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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아인슈타인 ③ 특수상대성이론ㆍ일반상대성이론ㆍ양자 역학

by 당대 제일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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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ㆍ1879~1955ㆍ76세)"의 "상대성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ㆍ일반상대성이론"으로 구분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 특수상대성이론 :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1854~1912)  • 일반상대성이론 : 아인슈타인과 다비트 힐버트(1862~1943)의 동시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물리학자ㆍ수학자들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현재 "상대성이론"은 우주 관측에 사용되는 입자가속기 등 "물리천문분야" 뿐만 아니라, 시간ㆍ공간을 정밀하게 측정해야 하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 특수상대성이론의 배경 : "전자" 이론

1888년, "헤르츠(독일ㆍ1857~1894)"가 "전파"를 발견하면서, "전자기학" 연구자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전자기이론 중, "전파의 존재"를 예언한 이론은 빛을 전파의 일종으로 간주한 "맥스웰(1831~1879)"의 "전자기 이론"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 전까지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됐던 "빛 에테르ㆍ전자기 에테르"는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2. 1888년, "전파"를 최초로 발견한 "헤르츠"

사실 19C 초만 하더라도 과학자들은 물질세계가 보통물질과 여러 가지 "에테르"들로 구성돼 있다고 믿었다. (에테르 : 전파나 빛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우주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온 물질그 존재는 "상대성 이론"으로 부정하고 있음)

하지만 "헤르츠"가 발견한 "전파" 덕분에 물질세계는 "보통물질ㆍ전자기 에테르", 이 2가지로 단순해졌다. 일찍이 "조지프 톰슨ㆍ영국ㆍ1856~1940)"은 "전자기 에테르 안에서 전하를 띈 입자가 운동한다면, 그 입자의 질량이 마치 늘어난 것처럼, 주어진 힘보다 천천히 가속될 것"이라는 계산결과를 내놓았다. 또한 "앨버트 마이컬슨ㆍ미국ㆍ1852~1931)ㆍ에드워드 몰리(1838~1923)"는 "지구가 빛 에테르 속에서 운동하지만, 빛의 속도는 지구의 운동방향과 상관없이 언제나 일정한 것으로 관찰된다"는 점을 실험적으로 확인했다.

게다가 1897년에는 "JJ 톰슨"이 모든 물질에 공통적으로 포함돼 있는 "전자"를 실험적으로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헨드릭 로렌츠(네덜란드ㆍ1853~1928)ㆍ막스 아브라함(독일ㆍ1875~1922)" 등 전자기학의 대가들은 "전자이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전자이론"이란, "모든 물질이 전자로 구성돼 있고, 물질의 질량은 전자가 전자기 에테르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전자" 사이의 거리는 "전자의 운동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는 이론이다.

3. "특수상대성이론"의 등장ㆍ철도와 전신

한편 19C 후반, 철도ㆍ전신(電信)은 각지로 뻗어나갔다. 아무런 사고 없이 철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철도역끼리 시계를 정확하게 맞춰야 했다. 철도가 등장했던 초기에는 중앙역에서 시각을 "전신"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전신"으로 신호가 갈 때까지 또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역일수록 신호가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이렇듯 철도역들의 시계를 정확히 맞추는 문제 자체는 기술적 문제였지만, "아인슈타인ㆍ푸앵카레"는 기술적 문제에서 더 나아가 물리학적인 의미를 고민했다.

1905.05월 초, "아인슈타인(스위스 특허국의 청년 사무관)"은 몇 가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질량이 저울로 측정하는 물리량인 것처럼, 시간은 시계로 측정하는 물리량이다ㆍ빛의 속도는 모든 실험이 보여준 것처럼 언제나 같은 속도로 관찰된다.ㆍ모든 물리현상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언제나 똑같은 법칙을 따른다."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론을 완성할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고민을 하소연하러, 친구이자 동료 사무관인 "베소"의 하숙집에 갔다가 두 기차역 간 시계를 정확히 맞추는 방법에 대한 착상을 떠올렸다. 그는 그로부터 5주 만에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완성하게 된다. 

