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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히틀러 ② 히틀러의 생존설ㆍ평가ㆍ비판ㆍ생애

by 당대 제일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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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4.29일,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ㆍ1889~1945)"는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였다. 1945.04.29일 PM 11:30분, 이미 "나치군"은 모두 붕괴되고, "소련군 전차군단"이 "베를린"을 포위하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나치 독일)"의 10Km 지점까지 들이닥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통보받자, 직속인 최후의 "친위대(500명)"에게 "대전차 포"로 본영 밖을 지키도록 지시하고, "에바 브라운"에게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하 식당"에서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철십자 깃발ㆍ화톳불ㆍ얼음덩어리"를 향해, 검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히틀러- 56세ㆍ에바- 32세)

 

1. 히틀러의 생존설

 생존 설- 1 : 마르델플라타 (아르헨티나)

지금까지도 "히틀러"가 "당시 자살하지 않고 생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의하면, "히틀러는 피신하여,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생존했다"는 것이다. 주장의 내용은, "히틀러의 시체를 조사한 소비에트 연방 측에선, 히틀러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히틀러의 측근들은 성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사인이 일치하지 않는다.  자신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모든 장교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한 뒤, 그의 시체를 본 독일 장교들은 히틀러와 비슷한 몸매에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있었고, 이를 히틀러라 생각하며 불에 태웠다는 점을 보아 자살한 것은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역이었다."

"제라드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히틀러 부하의 증언"을 토대로 한 주장에 의하면, "히틀러는 벙커에서 자살을 위장하기 위해, 대역을 살해하고,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아르헨티나의 마르델플라타로 도주에 성공하였으며, 그 길로 안데스 산맥 기슭에 숨어들어간 뒤, 1962.02.13일까지 천수를 모두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히틀러를 직접 아르헨티나까지 데려다 준 비행기 조종사의 증언까지 확보한 상태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제라드 윌리엄스"는 덧붙여 주장하기를 "히틀러의 시체라고 발견된 유골은 히틀러가 아니라 히틀러와 체격이 비슷한 40살 이하의 러시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히틀러가 1945년에 사망한 사실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히틀러 부부"는 "나치독일" 시절, "유태인에게 약탈한 금과 보석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생존 설- 2 : 바릴로체 (아르헨티나)

"히틀러"가 "바릴로체(아르헨티나)"에 숨어살며, 70세까지 살다가 늙어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아벨 바스띠"라는 "끌라린 기자"이다. 그는 "빠따고니아"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몇 년에 걸친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3권의 책을 펴냈다.  "아벨 바스띠"의 노력에 의해, 오늘날 "바릴로체(아르헨티나)"에서는 히틀러가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저택이 관광지로 둔갑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돈을 뿌리고 간다는 것이다. "아벨 바스띠"는 아주 진지한데, "히틀러의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 러시아에 있는 그의 유골에 DNA 유전자 검사를 실시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유전자 검사"를 거부하고 있다.

"아벨 바스띠"는 지금도 "아르헨티나" 해안 깊숙이 침몰해 있다고 추정되는 "히틀러"가 타고 온 "독일잠수함"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히틀러"의 탈출은 잠수함이 동원됐고, 대다수 고위 나치관료들도 함께 도망간 것이라 그 같은 움직임을 연합군들 모르게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연합군, 더 정확히 말해, "미국ㆍ영국은 히틀러의 탈출을 눈감아 주었다"는 주장이다.

  "연합군"은 눈감아 주었을까?

당시 "독일나치"는 이미 무너졌고, "미국ㆍ영국"의 새로운 적은 이젠 독일나치가 아닌 "러시아의 공산주의"였다.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사상"이 세계로 퍼지는 것은 "자본국가"인 "미국ㆍ영국"에겐 정말 위험한 사상이었다. 이에 대항하고 견제해야 할 세력이 필요했으니, 그건 "독일 나치"였다. 그래서 "미국ㆍ영국"은 "독일 나치"의 완전한 몰락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독일나치 주의"는 정부가 경제를 주도한다는 이념은 다소 다르나, "개인재산"을 인정해주는 것은 "자본주의사상"과 더 닮았기 때문에, 오히려 "공산주의 사상"보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사상"을 더 선호했다. 그래서 "미국ㆍ영국"의 우익세력들은 "히틀러의 탈출"을 도운 것은 아니지만, 그의 탈출을 눈감아 줬다.

