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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아인슈타인 ① Einstein (1879~1955)ㆍ노벨 물리학상 (1921)

by 당대 제일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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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ㆍ1879~1955ㆍ76세)"은 독일 태생의 스위스미국 이론 물리학자"광전효과"에 관한 기여로 "노벨 물리학상(1921)" 수상.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현대 물리학"에 혁명적인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 :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Zur Elektrodynamik bewegter Korper)ㆍ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Ist die Tragheit eines Korpers von seinem Energieinhalt abhangig)

 

1.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ㆍ1879~1955ㆍ향년 76)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서 공부한 후, "특허사무소 심사관"으로 일하다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며 일약 스타 과학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반상대성이론"을 정립했고, 점차 반전주의자 대열에 들어섰다. 그 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미국"으로 이주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보내, "원자폭탄의 개발"을 종용했지만, 폭탄 투하 이후 이를 대단히 후회하여, 후배들에게 과학자들의 도덕적 결정을 강조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보다 미국에서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서한을 보냈을 때, "독일"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핵"은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고, 이후 그는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된다. 그는 말년에 "평화주의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후배 과학자들에게 과학자의 발명 하나하나가 어떤 용도로 쓰일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줄 것을 당부했다.)

출 생 :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울름            사 망 :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병원 (심장병자다가 운명)             국 적 : 독일(1879~1933)스위스(1901~55)미국(1940~55)             분 야 : 물리학             학 력 :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교취리히 대학교             업 적 : 특수상대성이론일반상대성이론브라운 운동광전효과 / 질량 : 에너지 등가성ㆍ보즈-아인슈타인 통계ㆍEPR 역설

 수 상 : 노벨 물리학상(1921)ㆍ코플리 상(1925)ㆍ플랑크 상(1929)             : 밀레바 마리치(1903~19)엘자 아인슈타인 (1919~36)             자 녀 : 리제를 아인슈타인(1902~03?)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04~73)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1910~1965)

2. 명 언

• 정치는 순간을 위한 것이다. 방정식은 영원을 위한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예견했던 것 같다)        내가 성취하고자 추구했던 것은 단지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진리와 아무도 즐겁게 하지 못하는 위험에 대한 정의에 봉사하고자 한 것이다.         운명은, 권위를 극도로 혐오하는 나를 실로 가혹하게 처벌하였는데, 나를 권위 그 자체로 만들었다.         나에게는 신의 생각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외의 것들은 다 사소한 것들이다.

• 이 세상은 살아가기에 너무 위험한 곳이 되어버렸는데 그 이유는 나쁜 인간들 때문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2가지 무한한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전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궁금증은 그 자체로 존재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3. 생 애

1879년 "독일 제국령"이었던 "뷔르템베르크의 울름 시"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어린 시절 그는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로 인해 상처받았고, 이는 저명한 과학자가 된 후에도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독일"의 엄격한 단체 교육은 그에게 맞지 않아서, 과학과 수학에 대한 흥미를 제외하면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밀라노"로 건너가서 "독일 뮌헨ㆍ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독학으로 공부하여,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 응시했고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을 눈여겨본 학장의 배려로, 1년 후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했다. 1900년 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시민권 문제ㆍ반 유대감정"으로 취직을 하지 못해,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고 가정교사 등을 전전했다. 이후 "베른"에 있는 "특허 사무소 심사관"으로 근무하면서 1905년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중요한 5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친구인 수학자 "그로스만"이 수식화해 준 논문에서 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Zur Elektrodynamik bewegter Korper)"라는 논문에서 처음 발표된 "특수상대성이론"은 "모든 좌표계에서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자연법칙이 동일하다면,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Ist die Tragheit eines Korpers von seinem Energieinhalt abhangig)"에서 "물질이 갖는 에너지는 그 물질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 즉 E=mc2"로 표현되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물리학계에 큰 파장을 미치면서, 그는 "하룻밤" 사이에 저명한 물리학자가 되었다. 그는 "특허사무소"를 그만 두고, "프라하의 독일 대학ㆍ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914.04월,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는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강의ㆍ연구를 계속했다. 이때의 연구는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에 집약되어, 1916년 "물리학 연보"에 발표됐다. 그는 이 논문에서 "뉴턴의 중력 개념"을 뒤엎고, "중력이란 시공연속체 속에서 질량에 의해 굽어진 장(場)"이라고 주장했다. "질량에 의해 장이 굽어지는 모습, 즉 태양 옆을 지나는 별빛이 휘어진다면 이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일식 기간" 동안 별빛을 관찰하고자 했다.

1919년, "런던 왕립학회"는 "일식"을 관측해서, 그가 예측한 것과 동일한 수치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뉴턴 역학의 세계관을 마감한 인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반박이 많은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광전효과"에 대한 공로로 수상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반 유대인주의" 속에서 자란 그는 "국가주의"를 반대하고, "평화주의"를 지지했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상대성이론"을 강의하면서도, "평화주의"를 전파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움켜쥐면서, "유대인"에 대한 억압이 심해졌다. 