장년의 수학자이자, 고위 공무원이었던 "푸앵카레(프랑스ㆍ1854~1912ㆍ수학자ㆍ물리학자ㆍ천문학자 ㆍ과학사상가ㆍ수학(수론/함수론/미분방정식론)ㆍ물리학(전자기파론/양자론/상대성이론)에 공헌)"도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경로로 표현한 논문을 1개월 늦게 완성했는데, 이 두 이론은 결국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론은 "모든 물질의 근원이라고 상상된 전자가 정말로 존재하느냐에 상관없이,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4. "특수상대성이론"의 확장/확산ㆍ아인슈타인의 재능을 누구보다 일찍 알아챈 "막스 플랑크"

당시 독일 물리학계의 대부였던 "막스 플랑크(1858~1947)"는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일찍 평가했다. "플랑크"는 전자들의 특수한 성질을 가정하는 "전자 이론"들과 달리, "갈릴레오(1564~1642)" 이래 물리학의 원리였던 "상대성원리(물리법칙을 서술할 때, 물체들의 상대운동만 따져야 한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이 밝혔다고 평가했다.

당시 아인슈타인 논문 제목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력학에 대하여"였지만, 이 이론에 "상대성"이라는 단어를 결부시킨 것도 "플랑크"였다. 곧이어 "전자 이론들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검증하는 실험들이 진행됐고, 1908년, 아인슈타인 이론의 "예측치가 맞았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후 "전자 이론"은 급격히 쇠락한다.

한편 1905.09월, 아인슈타인은 6월 논문의 응용사례로 빛을 방출하는 물체를 서있는 관찰자가 측정하는 경우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가 측정하는 경우를 비교하는 짧은 논문을 작성했다. 그 논문의 결론은 "물체가 E 만큼의 빛 에너지를 방출하면, 그 물체의 질량은 E/c2만큼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에서 그 유명한 E=mc2 이라는 공식이 탄생했다. (E- 빛 에너지ㆍc- 빛 속도)

5. "일반상대성이론"의 탄생 : "물리적 직관"에서 "수학"으로

"아인슈타인"은 젊은 시절, 물리적 직관만을 중시하는 연구 스타일을 고수했다. 일례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1864~1909)"가 "로렌츠ㆍ아인슈타인" 이론의 수식체계를 정리해 "4차원 개념"을 제시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그런 개념은 필요 없다"는 논문을 출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완강한 태도는 점차 누그러져 1910년경, "수학적 관념도 유용하다"고 인정했고, 1912년부터는 친구인 "수학자 마르셀 그로스만"과 함께, "일반상대성이론"에 사용하기 위한 "미분기하학"을 직접 공부하기 시작했다.

"미분기하학"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곡면 위에서의 기하학적 성질을 미분방정식을 사용해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아인슈타인이 수학을 공부한 이유는 "실제 물체에서는 가속과 중력이 같으면서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위로 가속되는 엘리베이터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체는 어느 방향에서 떨어지든지, 엘리베이터 바닥에 수직 방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구의 중력에 끌려 떨어지는 물체는, 중력의 방향인 지구 중심을 향해 비스듬히 떨어진다.

6.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 근거의 하나로 삼은 "등가원리"의 착상

즉, 전체적으로 보면, 가속과 중력의 효과는 같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힘의 작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개미에게는 지구 표면이 평면이나 다름없지만, 전체적으로 지구표면은 둥그렇게 구부러져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미분기하학"을 배우며, "일반상대성이론"을 연구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상당히 까다로운 수학을 사용하면서 수학자들에게도 새로운 연구주제를 제공했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힐버트"는 아인슈타인을 초청해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15년 말,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고, "힐버트"도 몇 주 늦게 거의 같은 결과를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을 1916.03월,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됐을 무렵은 "아인슈타인의 중력연구"에 자극을 받은 여러 "중력이론"이 등장했던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노르드스트룀(핀란드)"의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1919.05.29일,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남미"에서 일식 사진을 찍었는데, "노르드스트룀 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 중, 어느 이론이 수성 궤도의 변화를 더 잘 예측하는지를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관측대가 영국으로 귀환해, 검증작업을 한 끝에 11.06일, "영국왕립학회와 영국왕립천문학회의 특별합동회의"에서 "아인슈타인 이론이 맞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은 다음날 런던의 "타임스 지" 1면에 "과학의 혁명ㆍ새로운 우주론ㆍ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제목으로 크게 실렸다.

