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히틀러 ① 나치독일 총통 (Adolf Hitlerㆍ1889~1945ㆍ56세)

by 당대 제일 2022. 12. 19.
반응형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ㆍ1889~1945)"는 나치독일 총통(대통령 겸 총리-1934.08~1945.04)독일국 총리(1933.01~1945.04)나치당 당수(1921.06~1945.04)노벨 평화상 후보(1939)이다.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있기도 했지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1.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ㆍ1889~1945.04.30ㆍ향년 56세)

출 생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암인          사 망 :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 벙커 (나치 독일)          사 인 : 자살 (시안화칼륨 캡슐 + 권총 자살)          학 력 : 린츠 실업학교 진학 (비엔나 예술대학 낙방) 화가 지망생

• 별 명 : 아디ㆍ볼프 (결혼 40시간 후 사망)          : 에바 브라운 (1912~19451945.04.29일 결혼04.30 사망 히틀러의 공식 결혼 경력은 1번, 에바 브라운과 결혼1929(17) , 뮌헨의 한 화방에서 히틀러를 만났으며, 이후 1931년 히틀러 애인이 되었고, 1932(20)1935(23) 2차례 자살기도히틀러- 56에바- 33세에 결혼 (14년 동거)

• 자 녀 : 사생아 아들 1명ㆍ무명(1939~ ?)ㆍ패망 후 아르헨티나로 보내져, 그곳에서 삶을 이어 나갔고, 아르헨티나 인이라 함. 대부분의 전범들과 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로 도주           가 족 : 6남매 중 4번째생모- 클라라 푈츨 (아버지의 외조카 딸어머니면서, 사촌 누나)           - 알로이스 히틀러- 프란체스카 히틀러           생 존 : (장남)- 알로이스 히틀러(부친)의 손자 3(미국에 체류)           "윌리엄 패트릭"은 삼촌이 하는 행동에 삼촌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미국 망명 뒤에 외가의 성으로 "윌리엄 패트릭 스튜어트-휴스턴"이라고 개명했다.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의 자녀앙겔라(이복누나)의 손자 페트로 라우발(겔리 라우발의 조카)

 경 력 : 1914~1918 : 독일 제국군 육군 일반사병  1918~1933 :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대 육군 부사관하사(Feldwebel)  1933~1945 : 3제국 독일 국방군 최고 지휘관

 정 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재 임 : 1934.08.02~ 1945.04.30 (부통령 루돌프 헤스)           참 전 : 1/ 2차 세계 대전 수 상 : 철십자 훈장(2)           저 서 : 나의 투쟁 (1925/1927반유대주의자가 된 과정 묘사정치사상미래 독일을 위한 윤곽을 보여 준다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당" 줄여서, "나치"라는 말이 되었다 "갈고리 십자가"를 당기로 채택하고, "Heil (만세라는 뜻)"라는 "로마식 인사법"을 도입하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존경하였고, 이후  "히틀러"가 더 강성해졌으나, 계속 "무솔리니"를 존경했다. 

뛰어난 "웅변술ㆍ감각"의 소유자인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이후, 피폐해진 독일을 경제 발전으로 이끌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ㆍ오스트리아 병합ㆍ체코슬로바키아 점령ㆍ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한편 히틀러는 "1939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태인"이라 모함하여,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집시ㆍ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ㆍ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04.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1945.04.30일 새벽 4:30분 "지하 벙커"에서 "에바브라운(14년간 동거부인)"은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자신은 권총을 쏘아, 자살했다.

"히틀러"가 죽자, "가톨릭교회"는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는데, "스페인 신문- 리포메(Reforme)"는 "가톨릭교회의 아들, 아돌프 히틀러는 기독교를 수호하다가 사망하였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고귀한 삶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으로 그는 정신적인 승리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의 월계관을 승리자 히틀러에게 씌워 주셨다."라고 보도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의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폭력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부유한 세관원"이었다. 당시 수입이 많은 공무원이었다. 아버지가 40세 때쯤, 하녀였던 "히틀러 어머니"는 3번째인가, 4번째인가, "알로이스 히틀러 부인"이 된다.

