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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롬멜 원수ㆍ사막의 여우(Desert Fox)ㆍ히틀러 경호대장

by 당대 제일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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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Rommelㆍ1891~1944.10.14ㆍ53세)"은 제국 원수(사막의 여우ㆍ북아프리카 전역)ㆍ히틀러의 경호대장ㆍ탁월한 전술가 (기갑사단 지휘관)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가장 유명한 "독일 원수" 중 1명이다. "독일 장성들" 가운데 파란만장한 경력을 자랑하며, 매력적인 인물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그는 탁월한 전술가였으며, "공격 아니면 맹공격"이라는 신조로 용맹한 모습을 남겼다.

 

1. 롬멜 (Erwin Johannes Eugen Rommelㆍ1891~1944.10.14ㆍ향년 53세)

명 언 : 공격 아니면, 맹공격 / 세상이 널 버렸다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그는 탁월한 전술가였으며, "공격 아니면, 맹공격"이라는 신조로 용맹한 모습을 남겼다. "세상이 널 버렸다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라는 유명한 말도 원래 그가 한말로 알려진다.

출 생 : 독일 제국, 뷔템베르크 주 하이덴하임          사 망 : 독일, 헤를링겐          사 인 : 자살 (청산가리 음독)          별 명 : 사막의 여우         • 계 급 : 제국원수

경 력 : 1911~1918 (독일 제국) 1918~1933 (바이마르 공화국) 1933 (히틀러와 만남) 1934 (총통 경호실) → 1933~1944 (3제국 독일 국방군)           참 전 : 제1차 세계대전ㆍ카르파티아 산맥 방어전ㆍ카포레토 전투 2차 세계대전투브루크 전투노르망디 상륙작전           수 상 : 기사 철십자훈장푸르 르 메리트 훈장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전선ㆍ루마니아 전선ㆍ이탈리아 전선"등 여러 전선에서 활약으로 뛰어난 전공을 보이며, 군인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 "사관학교 교직"으로 지내다, "나치스 당"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가입, "히틀러의 경호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기갑사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940년 "프랑스 전선"에서 전격전으로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남겨 활약하였다. 1941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고,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여, 적과 아군 모두로부터 "사막의 여우 (The Desert Fox)"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42년, "투브루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 "원수 계급"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1942.12월, "엘 알라메인 2차 전투"에서 본국으로부터 물자보급 지원조차 받지 못해, 패배한 뒤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그의 위용은 사라져간다. 1943년, "독일"로 귀환한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지휘하다가, 후에 "프랑스 서부전선"으로 파견되어 "영불해협"의 방위를 맡았으나, 1944.06.06일, 연합군의 막대한 물자ㆍ병력을 바탕으로 전개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저지하지 못했다.

1944년, "히틀러 암살음모 사건에 참여했다"는 의혹이 일자, 10.14일 "히틀러"에게 자살 강요를 받았다. 그는 "조용히 죽는 대신,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장을 치러준다"는 조건으로, 검은색 "메르세데스" 차 안에서 "청산가리"가 든 독배를 마셔, 음독자살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는 그가 암살미수 사건에 관련되어, 처벌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그에게 자살을 권했다고 한다.

2. 평가ㆍ비판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 역시 "연합군의 상륙"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전공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상대인 서방 국가들의 "연합군"이 "붉은 군대"보다 질적으로 높다고 가정하더라도, "북아프리카 전선"에선 1번 전투로 수십만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은 극히 드문 반면, "동부전선"에선 수십~ 수백만의 전투 손실이 자주 발생하는 일인 관계로, 그의 전공은 "만슈타인ㆍ구데리안", 그 외의 "동부전선 장군들"보다 높을 수가 없다는 평가도 있다. 기갑대장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와 의견에 마찰이 있었는데, 실제로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으며, 그 또한 "기갑전의 대가"였다.

 "나치스 추종자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치스ㆍ무장 친위대"를 극히 싫어했으나, "히틀러"와는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 논란의 근거이다. 그는 특별히 "나치 신봉자"는 아니었고, "나치 당원"도 아니었으나,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했었다는 점 등에 논란이 있다. 1934년, "총통 경호실"에서 근무하며, "히틀러"와 상당히 친분을 쌓았고, 그 경력 이후 출세가도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세운 전공에도 많은 논란이 있다. 애초, "사령부"가 주문했던 "리비아 국경선" 유지를 무시하고, 무리한 진격을 거듭하여, 최대의 약점이었던 "보급선 연장"을 오히려 부추겨, 종국에는 "아프리카 전선"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으며, "이탈리아" 사령부ㆍ장성들(우고 카발레로ㆍ바스티코 등)과의 노골적인 반목으로 전선 전체를 혼란시켰다는 비판적인 평가 역시 적지 않다.

 전술 면에서 보급 운용방식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실제 "북아프리카군단"은 항상 보급품의 곤란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아프리카 군단"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거의 "이탈리아 군대" 덕분이었다. 보급ㆍ진지 공사 같은 궂은일은 병력이 많은 "이탈리아군"이 도맡다시피 했고, 비록 취약한 "보병사단"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때, 측면을 엄호하는 역할 역시 수적 주력인 "이탈리아군"이 맡아 왔다.

3. 일 화

대치 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리자,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영국 총리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적장 롬멜"에 대해, "전쟁터에서는 재앙이지만, 군인으로서는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롬멜"은 일선 병사ㆍ부사관도 친절히 대하며, 그들의 의견ㆍ고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작전에 반영했으나, 지휘관들에겐 까다롭고, 무서운 인물이었다.