"독일잠수함"을 통해, 많은 "나치당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로 탈출하도록 가만히 놔두었다. 게다가 "베를린"에 먼저 도착하게 될 "러시아군"에게 "나치제국"의 막대한 재산이 넘어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불에 탄 시체가 "히틀러가 아니다"는 것을 알아 차렸지만, 전쟁을 하루속히 종결짓고 싶었기에 역시 눈감아 줬다. 또한 "소련군이 히틀러를 놓쳤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어찌됐던 하루속히 전쟁을 종결시켜 덮어 버리는 게, 훨씬 덜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런데 "미국ㆍ영국ㆍ러시아" 등의 연합군이 이미 패망한 "독일나치"에게 빼앗기 위해 덤벼든 것은 결코 이젠 힘이 없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히틀러"나 그의 시체가 아니었다. "연합국"들이 자국의 이득을 위해 노린 것은, 사실 "히틀러"가 아니라, "독일 나치" 밑에서 일해온 실력 있는 "과학자ㆍ기술자"였다. 

실제 이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오늘날 "NASA 우주항공"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러시아 우주개발" 역시 똑같다. 오늘날 "아르헨티나 항공ㆍ원자력 기술"이 발달한 것도 사실은 "독일ㆍ이탈리아"의 과학 기술자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아르헨티나"도 "미국ㆍ러시아ㆍ프랑스ㆍ영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우주 로켓개발"이 발달된 적이 있었다. "달나라"까지는 아니었어도, "우주 대기권"까지 원숭이를 태운 "우주 로켓"을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던 기록도 남아있다.

  "히틀러"는 "아르헨티나"를 선택했나?

"독일나치"는 "세계지배는 곧 시간문제"라고 생각할 때부터, 이미 "아르헨티나"를 넘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해, "빠따고니아ㆍ바릴로체"를 출발점으로, "아메리카에 독일 나치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이었다. 그 같은 야망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인구가 부족했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동안 꾸준히 유럽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때 "독일인들"도 대거 몰려와, 이미 탄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아버지가 "코르도바(Cordoba)"에서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독일 나치의 위험성"을 국회에 여러 번 거론한 기록도 남아 있다. 더 나아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도밍고 페론"은 장교시절 "독일 유학"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독일의 국가사회주의(socionacionalismo)"에 매료돼 있었다. 게다가 "페론 대통령"은 "독일 나치제국"이 멸망할 때 쯤, 가짜여권을 비밀리 발급해, "독일 나치당원들"이 "아르헨티나"로 피신 오도록 도왔다.  "아르헨티나"는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유지하며, 유럽에 식량을 팔아, 자국의 이득만을 취했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 마지못해 형식상 "연합국"을 지지했을 뿐이다.

실지로 "페론 정권"이 실각한 1955년, "아르헨티나"에서 불안을 느낀 많은 "독일인들"이 "칠레ㆍ파라과이"로 재 이민을 가기도 했다. "독일 나치"가 기울기 시작하자, 독일은 아르헨티나를 "아메리카의 나치제국 수립"이라는 최초 계획을 "탈출 장소"로 수정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잠수함을 타고, "빠따고니아ㆍ세라티 데 로스 로브스(리오 네그로 주)"라는 장소에 1945.07~ 08월 사이에 도착했고, "에바 브라운(히틀러 부인)ㆍ나치 고위관료들"도 함께 도착했으며, 물론 빼돌린 "막대한 재산ㆍ예술품ㆍ비밀 서류" 등도 함께 갖고 갔다. 이미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었던 독일 교민들은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했는데, 이는 "히틀러"를 위한 많은 독일단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부에노스아이레스ㆍ꼬르도바ㆍ멘도사ㆍ라 리오하 주"에서도 모습을 나타냈으며, "스트로에스네르(파라과이 독재자) 정부"의 관료들과도 접촉이 있었다. 물론 "히틀러"는 변장하고 다녔고, "가명"을 사용했으며, 비밀리 이동했다. 그러나 "히틀러를 목격했다"는 증인들과 "아벨 바스띠"가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바릴로체(아르헨티나)"부터 시작되는 "히틀러의 독일나치 제국"의 재건은 없었고, 단지 "70세까지 노후를 조용히 살다가 죽은 것"뿐이었다. 평소 "히틀러ㆍ독일 나치"라면, 지옥의 악마보다도 더 싫어하는 "아르헨티나 인"들은 "아벨 바스띠"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유태인들이 빠따고니아(아르헨티나)를 장악하기 위한 또 다른 음모"라고 경계하며, 유태인들이야말로 "오늘날의 나치"라고 말한다.

