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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히틀러 ③ 뮌헨 폭동ㆍ맥주홀 폭동ㆍ히틀러 폭동

by 당대 제일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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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폭동 (맥주 홀 폭동ㆍ비어 홀 폭동ㆍ히틀러 폭동ㆍ히틀러-루덴도르프 폭동)"은 1923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히틀러"가 일으킨 미수로 끝난 쿠데타이다. 당시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켜, 권력을 잡으려다가, 군부의 반대로 실패했다.

 

1. 뮌헨 폭동 (맥주 홀 폭동ㆍ비어 홀 폭동ㆍ히틀러 폭동ㆍ히틀러-루덴도르프 폭동)

"히틀러"는 "독일" 전체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되겠다"는 계획 아래, 192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일어난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을 본 따, "뮌헨의 비어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의 초고를 집필하고, 9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SA (갈색 셔츠단, Braunhemden): 돌격대ㆍ독일 나치당의 준(準) 군사조직

• 일 시 : 1923.11.08~09일        장 소 : 독일(바이마르 공화국) 뮌헨         결 과 : 폭동 실패 나치당 지도부 체포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체포

• 교 전 : 나치당ㆍ돌격대 - 아돌프 히틀러ㆍ헤르만 괴링ㆍ에른스트 룀ㆍ루돌프 헤스루드비히 막시밀리안 어윈 폰 스퀘부너 리히터에리히 루덴도르프  /  라이히스베어ㆍ바이에른 자유주 - 한스 리터 폰 세이서ㆍ구스타브 리터 폰 카르

• 병 력 : 나치당ㆍ돌격대 - 3,000명 / 라이히스베어ㆍ바이에른 자유주 - 100명       피 해 : 나치 당원 - 19/ 경찰 - 4

2. 재 판

1924.02.26일, "히틀러ㆍ루덴도르프" 등은 "대역죄"로 고소되어, "특별 법정"에 섰고, "히틀러"는 자진하여, "공화국 정부 전복"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나서, "공화정"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카르"를 비판했다. 04.01일, "히틀러- 금고 5년 형ㆍ룀- 1년3개월 실형ㆍ브뤼크너- 1년6개월 실형ㆍ아돌프 휜라인- 6개월간 투옥ㆍ루덴도르프- 무죄 석방"에 처해졌다.

"괴링"은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가, 1925년 독일로 귀국했다. "카를 뵘(오스트리아의 지휘자)"는 폭동을 지지했으며, "하인리히 힘러"도 봉기에 가담했다. "히틀러"가 수감되는 동안,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잠시 "나치당"을 이끌었다.

3. 배 경

"독일 제국 황제"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전된 "비어가르텐(유럽식 맥주 연회장의 효시)"은 "바이에른 비어 가르텐"을 원조로 한다. 즉 모든 자국 내, "회담ㆍ여론의 발론지"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의 경제 파탄ㆍ물가 상승ㆍ사회 불안 등 혼란에 휩싸였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를 제어하지 못했으며, "에리히 폰 루덴도르프"와 같은 영향력 있는 퇴역 군인들은 정치적 흐름을 타고, "자유 군단ㆍ나치당"과 같은 우익 정당ㆍ단체들을 조직하는데, "비어 가르텐"을 활용했다.

이 중 "나치당"은 아직 초기 정당이었지만, 1922년 10,000명의 단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돌격대(SA)"와 같은 소수 "친위 단체들"도 거느리고 있었다. 1923.09.27일, "히틀러"는 "에겐 폰 카일링(바이에른 주 총리)ㆍ한스 리터 폰 세이서(바이에른 주의 경찰 대령)ㆍ구스타브 리터 폰 카르(바이에른 주 지사)ㆍ오토 폰 로소(라이히스베어 국가 방위군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4. 폭 동

1923.11.08.일 밤, "카르(바이에른 주 지사)"는 "뷰르가브로이케라의 맥주홀"에서 "바이에른"의 실력자들을 모아, 대 집회를 열었고, 오후 8:15분에 "카르"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에른스트 룀ㆍ빌헬름 브뤼크너"가 이끄는 "SA"의 단원 600명이 "기관총"으로 "비어홀"을 포위하고, 그의 동료 "헤르만 괴링ㆍ알프레트 로젠베르크ㆍ루돌프 헤스ㆍ에른스트 한스슈탱글ㆍ울리히 그라프ㆍ요한 아이그너ㆍ아돌프 렌크ㆍ막스 아만ㆍ루드비히 막시밀리안 어윈 폰 스퀘부너 리히터ㆍ 빌헬름 아담ㆍ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등 "나치당"의 실력자들에 둘러싸인 "히틀러"가 등장했다.

08:30분 경, 군중을 헤치고, "프록코트"를 입은 "히틀러"가 회장에 등단하여, 천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면서 선언했다. "국민혁명이 시작되었다. 회관은 6명의 사람들도 가득 차 있다.  베를린과 바이에른 정부는 지위를 잃었고, 새 정부가 형성된다.  독일 국방군과 경찰이 이들을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히틀러"는 "루돌프 헤스ㆍ아돌프 렌크ㆍ울리히 그라프"와 함께, 총으로 위협해, 어안이 벙벙해 있는 "카르(바이에른 주 지사)ㆍ세이서(바이에른 주의 경찰 대령)ㆍ로소(라이히스베어 국가 방위군 장군)"을 옆방으로 데리고 가, "쿠데타 계획"을 설명하고, 반란 지원을 요구했다. 결국 "루덴도르프 장군(영향력 있는 퇴역 군인)"의 중재로 "카르ㆍ히틀러"는 협력을 약속했으며, 계획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한편 "괴링"은 "바이에른 실력자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연설을 하지만, 일부는 주방을 통해 탈출했으며, "하인츠 페르네ㆍ요한 아이그너ㆍ스퀘부너 리히터" 등이 "루덴도르프 장군"을 데리러 파견되고, "룀"은 도시의 주요 건물들을 점령하도록 명령했으며, 공범자 "게르하르트 로스바흐"가 보병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선 "국방군"이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았다. "베를린"으로 진격하게 됨으로써, "국방군들"끼리 싸우게 되는 사태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관료들" 역시 일치해서, "카르(바이에른 주 지사)"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이렇게 해서 "카르"는 "국방군"의 보호 하에, 11.09일 오전 2:55분, "반란"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히틀러"는 "루덴도르프 장군(영향력 있는 퇴역 군인)"의 제안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카르"에게 압력을 가할 작정을 하고, "데코 행진"을 계획했다.

11.09일 오전 11:30분, 본거지인 "뷰르가브로이케라"에서 약 2,000명의 데모 대열이 출발해, 도중에 번번이 "무장 경찰대"로부터 저지를 당했지만, "경찰대"는 그리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시청 앞의 광장에 도착하였고, 여기에서 기세를 올린 뒤, 여세를 몰아, "국방군사령부"에 빽빽이 들어찬 "SA"와 합류하려고 했다. "오디온 광장"에서 이러고 있는 사이, 저지하고 있던 "무장 경찰대"에서 일발의 총성을 계기로 일제사격이 시작되면서, "데모대"는 쫓겨나고 말았다.

이 때의 일발은 우연한 폭음이었고, 일제 사격이라 해도 1분간 진행된데 불과했지만, "나치 당원(19명)ㆍ경찰(4명)"이 사망했다. "히틀러"는 함께 스크럼을 짜고 있던, "스퀘부너 리히터"가 총에 맞아 즉사하는 바람에, 같이 끌려 넘어지면서, 왼쪽 어깨가 탈구되었고, 결국 다른 "나치당 지도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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