어머니 "클라라 푈츨(Klara Pölzlㆍ1860~1907)"은 아버지의 외 조카이자, 후처였는데 병약하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1889년 "인(inn)"강변의 "브라우나우(Braunau)" 교외 219번지에서 4번째 아이로 태어난다. 위의 자매들은 어린나이에 다 죽었고, 2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1명은 죽고, 누이인 "파울라"만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학력이 낮았고, 술꾼에, 강압적이고 이해심이 없었고,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년퇴임 후, 술집에서 죽었다. 17살 때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질병으로 인한 죽음, 그러한 것들이 보헤미안처럼 객지를 떠돌아다니게 하였다.

1907.09월, 그는 "빈"으로 갔다. 당시 "빈"은 "반유대주의"가 싹트고 있었다. "빈"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다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럽의 경제특구"라 할 정도로 산업화가 융성했고, 노동인구도 많았는데, 산업화에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국가도 없이 "유대인"들은 숫자가 늘어나고, 영세 자영업자나 노동운동의 주류층을 형성 하고 있었기에 "독일"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반유대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1907.10월,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낙방한다. 12월에는 어머니가 죽는다. 그는 얄팍한 "고아 연금"으로 연명하면서, 더욱 "몽상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알콜 없는 음료ㆍ담배의 대용물ㆍ학교운영 계획" 등 갖가지 이상국가를 혼자서 구상했다고 한다. 같은 방 친구가 낮에 무엇을 하냐고 물으면, "나는 빈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고아연금"도 끝난 지 이미 오래, 그림을 팔아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는 시기에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즉 "세계1차 대전"이었다.

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이와 같은 예견을 하고 있었다고 썼다. 그는 군대에서 훈장까지 타며, 군 생활을 성실이 임했다. 약간은 패쇄적이었으나 적절한 군 생활을 잘 버텨 나갔다.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싹트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의 "독일" 패배는 그에게 엄청난 상실이었다. "독일"은 공황상태였다. "독일" 우익세력 들은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자본주의ㆍ공산주의"를 배척하고," 민족주의"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익세력 소수 사람들이 "양조장"에서 "도이치 당"을 만들었다. 바로 거기에 입당한 자가 "히틀러"다.

평당원들에게 연설권을 주자, "히틀러"는 물 만난 사람처럼 경렬하고 거침없는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열심히 뛰었다. 손수 타이핑을 치고 기록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보잘 것 없었지만, 열심인 덕택에 높은 위치에 올라갔다. 1919.10.16일, 그는 공식 연사로 등장 한다. 가난하고 고독한 하숙집시절, 우울한 독백에 가두었던 증오의 감정들, 말없이 묵혀두었던 문장들과 망상적인 이미지 고발이 터져 나왔다. "나는 연설을 해야 한다.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의 필요하다." "당령"을 만들고, 유대인과 돈 많은 자본가를 비난하고, 거리행진을 하면서부터 당원들이 늘기 시작했다. 당 이름도 바꿨다.

1930, "경제대공황", "히틀러"는 재등장한다. 처음에는 협소한 득표율이었지만, 2번째는 제2정당으로, 다시 제1당으로 올라선다. 당원숫자는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대부분 백수였다. "공산당"과 양당체제가 되었다. 당시 실업자가 600만, 비공식 800만 정도였다. "친위대"를 만들고, "돌격대"를 확대해 나갔다.

1933년 4월1일 유대인 상점 불매 운동이 시작된다. "유대인은 나가라" 많은 유대인들은 내몰렸다. "히틀러"는 "독일"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민족주의"로 아울렀다. "파시즘"의 원조 격인 "무솔리니"와 동맹을 맺었고, 그 후 "일본"과 동맹, "오스트리아 합병"이 이어졌다. 1939.09.01일, 04:45분 "폴란드"를 침공하여, 비교적 쉽게 얻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얼른 "이탈리아"는 "히틀러"에게 가세한다.

