 민족일 뿐이다. 철과 철이 만나고 우리의 가슴 속에서는 한 가지 외침이 터져 나온다. 이탈리아 만세!" 파시즘의 탄생을 알리는 첫닭이 울고, 그는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① 권력쟁취

"베르살리에리 (Bersaglieri:저격대)"에 복무하던 중, 부상을 입은 그는 확고한 반사회주의자이자, 운명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1918.02월, 구체제의 악폐들을 완전히 청산해낼 수 있는 단호하고 정력적인 독재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3개월 후 "볼로냐"의 대중 집회에서 자신이 그러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이듬해 "밀라노"에서는 그의 야심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조직의 핵심부가 편성되었다.

"피아차산세폴크로"의 조직사무실에는 "공화주의자ㆍ무정부주의자ㆍ생디칼리스트ㆍ사회주의혁명가ㆍ퇴역군인"을 망라한 200여 명의 인사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구축을 위해 몰려들었고, 그는 고대 로마의 "릭토르(권력의 상징인 파시네(fascinae)를 들고, 집정관의 앞길을 비키게 함)"와 같은 결속력으로 뭉친 전위대라는 의미에서 이 세력을 "전투 파쇼(Fasci di Combattimento)"라고 이름 붙였다.

대중 집회에서 그는 "로마냐 무정부주의자들"의 검은 셔츠를 일색으로 차려입은 수많은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검은 셔츠단). 당당한 그의 체격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으며, 스타카토로 반복되는 웅변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태도는 연극조로 과장되어 있었고, 생각은 모순투성이였으며, 인용은 정확하지 못했고, 악의에 찬 공격들은 방향이 어긋나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에도 그가 구사하는 단어들에는 생동감이 넘쳐흘렀고, 은유들은 감탄스러울 만큼 적절한 것이었으며, 반복되는 열정적인 제스처는 집회장을 메운 군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922년 여름, 드디어 야망을 충족시켜줄 호기가 찾아들었다.

이탈리아 국민 전체가 우려하고 있었던 "사회당"의 총파업이 개시된 것이다. 그는 정부당국이 파업을 저지하지 않을 경우, "파시스트"가 직접 총파업의 분쇄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나폴리"에 모인 동조자들 앞에서 "우리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로마로 진군해 직접 정권을 인수받을 것이다"라고 공표했고, 격앙된 군중들은 일제히 "로마! 로마!"를 외치며, 그의 열변에 호응을 보냈다. 청중들은 당장 로마로 행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늦게 그는 "파시스트" 간부들과 회동, 4일 내에 행동대를 "로마"에 입성시켜, "콰드룸비리(Quadrumviri :4개 정당의 지도자 단체)"의 병력에 합류시킬 것을 결정했다.

타협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국왕이 서면 소환장을 발하기 전에는 왕국으로 나아갈 생각도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파시스트" 동조자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로마"로의 대규모 행군을 시작했다. "로마 진군"은 선전기관에서 보도한 것만큼 질서정연하지는 않았지만, 내각을 총사퇴로 이끌기 위한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조각위촉전문"을 띄워 보냈다.

② 독재

최연소 이탈리아 총리(1922.10.31)로서 그가 가졌던 자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놀랍고도 갑작스러운 성공 이면에는 정치ㆍ경제 제반여건의 혜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자신의 인성이나 타고난 재능ㆍ날카로운 상황판단과 선동가로서의 탁월한 자질 또한 그의 성공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파시즘"의 지도자를 떠나, 이탈리아 "전인민의 수장"으로 부각되기를 원했던 그는 광범위한 "비 파시스트"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했고, 중앙집권의 의사 또한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한해동안 그는 완전한 독재권력을 창출해냈고, "파시스트" 당원들이 의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선거법(Legge Acerbo)"을 통과시켰다. 1924년, 의심할 여지없는 선거부정이 자행되는 가운데, "무솔리니의 1인 독재체제"는 확고한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의 권위주의 통치방식은 이탈리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끊임없는 파업과 소요 속에서 시달려온 국민들은 "파시즘"의 현란한 선전기술과 중세풍의 의장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경제가 안정궤도에 오르고, 조국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독재정치에 복종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솔리니"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다줄 인물로 인식되었다. 기대한 바와 같이 질서가 회복되고, 근로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공공사업계획들이 착수되기 시작하자, "일 두체(Il Duce)"는 전인민의 신뢰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유럽ㆍ미국의 언론들은 무솔리니를 천재ㆍ초인으로 격찬했다. 짧은 시간에 그가 이룩해놓은 업적들은 마치 기적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분열과 혼란에 휩싸인 조국을 변혁시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산업가와 지주들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은 채, 일련의 사회개혁과 공공사업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1929.02월, 그는 "교황청"과 "라테란 조약"을 체결, 60년에 걸친 교회와 정부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권력의 오만ㆍ진정한 국가이익에 대한 몰이해ㆍ제국에 대한 환상과 같은 것들이 팽창주의적 야심으로 이어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외정복의 야심은 먼저 "아비시니아 고원"으로 눈길을 돌렸고, 10개월간에 걸친 준비와 풍설ㆍ위협 그리고 망설임 끝에 1935.10월 "에티오피아 침공"이 감행되었다. 유럽 제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이미 일이 진행되어버린 이상, 사태를 뒤집어놓을 다른 방책이란 있을 수 없었다. UN은 제재조치의 하나로 금수품목록을 작성했지만, 유럽 전쟁을 유발시킬지도 모를 석유 등의 주요자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언젠가 무솔리니는 "만약 연맹이 이탈리아의 석유수입에 제재를 가했더라면 파시스트 군대는 아마도 1주일 내에 아비시니아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라고 실토한 바 있었다. 곤혹스런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고, 1936.05.09일 밤, "두체"는 "피아차베네치아" 광장에 운집한 40만의 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환희에 찬 성명을 발표했다.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 지 14년이 되는 오늘 마침내 위대한 새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이탈리아는 제국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독일의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아프리카 원정을 적극 고무했고, "이탈리아"는 새로운 동맹세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ㆍ베를린"을 축으로 "강철동맹"이 체결되고, "히틀러ㆍ무솔리니"의 잔인한 동반관계는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갔다.(추축국)