실제로는 관측오차가 너무 커, 두 이론 중 어느 이론이 맞다고 단언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국 과학자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소원해진 "독일학계ㆍ영국학계"의 관계를 다시 좋게 만들려는 의도로, "영국의 뉴턴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독일의 아인슈타인이 뛰어넘었다"는 식으로 과잉 해석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 보도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를 뛰어넘어 대중적으로도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7. "상대성이론"을 둘러싼 오해와 신화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관심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다ㆍ4차원"과 같이,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호한 관념들에 초점이 맞춰졌다. 물리법칙의 보편성이나, 측정과 이론적 개념의 관계와 같은 핵심적인 문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때문에 추상개념만으로 현실세계를 재단하는 일들이 벌여졌다. 일부 유물론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눈에 보이는 물질을 보이지 않는 에너지라고 착각했다"고 공격했고, 반유물론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유물론은 틀렸다"라고 증명했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한 유명한 철학자는 "심리적 경험으로서의 시간과 물리적으로 측정하는 시간을 혼동"하기도 했다.

8. 양자 역학 (Quantum Mechanicsㆍ量子力學)

① 고전역학ㆍ양자역학의 차이

17C부터 물리학자는 거시적 현상을 기술하기 위하여 "고전역학(classical mechanics)"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이런 거시적 해석이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울 때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1905년 "아인슈타인"은 그 대안으로 "상대성역학(relative mechanics)"이라는 새로운 역학체계를 제시하였다. 또한 "원자"와 같은 아주 작은 물체인 "미시 세계"에서의 실험 결과도,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1900~ 1927년에 걸쳐, "플랑크ㆍ보어ㆍ아인슈타인ㆍ하이젠베르크ㆍ드브로이ㆍ슈뢰딩거" 등의 많은 물리학자들이 그 대안으로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는 새로운 역학체계를 제시하였다.

 양자 역학 (Quantum Mechanicsㆍ量子力學)

"양자론"의 기초를 이루는 "물리학 이론"의 체계이다. "원자ㆍ분자ㆍ소립자" 등 미시적인 물질세계를 설명하는 현대물리학의 기본 이론이다. 거시적 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고전역학"과 상반되는 부분이 많다.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물성 물리학"을 비롯한 다양한 물리학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양자 역학" 이전의 물리학을 이와 대비하여 "고전 물리학"이라고 부르는데, "고전 물리학"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규모의 거시적 물질세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양자 역학" 결과를 거시적인 규모로 근사할 때, "고전 물리학" 결과의 대부분을 유도할 수 있다. 그래서 "양자 역학"이 정확한 이론이라고 한다면, "고전물리학"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근사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양자 역학"이 "고전 물리학"과 다른 특징적인 요소는 크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양자화(quantization)"로서 "에너지ㆍ운동량ㆍ각운동량" 등의 성질들이 특정 값들에 제한되어 있다.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으로서 미시적인 현상에서는 파동의 특성과 입자의 특성이 동시에 관찰되는데,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고 한다. 거시 세계에서는 "파동 현상과 입자가 만들어내는 현상"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서, 물질의 어떤 특성들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양자 역학"이란 무엇일까?

이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막스 보른(독일ㆍ1882~1970)"으로, "Quantenmechanik (크반텐메하닉)"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그대로 영어로 번역된 뒤, 일본에서 "量子力學(료오시리키가쿠)"라 번역됐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양자ㆍ역학"을 각각 살펴보는 것이 좋다. "양자(量子)"로 번역된 "quantum(영어)"는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는 "힘의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힘을 받는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과 운동"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빛알 이론(light quantum theory)"과 보어의 "원자 모형"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은 "빛의 본성"이 탁구공이나 쌀알 같은 입자인지, 아니면 물결이나 소리와 같은 파동인지를 놓고 진지한 논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빛을 입자로 보는 부류나 파동으로 보는 부류 모두 "형광현상1ㆍ냉광 현상ㆍ광전 효과" 등을 설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 형광 현상 : 물체가 빛을 받아 다른 빛을 내는 현상           냉광 현상 : 열을 내지 않고 빛을 내는 현상           광전 효과 : 금속판에 빛을 쪼이면 전자가 나오는 현상