4. "히틀러" 암살미수 연루ㆍ죽음

1944년 봄, "루트비히 베크(육군 상급 대장ㆍ전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결성된 "히틀러 반대파"에 가담한 "롬멜"의 친구 몇 명이 그에게 접근하여, "히틀러가 축출된 뒤에는 롬멜이 국가원수 직을 맡아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독일"을 전쟁으로부터 구출하려는 공모자들은 "히틀러 암살계획"을 "롬멜"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롬멜이 정치적인 목적의 살인을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롬멜"은 "히틀러"가 내리는 일체의 "처형명령"을 한결같이 무시했었다.

1944.06.06일,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히틀러"에게 "전쟁은 패했다는 것ㆍ연합국들과 강화를 맺어야한다"는 것을 수차례 지적했었다. "히틀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롬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944.07.17일, "연합군"의 저공비행 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롬멜"은 병원으로 입원하고 난 후, 며칠 뒤, 07.20일, 커다란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이었는데, 장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총통 히틀러 암살"을 하기 위해, "동 프로이센 지역의 라슈텐부르크"에 위치한 "볼프샨체(총통지휘부)"회의에 참석하여, 회의실에 폭탄이든 가방을 놓고 "히틀러"를 폭살시키고, "나치스" 주요인사들 체포하여 "나치스 정부"를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계획했던 사건을 일으킨다. 그러나 "히틀러"는 가벼운 경상만 입은 채로 살았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장교들ㆍ주요 인사들을 체포하여, 대규모 숙청을 한다.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은 실패로 끝나면서, 재판ㆍ조사과정에서 "롬멜이 히틀러 암살에 가담한 음모자들"과 접촉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도 역시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된다.

1944.10.14일(토요일) 11시경, 

사복차림을 한 "게슈타포 요원들(12명)"과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장군(2명ㆍ부르크도르프ㆍ마이젤)은 검은색 차량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독일 울름"에 위치한 "롬멜의 집"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정각 12시, "총통의 위임을 받아, 1944.07.20일 암살기도 계획에 공모한 죄"를 묻기 위해 그의 집으로 들어갔고, "롬멜"에게 자살할 것을 권유하였다.

"사건 연루의혹을 국민들에게 밝히지 않고, 조용히 죽는 대신,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장을 치러준다"는 조건이었다. "롬멜"은 그들을 따라가, 검은색 "메르세데스"를 타고, 그의 집에서 약 5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간 뒤, 차량 안에서 "청산가리"가 든 독배를 마셔, "음독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음독자살" 직후, 차는 곧바로 "울름"의 군 병원으로 향했다.

그가 죽었을 때, 당시 병원에서의 공식발표 사인은 "서부 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상악화에 따른 심장마비"라고 발표하였다. 10.18일, "독일 울름 시청"에서 공식 추도식을 치루었고, 추도식 사회는 "룬트슈테트"가 맡았다. "히틀러"와 일당들은 "롬멜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많은 독일 국민들은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시하였다. 그의 묘는 "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헤를링엔"이라는 작은 마을에 안치되었다.

5. 연 보

1891.11 : "독일 뷔르템베르크 주, 울름" 북쪽 35km 떨어진 "하이덴하임"에서, 3남1녀 중 2남으로 출생  1910.07 : "뷔르템베르크" 124 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  1911.03~ 11 : "육군사관학교"(단치히)  1912.01 : 소위 임관02 : "뷔르템베르크" 124보병연대 소대장(초년병 교육담당)

1914.03 : "울름" 제49 야전포병연대 파견 08 : "블레 전투" 참전 (1차 세계대전최초의 전투)  1916.10 : "산악 대대"로 파견프랑스 전선에서 루마니아 전선으로 이동  1917.10 : 원대 복귀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마타주르 전투" 참전 →12 : "푸어 르 메리테 훈장"을 우편으로 수령 1918.01 : 대위 진급64군단 사령부 전속 부관 11 : 1차 세계대전 종전 12 : 124보병연대 복귀중대장

1921.01 : "슈투트가르텐" 제13보병연대 중대장 (9년 복무)  1929.10 : 소령 진급"드레스덴" 보병학교 전술학 교관 (4년 복무)  1933.10 : 17연대 3대대장 (2년 복무)  1935. : 중령 진급  1935.10 : 사관학교(포츠담) 교관 근무  1937. : 대령 진급동시에 "보병 전술록" 저술  1938. : "노이슈타트 사관학교" 교장(오스트리아 빈 근방) 근무  1939.06 : 육군 소장 진급

1939.08~1940.02 : "히틀러 총통" 본영 경호 대대장 근무  1940.02~1941.02 : 7기갑 사단장  1941.02~1941.08 : 육군 중장으로 진급아프리카 군단장  1941.08~1942.01 : 육군 대장으로 진급아프리카 기갑집단 사령관  1942.01~1942.10 : 아프리카 기갑군 사령관상급 대장으로 진급  1942.05.22 : 육군 원수로 진급"토부룩 전투" 승리의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원수로 진급

1942.10~1943.02 : 독일이탈리아 기갑군 사령관  1943.02~1943.05 : 아프리카 집단군 사령관  1943.03. : 독일 본국으로 송환 → 05 : 독일 아프리카군단 항복 (사령관대리 아르님 대장 조인)

1943.05~1943.07 : "롬멜 임시사령부" (뮌헨) 1943.07~1944.09 : 프랑스 "주둔B 집단군" 사령관 1944.07.17 : 영국군 전투기 저공비행 습격당해, 중상 1944.09.04~10.14 : "육군 최고사령부" 대기 1944.10.15 : 음독 자살 (청산가리) 1944.10.18 : "독일 울름 시청"에서 장례식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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