2. 평가ㆍ비판

"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독일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경제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나, 그가 내놓은 "실업 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지도자들"이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단지 그 "계획안을 일부 수정하여,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획만 수립되어 있던 것을 직접 실행한 것도 "히틀러"였다.  "라이너 자이틀만(독일의 정치 연구가)"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히틀러가 이루어낸 정치ㆍ경제적 발달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 외에도 "히틀러가 최악의 독재자나 전쟁광이었다."는 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경우, "히틀러"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을 학살한 "스탈린/마오쩌둥", 광신적인 종교인이었던 "장 칼뱅/크롬웰"ㆍ아프리카의 "이디 아민"ㆍ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등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서구 중심 주의적이며, 중립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실제 "트라우들 융에(히틀러 여비서)"의 회고에 따르면, "매우 자상하고 친절했으며, 죽기 전 모든 비서들과 요리사 등 총통관저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수고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로후스 미슈(SS중사ㆍ히틀러 통신병으로 2013년 사망)"는 죽기 전, "독일 슈피겔 사"와의 인터뷰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친절했던 최고의 상사"라고 답했다.

게다가 과거 자기 어머니를 치료한 바 있는, "유대인 의사 에드워드 블로흐"에겐 손수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으며, 이후 "블로흐"가 가족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고, "총통 관저"에서 일하던 "요리사 만치를르아니"가 "유대인 혈통"이란 것이 밝혀져 해고당했으나, 나중에 여러 핑계를 대며 다시 데려오기도 했다. 또한 "히틀러"에게 훈장을 받도록 추천했던 "유대인 장교인 휴고 구트만"이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자 풀어주는 등 의외의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구의 수도 (게르마니아)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 계획은 도중 중단되었으나, 굉장히 치밀하고 크게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그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전 세계를 정복하면 "전 세계의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를 계획하였고,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를 고용하여, 1938년에 인구 1억 명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게르마니아"를 조성하기 위해, "슈페어"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 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고, 18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돔의 "국민 대회당(Grosse Halle)"을 세웠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공사가 중단됨은 물론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3. 생 애

188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를 흐르는 "인(Inn) 강변"의 오스트리아 쪽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6남매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돌프는 어릴 적에 "아디"라 불렸으며, "볼프"라는 별명도 있었다.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는 "클라라(히틀러의 생모)"와 결혼하기 전, 이미 장남(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에 낳은 "클라라"의 아들 2명과 딸 1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 일에 열중한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 될까봐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ㆍ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가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만하지 못하고 우울한 학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수학과 스페인어를 제외하고는 성적은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였지만,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특히 진학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히틀러 평전"에 따르면, 자아가 강하고, 상급학교 진학 이후의 학업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저서 "나의 투쟁"에서 나오는 유대인이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소년 시절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까지 오른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 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아돌프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저서 "나의 투쟁"에서 자신이 "반유대주의ㆍ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주위에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 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01월, 아버지가 사망하는데, 당시 15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자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밑돌았다.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 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옆에서 누워 자던 아돌프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때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이후 죽을 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빈ㆍ뮌헨의 생활

1903년부터 "고아연금자"로 살다가, 어머니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비교적 "고아연금"으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그린 그림과 우표 판매로 수입은 심지어 교사의 초봉보다 많았다고 한다. 1907.09월부터 "빈"에서 살다가, 1913.05월 "뮌헨"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안타깝게도 히틀러의 이 기간 동안의 삶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삶은 자료가 거의 없고, 구술증거가 전부일 뿐이다.