③ 제2차 세계대전

조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평화유지가 절실히 요구되므로, 맹목적으로 독일과 보조를 같이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제휴가 손쉽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며, 중립을 지킬 경우 이미 확보하고 있는 기득권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사위로 외무장관이었던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팔라초베네치아"에서의 결말이 나지 않는 오랜 토론과정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 전쟁가입을 반대했던 무솔리니는 명예가 대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는 종잡을 수 없는 뒷말을 내뱉었다. 총리는 승승장구하는 "히틀러"의 군대를 침통함과 놀라움 속에서 지켜보았고, 새로운 승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전의를 굳혀갔으나, "독일군"이 고삐를 좀 늦추거나 불의의 반격에라도 직면해 어느 정도 숨 쉴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을 격파하고, "프랑스"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임에 따라 총리는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1940.06.10일, "이탈리아"는 대연합국 선전포고를 발령했고 이것은 큰 실수로 판명된다. 전쟁은 처음부터 "이탈리아"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군"이 최소한의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굴복하고 말았고, "히틀러"와 회동한 그는 "치아노 백작"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의견개진이 상담 정도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몹시 침울해졌다. 그는 "추축국 동맹"의 2류 지도자에 불과한 자신의 위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히틀러"와 마주할 때마다, "이탈리아 군"의 무력한 패배는 그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고 한마디 대꾸도 못한 채, 과거의 승리와 미래의 계획에 관한 "나치 총통"의 장황한 연설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더욱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기밀의 누설을 경계한 "히틀러"가 구체적인 계획들에 대한 언급을 전혀 회피한 채, 기정사실만을 거론했던 점이었다. "독일군"이 "루마니아ㆍ소련"에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을 때, 그는 아무런 사전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 군대가 한마디 통고도 없이 "알바니아"를 거쳐, "그리스"를 침공한 것은 "히틀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려는 무솔리니의 무모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공세는 치욕적인 참패로 끝을 맺었고, 독일군은 마지못해 수렁에 빠진 무솔리니를 구출해야 했다.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무솔리니를 위해 병력손실을 감당해야 했고, 이제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붕괴 가능성에 대비해 사전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1943.0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했다. 이탈리아 내 제반 정치세력들은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었다. 07.24일 개전 이후, 소집되지 않고 있던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개최되었고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무솔리니의 총리직을 박탈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투표결과에 개의치 않고, 지지자들의 항명사태를 믿으려 하지 않았던 그는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무실에 모습을 나타냈으나, 그날 오후 국왕을 접견하고, "빌라 사보이아"를 나서려는 순간 출동한 "왕실근위대"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포차 섬"에 이어, "사르데냐 해역"의 외딴 도서로, 그리고 종국에는 "아브루치 산맥 그란사소디탈리아"의 한 호텔로 유폐되었지만, 산기슭에 글라이더를 띄워 보낸 "독일 특공대"의 도움을 받아 "뮌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독일에게 "이탈리아" 전 지역의 점령ㆍ통치를 용인하는 대신,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 "치아노"를 비롯한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살로"에 세워진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은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의 배후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에 불과했고, 각료 한 사람이 회고했듯이, 총리는 다가올 종말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환상을 꿈꾸며 역사와 자신의 역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연합군의 북진이 가속화하자, "파르티잔" 지도자들은 "무솔리니"의 처단을 결의했다. 그는 장남(2째 아들은 전사)을 비롯한 여러 측근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산악지대에서 최후의 유격전을 펼치기 위해, "바텔리나"로 향했지만, 총리의 추종세력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군 사병"으로 변장,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트럭 행렬에 몸을 숨긴 그는 국경 부근에서 "파르티잔"에게 발각되어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하기를 고집했던 정부 "클라레타 페타치"와 함께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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