"프랑스"는 "독일"과 대등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은 군사조직력이 훨씬 앞선 나라였기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는 승승장구한다. "독일"은 점령한 유럽 나라들과 연대해서 "소련"을 침공한다. 겨울이 닥치자 독일군은 얼어 죽고 말았다. "히틀러"는 이성을 잃고 만다. "히틀러"가 점점 불리해지자, 독일장교들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실패로 돌아가, 가담자들은 처형당했다. 1944.06월, "영국과 미국" 등 "유럽연합"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러시아"는 "베를린"으로 돌격해 들어왔고, "무솔리니"는 죽은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디트리히 에카르트 (1868~1923ㆍ작가)

히틀러의 정신적 지주ㆍ히틀러보다 먼저 나치사상을 구상한 선배ㆍ독일 정치인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SDAP나치당)의 중요했던 초기 당원1923년 맥주홀 폭동의 참가자

2. 여성 편력 : 그가 "동성애 기질이 있었다"는 뜬소문도 있지만, 이건 낭설에 불과하다.

히틀러의 여성 편력으로는 "8명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사귄 여자에게 무서울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고, "에바"는 고생한다. 

① 앙겔라 히틀러 (Angela Hitler1883~1949): 연인ㆍ친 누나ㆍ조카 "겔리 라우바루"의 생모

② 겔리 라우바루 : 연인ㆍ자살한 외 조카ㆍ친 누나 "앙겔라 히틀러"의 딸

"에바"와 관계가 시작되었을 때, "히틀러"는 "겔리 라우바루"라는 여자와 살고 있었다.  "히틀러"는 "겔리"를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그녀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1931.09월 "겔리"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비엔나"로 떠난다고 하여, "히틀러"를 격분시켰다.  두 사람은 밤새 격렬하게 싸웠고, 다음날 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겔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에바"는 슬픔에 빠져있는 "히틀러"를 위로했고, 둘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그녀의 자살설로는 "히틀러"가 그녀를 버리고, "에바 브라운"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녀가 자살하자, 당시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성적인 모욕을 주었다ㆍ히틀러가 비정상적인 행위를 강요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3. 관련 설

① 유대인 설 : "히틀러"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유대인"을 증오하는 성향과는 관계없이 그가 "유대인의 혈통을 일부 물려받았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0년, 히틀러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서유럽 사람들에서는 보기 드문 "M1B1a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히틀러가 유대인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한편 그가 유대인을 증오하게 된 배경에는, 학창 시절에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 스승" 때문이라는 설과 그의 어머니 "클라라"가 자신의 주치의인 "유대인 의사"와 불륜관계를 갖는 장면을 목격하고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증폭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그 의사는 오히려 "히틀러"가 죽이지 않은 몇 안 되는 유대인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의사는 가난했던 "히틀러"의 어머니의 치료비를 많이 삭감해주었다.

② 장애인 설

근친혼으로 태어난 "히틀러"에게 피부병이 있었다는 설ㆍ정신적 장애를 앓았다는 설ㆍ성 불구자설 등이 있다. "성불구자 설"로는 외형은 정상적이나, 성적으로 불구였다는 설과 고환이 한 쪽 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각에는 히틀러는 자신의 신체적 열등감 때문에,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여러 여성들에게 요구했고, 자신의 조카이자, 연인인 "겔리 라우발"에게도 요구했으나, 그녀는 수치심에 자살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가계"는 "근친혼"이 종종 있었고, 히틀러의 아버지조차도 자신의 누나 "요안나의 딸이자, 외 조카인 "클라라 푈츨"과 결혼하였다.

4. 화가로서의 히틀러 :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원래는 "화가 지망생"으로, 엽서를 그리던 청년이었다. 히틀러는 "빈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ㆍ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ㆍ바다의 야상곡(1913)"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겼다.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작품인데도, 작품성이 아니라, 독재자가 그린 그림이라는 화가의 인물적 특징이 더 관심을 받았다.  이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을 "나치의 잔재"로 인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경매에 올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히틀러"가 남긴 작품들을 모두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012.01.29일, 히틀러 작 "바다의 야상곡(1913)"은 "슬로바키아"에서 온라인 경매에 올라왔는데, 한화로 4,700만 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최초경매가 1,600만 원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5. 히틀러의 사망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괴멸ㆍ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ㆍ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ㆍ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ㆍ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다.

