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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ㆍ2차 세계 대전ㆍ독일ㆍ일본

인물 : 마타 하리(1876~1917)ㆍ새벽의 눈동자ㆍ2중간첩ㆍ나체 무용가

by 당대 제일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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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 하리 (Mata Hari새벽의 눈동자1876~191739)"는 국제적인 매춘부ㆍ"1차 세계대전" 중, "첩자 혐의"로 "프랑스"에서 처형된 "네덜란드" 출신의 무용가이다. 마타하리 : "태양" (글자 그대로는 "새벽의 눈동자")을 뜻하는 "말레이 어"이고,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 (Margaretha Geertruida Zelle)"의 가명이다.

 

1. 마타 하리 (Mata Hariㆍ새벽의 눈동자ㆍ1876~ 1917ㆍ향년 39세)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리며, 평생 동안 많은 애인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장교"였다. 동양적인 외모에 아주 매력적이며, "동인도"의 춤을 어느 정도 출 줄 알았고, 대중 앞에서도 기꺼이 "스트립쇼 공연(나체 출연)"을 했던 그녀는 "파리(물랭루즈)"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출 생 : 네덜란드 레바르덴            사 망 : 뱅센 (프랑스 파리 근처)             사 인 : 총살 (2중 간첩죄ㆍ8가지 간첩 혐의)             학 력 : 레이덴 교육대학             남 편 : 1895(19)~1904?(28) 캠벨 매클라우드 대위 (스코틀랜드 출신 장교네덜란드 식민지군 소속)

"풍만한 금발 미녀"가 아니라, 키가 크고, 몸매가 가냘프고, 피부색이 어두워서, "동양 미녀"의 모습에 가까웠다. 기본적인 생활 방식은, 무엇이든 "남성이 요구하는 일"을 해줌으로써, 불확실하지만 "상류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재능이 많고, 개성이 강한 여인이었으나, 당시 "프랑스인ㆍ독일인"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던 반감과 자신이 받고 있던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첫 결혼 후, 인도네시아 "자바ㆍ수마트라"에서 살다가 이혼한 그녀는 1905년(29세)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의 "직업 무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곧 "마타 하리"로 이름을 바꿨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프랑스"에서 총살당했다. 그녀가 벌인 첩보활동의 성격ㆍ범위는 아직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녀가 "이중첩자일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자, "프랑스"에서 1917년 체포했고,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독일ㆍ프랑스" 양쪽으로 버림받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고급 매춘부의 황금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인도네시아 자바"에서의 경험과 관능적인 안무를 이용해, 거의 옷을 입지 않은 채, "동양적인 춤"을 보여줌으로써 출세의 길을 개척했다.

그녀는 "독일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프랑스어ㆍ독일어ㆍ스페인어ㆍ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말하자면 "국제적인 매춘부"였다. 그녀는 "군복"에서 느껴지는 성적 매력에 약했다. 실제 그녀가 스파이였다는 점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기밀 해제된 "독일군"의 문서에서 그녀의 첩보활동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나왔는데, "그녀는 1915년에 독일군 스파이가 되었고, 쾰른에 머무르는 동안, 첩보 훈련을 받았으며, 뒤셀도르프로 보고서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스파이로서의 역량은 별로 없었는지, 실제로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거의 보내지 못했으며, 영국정보부 "MI5"의 문서에 의하면, "그녀가 독일에 넘긴 프랑스의 정보 중,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1건도 없었으며, 심지어 독일군에서는 그녀를 불발탄이라고 까지 불렀다"고 한다.

처형 당시, "사형대"에 묶이거나, "눈가리개"를 쓰는 것도 거부하고, 12명의 사수 앞에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섰다. 그리고 "자기 시신을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 그냥 인체 해부용으로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밝혀, 그대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마타 하리"는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여서인지, 미소를 지으면서, 군인들에게 "어서 쏴요. 그걸 계속 들고 있는 것도 힘들지 않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2. 생 애

"네덜란드"의 부유한 모자 상인의 딸로 태어나, "레이덴 교육대학"을 다녔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캠벨 매클라우드 대위"가 낸, "배우자를 구하는 광고"에 응해, 결혼했다. 1895년(19세), "캠벨 매클라우드 대위(스코틀랜드 출신 장교ㆍ네덜란드 식민지군 소속)"와 결혼했고 1897~1902년, 인도네시아 "자바ㆍ수마트라"에서 살았다. "유럽"으로 돌아온 후, 이혼한 그녀는 1905년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의 "직업 무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곧 "마타 하리"로 이름을 바꿨다. 남편이 "자바 섬"으로 발령받자, 당시 21살이던 그녀는 "말레이시아 어ㆍ춤"을 배웠다. "자바 섬" 친구들은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에서, 그녀에게 "마타 하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네덜란드"로 귀국한 "마타 하리"는 남편과 갈라섰고, "파리"로 거취를 옮긴 후, "물랭루즈(Moulin Rougeㆍ붉은 풍차)"에서, "스트립 댄스"를 시작했다. (물랭루즈 : 쇼 공연장ㆍ1900년부터 댄스홀로 사용ㆍ건물 앞에 있는 붉은 풍차 장식으로 유명 /  1890년대, "캉캉 춤"의 발생지는 아니지만, "프렌치 캉캉"으로 명성을 날렸고, 스트립쇼 공연도 했다.) 당시 "네덜란드 령"이었던 "인도네시아 자바인"과 "네덜란드 인"의 혼혈임을 내세우며, 선정적인 복장에 매혹적인 춤을 추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유럽 전역"으로 무대를 옮겼고, "고위층 간부들"과의 접촉이 잦았다. 그 과정에서 "매춘"을 통해, "프랑스 상류 사교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정보부"에서는 그녀에게 접근하여, 거금을 주기로 약속하고, "프랑스 군"의 정보를 빼내기로 계약을 한다. 당시 그녀가 출연하는 클럽은 "프랑스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사 외교계 고관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 "독일"측은 많은 기대를 했으나, 그다지 많은 정보를 수집하지는 못했다. 일부에서는 그녀를 통해, "독일"이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고작 "프랑스 고관들의 사생활에 관련한 정보뿐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에이스 파일럿인 "샤를 눈제서"등의 유명인과 염문이 나돌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반, "프랑스 정보부"에서도 그녀의 스파이 행동을 눈치 채고, 그녀에게 접근하여, 오히려 "독일" 측의 정보를 빼내 올, "2중 스파이"로 만들고, "독일 방첩기관장"에게 접근시켜 유혹하려는 목적으로 그녀를 "스페인"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 임무는, "독일" 측이 눈치를 채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독일"은 오히려 그녀에 대한 역정보를 "프랑스"에 흘려서, "프랑스" 측은 그녀가 여전히 "독일을 위해 일한다."고 판단하여, "반역 혐의"로 그녀를 체포하게 된다.

