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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괴링ㆍ게슈타포 창설자ㆍ독일제국 2인자ㆍ전투기 에이스

by 당대 제일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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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링 (Hermann Wilhelm GöringㆍGoeringㆍ1893~1946.10.15ㆍ53세)"은 게슈타포(비밀경찰) 창설자ㆍ나치 돌격대(SAㆍSturmabteilung)의 지휘관으로, 게슈타포(비밀경찰) 창설자이다. 나치당 국회의장독일 제국 원수(나치 공군 총사령관)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였다.   "괴링"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전투기 에이스였으나, 모르핀의 중독에 시달렸고체형도 많이 변하게 됐다.

 

1. 괴링 (Hermann Wilhelm GöringㆍGoering1893~1946.10.15ㆍ향년 53세)

1935년, 재군비 선언 이후에는 "나치 공군의 총사령관(제국원수)"으로 "공군"을 창설ㆍ육성했다. 1921년, "괴링"은 "히틀러"를 만났으며, 1922년 말, 소규모 "나치당"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 집행 전날, 자기 감방에서 자살했다.

• 출 생 : 독일제국 바이에른 왕국 로젠하임           • 사 망 : 독일 뉘른베르크           • 사 인 : 자살           • 계 급 제국 원수 (나치 공군의 총사령관)           • 참 전 1차 세계 대전2차 세계 대전           • 수 상 대 십자 철십자 훈장기사 철십자훈장푸어르 메리테 훈장

• 경 력 : 1912 (장교로 임관) → 1912~1918 (독일 제국) → 1922 (나치당 입당 (1921 : 히틀러와 만남)) → 1918~1933 (바이마르 공화국) → 1932 (국회의장) → 1933~1945 (3제국 독일 국방군)

"히틀러"는 "괴링"의 결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권과 깊게 밀착된 "괴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939년,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으며, 1940년에는 "대(大)독일제국의 제국원수 (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hes)"라는 특별계급을 주었다. 다른 나치스 지도자들은 편파적인 "괴링"의 지위에 분개하거나, 방종한 성격을 경멸했지만, "히틀러"는 전쟁 마지막 기간까지, 그를 해임하지 않았다. 

"괴링"은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포위되어 절망적이라 생각하고, 1939년에 내려진 포고령에 따라 "총통의 권력"을 계승하려 했다가, "히틀러"에게 해임 당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자살한 뒤, "괴링"은 자신이 "전권대사"로 대우 받기를 바라고, "미군"에게 항복했다. "독일 국민" 뿐 아니라, 외국 대사와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괴링"은 "나치스 지도자들" 중에 가장 인기 있었으며,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이용하여, 저택 "카린할"에 막대한 "예술 소장품"을 축재했다.

"독일"에 사는 유대인뿐 아니라, "히틀러"에게 무너진 여러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을 경제적으로 수탈한 사람도 바로 "괴링"이었다. 성격은 무자비했는데, 그것은 1938년 "오스트리아"에 "독일과 합병(Anschluss)"하도록 협박한 전화대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괴링"은 모르핀의 중독에 시달렸고, 체형도 많이 변하게 됐다. 1923.1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성급하게 일으켰다가 실패한 "맥주홀 쿠데타"에도 가담해,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상처의 아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하다가 심하게 중독되었다.

2. 사 망

전범으로,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약물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난 "괴링"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자신을 훌륭히 변호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기 있는 피고인이며, 역사적 인물이라고 여겼으며, "히틀러 정권"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과 자신은 관계가 없고, 그 모든 것은 "하인리히 힘러ㆍ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비밀리에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죄 판결을 받고 나서, "교수형" 대신 "총살형"을 바라는 탄원을 올렸으나 거절당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에 "집행 명령"이 하달되자, 밤늦게 "뉘른베르크의 감방"에서 음독자살했다. 이 사실은 "포마드" 용기 안에 "독약 캡슐을 내내 숨겨왔다"는 내용이 적힌 쪽지가 1967년에 발견됨으로써 밝혀졌다.

3. 생 애

"에른스트 괴링(아이티 주재 독일제국의 영사)"와 후처 사이의 2남으로, "독일 제국"의 "알프스" 가까운 지역인 "로젠하임(바이에른 왕국 령)"에서 태어났다. 1896년(3살 때), 아버지가 "알렉산드리아 주재 총 영사직"에서 은퇴하여, 가족들은 함께 "독일"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괴링"은 "뉘른베르크"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성인 "펠덴슈타인"에서 자랐는데, 1913년까지 그 성의 주인은 어머니의 연인이자, 아이들의 대부인 유대사람 "헤르만 에펜슈타인"이었다.

① 청년기

직업 군인으로 훈련받은 뒤, 1912년 장교로 임관하였다. 초창기 "독일제국 공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맹활약했다. 1918년, "독일"의 위대한 비행사 "만프레트 남작 폰 리히트호펜"이 복무했던 유명한 "비행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 뒤, 혼란기에 "민간인들이 군 장교들을 푸대접한다."며, 몹시 분개하여, "독일"을 떠났다. 이후 그는 "덴마크ㆍ스웨덴"에서 민간 비행사로 일했으며, 스웨덴의 남작부인 "카린 폰 로젠"을 만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뒤인 1922.02.03일에 "독일 뮌헨"에서 결혼했다.