그는 "독일"을 떠나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갔다. "독일 정부"는 그의 집ㆍ별장 등을 수색하여 물건을 압수했고, 이를 통해 "독일"의 전쟁 준비를 확신한 그는 유럽 자유세계의 무장을 촉구했다. 그는 "나치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을 만들어, 세계에 위협을 가할 것을 우려하여, "루스벨트"에게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기 전에 미국에서 먼저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사실 그는 권고는 했지만, 실제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1945년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나서야, "자신의 편지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과학자 집단에 합류했다. 그는 "미국ㆍ소련" 사이에 무기 경쟁이 점차 심화되는 것을 보며, 세계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고, "버트런드 러셀(영국 철학자)"와 함께,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했다. 1955.04.18일, "프린스턴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4. 연 보

• 1879.03.14 : 독일 뷔르템베르크 울름 (Ulm)에서 출생  1886~1900 :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Zurich Politechnic Institute)에서 공부  1901 : 스위스 국적 획득  1902 :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자리를 구함  1903 : 대학시절 친구 "밀레바 마리치 (Mileve Maric)"와 결혼  1905 :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을 Annalen der Physik에 발표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특수상대론 논문 "On thw Electrodynamics of Moving Bodies" 발표

• 1908~1914 : Berne, Zurich, Prgue 등의 대학에서 강의  1914~1933 : Kaiser Wilhelm Institute의 물리학 교수 및 이론물리 책임자 1916년 일반상대론에 관한 연구 완성 레이저의 기초가 된 방사광의 흡수와 방사에 대해 연구  1918 : 통일장 이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서 평생을 계속함  1919 : 사촌 "Elsa"와 결혼

• 1921 : 미국 처음 방문, 광전 효과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24 : Bose의 연구를 이어받음  1925 : 이스라엘의 Hebrew University의 운영위원이 됨  1930 : 우주팽창에 관한 모델을 제시

 1933 : 나치를 피해 망명, 프린스톤의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 감  1939 : 원자력 에너지의 가능성에 대해 Roosevelt에게 편지  1940 : 미국 시민권 획득  1952 :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요청 거절  1955.4.18 :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Princeton)에서 사망

5. 아인슈타인의 IQ = 280

그는 생전에 "IQ 테스트"를 받은 적은 없으며,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심리학자들이 분석했을 때, 나온 "IQ"는 280이라고 한다. 그의 업적은 왠만한 천재로서는 이루기도 힘든데,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얘기하기 전에,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천재과학자 "아이작 뉴턴"에 대해 알아보자.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색에 잠겼을 때, 우연히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루머로도 유명한 과학자인데, 실제로 그는 거의 모든 "물리학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천재성은 "수학"에서도 발휘되는데, 자신의 "물리학 이론"을 뒷받침 해줄만한 수학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 자신의 "물리학"에 필요한 "수학(미적분)"을 직접 만들었을 정도로, "수학"에서도 뛰어났다. 그러나 "만유인력의 법칙"을 수식으로 표현하여, "태양계 행성의 운동"을 아주 멋지게 설명해 내기도 했던 그가, 못한 일이 있는데, 바로 자신이 주장한 "만유인력이 왜 존재하느냐"라는 질문에 답변을 못했다. 다시 말해, "중력의 근원"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뉴턴"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광양자 가설"을 포함하여, 3가지 논문을 차례차례 발표했다. 그 중 하나가 "시공간의 개념"을 다뤄, "뉴턴 역학"에 큰 충격을 안겨준 "특수상대성 이론"인데, 이 이론이 발표되고 나서, 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지만, 나중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뉴턴 역학"에서 얘기하는 "중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이 충돌은, "뉴턴 역학"에서 "중력"은 "중력이 일정한 거리에 떨어진 물체에 전달되는 속력은 무한대"라고 말하고 있는데, 즉, 만약 태양계에서 태양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지구는 태양이 사라지자마자, 중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에 빛보다 빠른 것은 존재 할 수가 없다. 결국 아인슈타인도 이러한 충돌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론에 맞는 "새로운 중력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중력이론을 다시 만들려면 우선 중력이 왜 생기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이 일은 "뉴턴"도 하지 못했다!) 1905~ 1914년까지,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중력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1915년에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6. 아인슈타인 증후군 (Einstein syndrom)

지능이 일찍 발달한 어린이가 말하는 능력이 늦게 발달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

그를 비롯해, 여러 가지 분야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인물들 가운데, 유아기 때 말을 늦게 시작했거나 말하는 능력의 발달이 정상보다 뒤처진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아르투르 루빈슈타인(피아니스트)ㆍ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독재자)ㆍ라마누얀(인도의 수학천재)ㆍ개리 베커(경제학자/노벨상 수상)ㆍ리처드 파인먼/에드워드 텔러(물리학자)"등이다. 지능이 일찍 발달한 아이들의 말하는 능력이 늦게 발달하는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아이들 중, 유아 때 지능이 일찍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동갑내기들은 말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는데도, 침묵을 지키는 유아들 가운데서 빠르게는 2살 때 컴퓨터를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신경과학자들은 그가 말하는 것이 늦었던 것은 "뇌의 비정상적인 발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해부 결과 밝혀냈다. 

"분석적 사고 기능"이 집중된 "아인슈타인의 뇌 부위"가 정상적인 영역을 크게 벗어나 있었는데, 이 같은 침범을 받은 영역 가운데 하나가 일반적으로 언어기능을 통제하는 부위였다. 일부 신경과학자들은 이 같은 현상을 보고,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능력과 말이 늦어진 것 사이에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능력 결핍이 일반인들보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이 모든 현상은, 뇌의 한 부위가 정상수준 이상으로 발달하여 갖가지 자원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뇌 부위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다른 부위에게 자원을 빼앗겼던 뇌 부위들은 유아기 때 뇌 전체가 성장할 때, 필요한 총 자원의 양이 증가하면 비로소 정상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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