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빛알 이론"은 "양자론의 기초"가 됐다. 이미 19세기 말,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공간 속에서 펴져 나가는 "전자기파"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빛을 단순히 "전자기파"로 본다면, "냉광이나 광전 효과"를 설명할 수 없었다. 빛이 "파동"이라면, "진동수ㆍ파장"을 가질 것이다.  • 진동수 : 파동이 1초 동안 위아래로 진동하는 횟수           파장 : 파동의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의 거리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ㆍ1879~1955)은 "빛이 파동이긴 하지만, 그 에너지가 일정한 단위로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바로 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빛알 이론"으로, "양자"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빛 알"은 "빛 양자ㆍ광양자(光量子)ㆍ광자(光子)"라고 부른다. 이 이론은 쉽게 말해, 빛의 에너지는 "실수"가 아니라, "자연수"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건을 살 때, 100원짜리 동전으로만 살 수 있어, 1,000원짜리 물건을 사는데 100원 동전 10개를 내는 것과 같다.  여기서 동전 하나를 "양자"로 볼 수 있으며, 빛의 경우에는 "빛 양자ㆍ빛 알"이 된다.

"빛의 에너지"를 "빛알의 개수"로 바꿔서 따지게 되면, 그동안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빛과 관련된 많은 현상들을 설명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제안은 매우 혁명적이었지만, 이미 1900년, 스승이었던 "막스 플랑크(독일ㆍ1858~1947)"가 "흑체복사"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빛알 이론"과 직접 통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플랑크의 복사 법칙"이라 불리는 이 법칙을 설명하면서, 그는 최초로 "양자의 개념"을 주장했고, 이는 "양자역학"의 토대가 된다.

1913년에는 "닐스 보어(덴마크ㆍ1885~1962)"가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이것은 "어니스트 러더퍼드(영국ㆍ1871~1937)"가 1911년에 제안한 모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러더퍼드의 모형"은 마치 태양계처럼 한가운데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들"이 궤도를 이루면서 회전하는 모형이었다. "보어"는 이 원자 모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궤도가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떨어진 몇 개의 궤도만 허용 가능하다"고 가정해야 함을 주장했다.

 1920년대 혁명, 진정한 "양자역학" 탄생

학자들은 이와 같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특정의 "양자"가 몇 개 있는지 세는 식으로, 새롭게 "힘과 운동의 관계"를 밝히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20년대에 들어와 난관에 부딪혔다. 기초적인 아이디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들이 속속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 이론"은 "제이만(네덜란드ㆍ1865~1943)"이 발견한 현상이나, "오토 슈테른(독일ㆍ1888~1969)ㆍ발터 게를라흐(독일ㆍ1889~1979)"가 발견한 현상은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 "수소" 다음으로 간단한 원자인 "헬륨"의 원자 모형도 난항이었다. 당시에는 물리학에서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에너지 보존법칙"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후 물리학자들의 계속된 연구 결과, "양자역학"은 초기의 "양자 가설"을 기본으로 삼아 전혀 새로운 역학으로 탄생했다.  1925년 무렵부터, 독일의 "막스 보른ㆍ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ㆍ파울리(1900~1958)ㆍ파스쿠알 요르단(1902~1980)" 등이 행렬이라 부르는 수학 기법을 이용해, 기존의 역학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역학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그동안의 어려움을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 역학을 "행렬 역학"이라 불렀다. 그 뒤, "에르빈 슈뢰딩거(오스트리아1887~1961)"가 새로운 방정식과 더불어 "파동역학"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역학을 제안했다.