3. "독일 정보부"의 제안

1914.0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베를린"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단지 "댄서"로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애인들 중에는 "해군 장교ㆍ육군 장교ㆍ베를린 경찰서장"도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스파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마타 하리"는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부유한 "반 데어 카펠렌 남작"의 경제적인 후원을 받았지만,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지루하고 편치 못했다. 어느 날, "독일 영사 크라머"가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는 "프랑스 돈 2만 프랑"을 조건으로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알아 오라"는 제의를 수락했다(그녀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항상 주장했다).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배를 타고, 먼저 "영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그녀를 풀어주었다. "스페인"에서 그녀는 "독일의 권력자"들과 어울렸고, 어쩌면 "첩보원 H-21"로 임명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은 "파리"였다. 그녀는 당시의 1류 댄서인 "댜길레프"와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댜길레프(1872~1929ㆍ57세): 러시아의 미술 평론가ㆍ후원자ㆍ발레 흥행주ㆍ 많은 유명한 무용수ㆍ안무가들이 뒤에 명성을 얻게 된 "발레 루스의 설립자"이다)

"파리"에서 "정보원 국장 라두아"는 "마타 하리"에 관한 경고를 듣고, 그녀에게 "프랑스 편"에서의 스파이 활동을 제의했다. 그녀는 긍정적인 의사를 표하고, "프랑스 돈 100만 프랑"을 요구했다. (돈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지만, "라두아"는 그녀의 본성에 대한 의심을 굳혔다) 당시 그녀는 상당한 돈을 받고 있었고, 특히 "네덜란드"의 "반 데어 카펠렌 남작"에게서 받는 돈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엄격한 "프랑스 정보장교들"이 보기에 그 액수는 단순한 "정부"가 받기에는 지나치게 많아 보였다.

4. 첩보활동ㆍ사형 (총살)

"첩보활동"에 관한 사실들은 아직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한 자료에서는 그녀가 "헤이그"에 살고 있던 1916년 봄(38세), 한 "독일 영사"가 찾아와, "다음 프랑스 여행에서 그녀가 어떤 정보라도 얻어오면,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그녀는 몇몇 낡은 정보를 "독일군 정보장교에게 제공했다"는 것만 인정했다.

그녀는 그전에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스파이"로 활동하는 데, 동의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했고, 아울러 "프랑스 정보부"에 "독일"과 접촉했던 사실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나중에는 "연합군"을 위해, "독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며, "영국 컴벌랜드 공작" 작위의 상속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도움을 얻을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헤이그"에서 "마타 하리"와 독일군 장교가 접촉한 사실을 알린 것은 "영국" 쪽이었던 것 같다. "영국인"들은 그녀를 의심했는데, 명백히 "독일 간첩"이었던 다른 여자와 그녀를 혼동한 것도 부분적인 원인이었다.

그녀가 "이중첩자일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자, 1917.02.13일 아침, "프랑스"는 "파리 샹젤리제의 엘리베 팔라스 호텔"에서 그녀를 체포했다. 1917.02.13.~ 06.21일까지, "생 라자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그녀는 "고급 매춘부"에게 필요한 "사후 피임 용품"으로 "살 정자제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녔는데, 심문관은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라고 확신했다. 결코 전문적인 스파이가 아니었던 그녀는 터무니없이 부주의했다.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샘 와게나"는 그녀가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한다. 그녀가 "파리"에서 체포되었을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스파이"로 활동했다고 주장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했다.

"체포" 과정에서 "독일"로부터 받은 수표가 증거로 확보됨으로써, 결국 "프랑스"에서 열린 재판에서 "프랑스" 측은 그녀에게 연합국 병사 50,000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물론 그녀가 적군과 연루되었고, 적군으로부터 수당을 받았다는 증거는 확보되었지만, 어떠한 명목으로 받은 돈이었는지 밝혀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7.07.24.~ 25일 열린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군사위원회"는 증언을 바탕으로, 전직 스트립 댄서였던 그녀에게 "8가지 간첩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총살형"을 선고했다. 1917.10.15일, "파리 중심부"에서 "뱅센"의 군사지역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즉시 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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