1907년, "빈"으로 여행을 떠나, "빈 예술대학교"에서 112명의 후보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된다. 준비해 간 미술화보집으로 79명의 응모자와 함께 2차 시험을 치르게 된다. 결국 28명만이 최종시험을 합격하게 되는데, 히틀러는 여기에 들지 못한다. 10.24일에 유대인 의사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가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통보한다. 히틀러는 "린쯔"로 다시 가게 된다. 1907.12.21일,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다가 사망했고, 그 후에 점점 더 친척들과 멀어지게 된다. 1908년 가을, 예술학교의 2번째 응모에서 견습기간 없이 정식으로 자격을 얻게 된다. 다음에는 직업과 실습을 하는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점점 재정이 바닥나게 되고, 병역징집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1909.07월, 룸메이트인 "아우구스트 쿠비첵"과 헤어진 후, 숙소를 여러 번 바꾸게 된다. 다음에 얻은 방은 시내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서 그는 겨우 3주 동안만 방을 얻게 되는데, 그 후의 3개월 동안은 거취가 불분명하다.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볼 때, 히틀러가 그 당시 거주자 신고를 안 한 것이 노숙자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10년 초, "멜데만가"에 있는 남자들 기숙사로 옮긴다.

 청년 시절 - 미술학교 입학 거부ㆍ실직자 생활

19세 되던 해인 1907.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2번 지원했지만, 2번 모두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 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 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 되고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의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그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그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반유대주의 사상"은 기독교 문화가 아닌, "진화론"에 기반하여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나치ㆍ독일인들은 진짜 기독교가 아닌 이단을 믿고 있었다. 한편, 그는 "란츠 폰 리벤펠스(정치평론가)ㆍ정치가인 카를 뤼거ㆍ비엔ㆍ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 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이런 "빈"의 분위기로 인해 결국 그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년기에 그는 종종 언론사에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는데, 이때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이었던 "볼프"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한다. 그러나 주변 누구도 그가 "볼프"라는 이름으로 글을 투고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 독일 제국으로

1913년,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 되어,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그를 찾았다.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간 것이다.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지만, 그는 슬라브족과 유태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 군"에서 군복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 "오스트리아"는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제국이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선포되었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그는 즉시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마음의 진정한 조국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상병이었던 히틀러는 1918.10.13일 독가스 공격에 시력을 잃게 되고, 야전병원으로 후송 된 후 시력이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0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정치 데뷔 : 나치당 입당ㆍ지도자 부상

1919.09월, "독일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ㆍDAP)"라는 극우 정당에 당원증 제555번을 받으며 입당했다. 그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독일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02.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000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독일어 약자 NSDAP)"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민주공화제의 타도ㆍ독재정치의 강행ㆍ베르사유조약의 타파ㆍ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ㆍ백화점과 국제 자본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ㆍ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그는 1923.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6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그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재건은 쉽지 않았다.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극좌ㆍ극우 정당들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00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스"는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1932.0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장군)"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사회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01.30일 그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07월 "일당(一黨)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0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ㆍ약칭 총통)"이라 칭하였다.

 나치스의 집권

"전권 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06.30일 밤, "나치 돌격대 지휘관들"을 제거, 이후 일어난 "바르톨로메오의 밤" 권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슐라이허 장군"의 제거를 통해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그 후 "독일국방군"은 "나치 당원"에 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 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ㆍ경제계ㆍ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죽음

1939.09.01일, 그는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이는 "스탈린"이 그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그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영국ㆍ프랑스"는 "폴란드"와의 군사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 이라고 불리였다. "영국ㆍ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 개입을 삼가하고 있었다.

공습ㆍ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ㆍ네덜란드ㆍ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서부유럽ㆍ북부유럽 전체(중립국인 에스파냐ㆍ포르투갈ㆍ스위스ㆍ스웨덴 제외)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왕국ㆍ그리스 왕국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게는 패배하였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브리튼 작전"이 실패했음에도 그 는 1941.06.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 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0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흘 후,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나 1943.07.09일, "허스키 작전 (Operation Huskyㆍ언더월드 작전ㆍ시칠리아 상륙 작전ㆍ미 해군과 마피아의 연합)으로,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1944.06.0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고,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반격에 "스탈린그라드"에서 패하고, "치타델 작전"의 대표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그 후,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ㆍ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ㆍ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ㆍ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4.0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1945.04.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벙커에서 음독자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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