"행렬역학ㆍ파동역학" 모두 그동안 난관에 부딪혔던 현상들을 아주 탁월하게 설명해냈다. 여기에 "폴 디랙(영국ㆍ1902~1984)"이 제안한 새로운 이론이 덧붙여졌다. 결국 이 3가지(행렬역학ㆍ파동역학ㆍ폴 디랙 이론) 모두 같은 역학 이론임이 밝혀졌고, "막스 보른"은 이 새로운 역학에 "양자역학"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파동함수ㆍ불확정성 원리 등장(하이젠베르크): 앎의 한계 지적

"양자역학"이라는 새 이론은 원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었다. 학자들은 이 이론을 토대로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새로운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새로 꺼내기 시작했다. "원자"와 관련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은 "파동함수ㆍ상태함수"라고도 하는 수학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 파동함수 : 어떤 계의 상태나 정보를 담고 있는 함수)

"양자역학"이 제안된 초창기부터 많은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전까지 물리학에서는 대체로 수학을 이용해 방정식이나 공식을 만들면, 그 의미를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방정식이나 공식에 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는 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 안에 소위 "불확정성 원리"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 불확정성 원리 : 양자역학에서 2개의 관측 가능량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   즉,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원리

실용적으로 물리현상을 아주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 있는데, 정작 그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보다 불과 100여 년 전에 "피에르 라플라스(프랑스ㆍ1749~1827)"는 물리학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파동함수ㆍ불확정성 원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가 원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 개념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 상보성 원리 : 미시적 세계의 현상을 기술하는 데는 파동과 입자 같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짝을 함께 사용한다는 원리

 보어 : "상보성 개념" 주장

"코펜하겐(덴마크 수도)"에서 "보어ㆍ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양자역학"의 표준적인 해석을 체계화하려 애쓴 것은 이러한 인식론적 위기상황 때문이었다. 이를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라 부른다.

1927.09월, 연속 전류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전지를 처음으로 개발한 "알레산드로 볼타(1745~1827)"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이탈리아 코모"에서 학술회의가 열렸다. "보어"는 "양자 가설과 원자이론의 최근 전개"라는 강연에서, "상보성 개념에 기초를 둔 양자역학의 해석"을 제안했다. 그 뒤 열린 "브뤼셀 솔베이 회의"에서 "양자역학"의 기초에 관한 논쟁은 매우 뜨거웠다. "보어"는 이 논쟁에서 자신이 "코모 강연"에서 주장했던 "상보성 개념"에 기초를 둔 "양자역학의 해석"을 당시의 물리학자들이 받아들이게끔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코펜하겐 해석"은 대략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자계의 상태는 파동함수로부터 결정되며, 파동함수의 절댓값 제곱은 측정값에 대한 확률밀도함수이다.          모든 물리량은 관측 가능량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특히 서로 양립하지 않는 물리량들(예를 들어 위치와 운동량)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동시에 원하는 임의의 정확도로 측정값을 정할 수 없다.          양자계는 파동으로써의 속성과 입자로써의 속성을 상보적으로 가지며, 이러한 상보성은 모든 물리적 대상에서 발견된다.           측정의 순간에 "파동함수의 오그라듦"이라는 불연속성과 양자도약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사고실험과 관련해 양자계는 근원적으로 비분리성 또는 비국소성을 갖는다.

1964년, "리처드 파인만(미국ㆍ1918~1988)"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 때까지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는 악명 높은 문제였다.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벌어졌던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을 필두로, 다양한 대안적 해석들이 제안됐는데, 대표적으로 "앙상블 해석ㆍ다세계 해석ㆍ결풀림 해석ㆍ양상 해석ㆍ인과적 해석ㆍ서울 해석" 등이 있다. 아직까지도 통일된 해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해석들 사이에 점점 더 많은 동의와 의견일치가 이루어져가고 있다.

 나노기술ㆍ양자계산 : 양자역학의 계속되는 혁명

"양자역학"은 1920년대의 혁명으로 시작됐지만, 그 혁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양자역학"을 "특수상대성이론"과 접목시킨 "양자장이론"이 "기본입자에 대한 이론"으로 확립됐고, 21C의 첨단기술로 불리는 "나노기술"도 그 근간에는 "양자역학"의 새로운 혁신들이 깔려 있다. 특히 "양자계산"의 개념과 이론적인 논의를 토대로 "양자컴퓨터"를 실험적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양자역학"은 이제 명실 공히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 돼 있다. 이를 통해 "반도체ㆍ초전도체"의 기본 메커니즘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나노기술ㆍ양자계산" 등과 같이 새로운 방향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인식론"과 같은 철학 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이제 "양자역학"은 문학ㆍ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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