① 사망 직전

1945.04.29일, "히틀러"는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였다. 1945.04.29일 PM 11:30분, 이미 "나치군"은 모두 붕괴되고, "소련군 전차군단"이 "베를린"을 포위하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나치 독일)"의 10Km 지점까지 들이닥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통보받자, 직속인 최후의 "친위대(500명)"에게 "대전차 포"로 본영 밖을 지키도록 지시하고, "에바 브라운"에게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하 식당"에서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철십자 깃발ㆍ화톳불ㆍ얼음덩어리"를 향해, 검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히틀러- 56세ㆍ에바- 32세)

입회인은 "괴벨스 부부(최측근)", 그밖에 8명 정도가 옆에 있었다. 결혼식은 "결혼 서약서"에 두 사람이 서명을 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 "피로연"으로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일동은 음식을 먹고, "슈베르트의 들장미"를 명랑하게 합창했다. 이것마저 1시간 정도로 끝났다.

"히틀러ㆍ에바"는 지하 깊숙한 곳의 "개인 사무실"에 들어간 뒤, 약 1시간 30분 동안, 그곳에 있었다. 1시간 30분 후, 둔한 총성이 울리고, 측근들이 "개인 사무실"로 달려 들어갔다. 1945.04.30.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스스로 자신을 쏘아 자살하게 된다.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테이블"에서 "향(?)"을 태운 흔적이 있고, "히틀러"는 관자놀이에 피를 흘리며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측근들은 오른손을 들어, "나치 식"으로 경례하고, "히틀러ㆍ에바"의 시체를 안뜰로 옮긴 뒤, "가솔린 200 갤런"을 뿌려 태웠다. 그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 "소련군"들은, 불에 타 형태도 알아볼 수 없었던 "히틀러의 총알 박힌 해골"을 당시 "소련"의 최고 통치자였던 "스탈린"에게 갖다 바쳤다고 한다. 시체는 다음 날 아침, 진입해 온 "소련군"에 의해 검시되었고, "히틀러 부부"라는 것이 판정되어, 즉시 그 주위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공식 기록이다.

② 의문 (?)의 죽음 : "히틀러의 죽음"은 그 이후에도 많은 미스터리를 가지고 있다.

• "히틀러ㆍ에바"가 "나치제국"의 재건을 꿈꾸며, "지하 본영"의 샛길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뒤, 비행기를 이용해, "남미로 도망쳤다"는 설이다.  그가 도착하여,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이 바로 그렇게도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아르헨티나의 바릴로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장거리 비행으로, "아마존의 오지"에 "나치 제4국을 세웠다"는 따위이다.

 불에 탄 시체는 사실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리인이며, 그의 죽음은 조작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 "남극"에 있는 비밀 기지로 도망갔다거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거주하다가 1971년 사망했다거나, 심지어 "지구를 떠나, 달로 도주했다"는 등의 설들이 있다.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모습은 "뉘른베르크"에서 SS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 "히틀러"는 자신의 몸에 7,200만 $의 보험을 들고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가 살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돈을 찾아가지 않았다.          1950.03월 경, "아르헨티나"에서 "히틀러"로 추측되는 사람이 목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독일 신문"에는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에 생존했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스탈린" "히틀러" 사후인 1946년에도 "그를 찾아내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NKVD(내무인민위원회) 내렸다.

③ 사망 원인과 두개골

2009.09.27일,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의 주말판 옵서버에서, "닉 벨란토니 교수(미 코네티컷 대학 고고학자ㆍ뼈 전문가)가 분석한 결과,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두개골은 40대 미만의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벨란토니 교수"가 이 두개골이 40대 미만의 여성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를린 점령 직후인 1945년, 소련은 벙커 주변 구덩이에서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고, 이듬해인 1946년 추가발굴을 통해 히틀러의 두개골 조각을 찾아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2000년, 러시아는 국가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을 공개하였다. 이때부터 "벨란토니 교수"는 러시아 측이 "히틀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개골의 DNA를 분석하였는데, 분석 결과, 이 두개골은 20대에서 40대 사이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어 "벨란토니 교수"는 "두개골 두께가 남성의 것과 달리 너무 얇았으며, 두개골의 봉합선도 1945년 57세였던 히틀러의 나이와 달리, 40세 이하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많은 외신들은 "히틀러"가 진짜 권총 자살했는지 의문시 되는 검사결과라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2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1번째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지 않았거나, 2번째는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하고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이 히틀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