② 나치당 입당과 활동

1921년, "괴링"은 "히틀러"를 만났으며, 1922년 말, 소규모 "나치당"에 입당했다. 전직 장교로서 "히틀러의 나치 돌격대"를 지휘했으며, 1923.1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성급하게 일으켰다가 실패한 "맥주홀 쿠데타"에도 가담해,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부인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상처의 아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하다가 심하게 중독되어, 1925~1926년 2번이나 "스웨덴 스톡홀름"의 "롱브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927년, "바이마르 공화국(독일)의 베를린"으로 돌아온 "괴링"은 독일 산업계와의 접촉에 성공하여, 다시 "당 지도부" 자리에 앉았고, 1928.05.20일 "독일 국회 선거"에서 "나치스당"이 얻은 12개 의회의석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다. "국회"에서 인정받는 당 지도자가 되었고, 1932.07.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이 230석을 점하자,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괴링"의 유일한 관심은 1933.03월까지 "국회"가 겉으로나마 내세웠던 "민주주의 체계"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84세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역대 총리들, 특히 "쿠르트 폰 슐라이혀ㆍ프란츠 폰 파펜"을 계략에서 앞질러, 결국 1933.01.30일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독재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 1933.03.23일에야 "히틀러"에게 "독재 권력"을 주는 "전권 위임법"이 통과되었다.

"괴링"은 끈기 있게 밀고 나가, "독일"에서 제일 크고 영향력 있는 "프로이센 자유주의 내무장관" 직을 맡았다. 이 직책을 이용하여, "프로이센 경찰"을 "나치화"했으며,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했다. 또한 다루기 힘든 반대파들을 교정하기 위한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1933.02.27일, "나치"가 선동한 것으로 추측되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구실로,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몇몇 "사회민주당 의원들"도 체포해, 다음 달 "전권 위임법"의 통과에 방해되는 자들을 제거했다.

③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런 지지자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로서, "괴링"의 위치는 1930년대 말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마음대로 국가 직책을 골라서, 역임했다. 그는 "독일제국 항공분야"의 총책임자, 1935.03.01일까지 민간사업체로 위장했던 "나치스 공군의 총사령관", 1933년에는 독일 수렵지 및 산림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1934.06.30일, "나치스당"이 "나치 돌격대(SA)"의 지도자 "에른스트 룀"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같은 해 "안보책임자" 직책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게슈타포ㆍ강제수용소"에서 손을 떼었다. 

1937년에는 1934년부터 "히틀러 정부"의 "경제계획부" 장관인 "히알마르 샤하트"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36년에 "히틀러"는 이미 "샤하트"와 의논도 하지 않고, "괴링"에게 전시경제(戰時經濟)를 위한 4개년계획의 책임을 맡겼었다. "괴링"은 또한 "히틀러의 순회대사"도 계속 맡았다. 

1931년 전처(카린 폰 로젠)이 죽은 뒤, 1935.04.10일 여배우 "에미 조네만"과 재혼했다. 전처에게처럼 후처에게도 헌신적이었다. 사냥에 관심이 많아, "베를린 북쪽"의 "쇼르프하이데"에 드넓은 산림지역을 소유했고, 그곳에 1933년부터, 야망에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을 짓기 시작했으며, 전처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 저택을 "카린할" 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카린할"에, 자신이 모아들인 막대한 "예술 소장품"의 대부분을 보관했다. 1938.06.02일, "에미 조네만"은 괴링의 유일한 자식인 외동 딸 "에다"를 낳았다.

④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스웨덴"의 사업가 "비르거 달레루스"와 협상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괴링"은 진정으로 전쟁을 피하거나, 늦추기를 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군사행동이 계속되면서,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박살내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약화시킨 "전격 작전"을 실행한 것은 바로 "괴링의 공군"이었다. 

"괴링"의 방종한 기질은, 혹독한 전쟁을 견뎌 내거나, "전투기" 보다는 "폭격기" 생산을 선호한 "히틀러"의 맹목적 편견에 반대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히틀러"가 북유럽에서 "지중해ㆍ북아프리카"로 전선을 확장함에 따라, "나치스 공군"의 방위능력은 약해졌고, "나치스 공군"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지고, "연합군"의 "독일 폭격"을 막지 못하게 되자, "괴링"은 체면을 잃었다. "괴링"은 건강을 구실로 은퇴했는데, 이는 "히틀러"도 바라던 바였다.

"괴링"은 "카린할"에 보관한 사치품을 즐겼고, 점령국의 "유대인들"에게서 약탈한 예술품들로 소장품은 계속 늘어났으며, 많은 선물들을 타인들로부터 받았다. "괴링"은 엄청나게 뚱뚱해졌으며, "모르핀"에서 추출한 약물인 "파라코데인"을 지나치게 써, 자주 약물중독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약물중독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기분이 좋아졌다가 곧 우울해지기도 했으며, 자기중심적이며, 허황하여 눈부시게 찬란한 의상ㆍ군복ㆍ훈장들ㆍ자기과시욕을 만족시킬 보석들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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