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07월, "폐결핵"으로 결국, "애수의 소야곡"을 부른 가수 "남인수 (南仁樹ㆍ1918~1962ㆍ향년 44세)"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 (李蘭影ㆍ1916~1965ㆍ향년 49세)"의 무릎을 벤 채로 사망하게 되며, "이난영"은 더욱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
1. 이난영 (2살 연상ㆍ목포의 눈물)과 로맨스
광복 후에도 "이난영"은 가수로 활약하였는데, "한국 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직접 운영했다. 이 시절, 후배 가수였던 "남인수(2년 연하)"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을 챙겨주고 아껴주는 "남인수"의 모습에 반해서 "사실혼 관계"로 지낼 정도였지만,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갑자기 죽게 된다.
"이난영"은 원래 "김해송(작곡가)"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 1962년,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1962.07월, "폐결핵"으로 결국 "남인수"는 "이난영"의 무릎을 벤 채로 사망하게 되며, "이난영"은 더욱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
2. 김은하 (남인수의 부인)
"김은하"가 "남인수"와 이혼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로, "김용환(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의 3녀이다. "김은하"는 16세에 일본으로 가서 "아크로바틱"을 배웠다. 귀국 무대에서 대중 가수로 인기가도를 달리던 "남인수"를 만났고, 연애 끝에 결혼했다.
"김은하"는 무용의 길을 포기하고, 슬하에 4남매를 두고, 아내ㆍ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남인수"의 그늘에서 내조의 길을 걸었다. "남인수ㆍ이난영"의 불륜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어도 "김은하"는 묵묵히 가정을 지켰다. "이난영"과 동거하던 "남인수"는 임종 직전, "김은하"를 불러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자녀들을 잘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남인수"가 사망한 후, "김은하"는 재혼하지 않고, 4남매를 키웠으며(남인수 시망 시, 37세 정도), 5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3. 김해송 (이난영의 남편)
일제시대 당시 "일본"에 유학도 다녀왔으며, 그 시절에 음악을 했을 정도면 굉장히 부유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음악적인 재능에 훤칠한 키로 인해 주변에 여자가 끊이질 않았는데,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부인 "이난영"이 자택에 있는데도 외부 여인과 같이 들어와 잠을 자, "이난영"이 눈물로 밤을 지새웠으며 수시로 부인 "이난영"을 때렸다고 한다.
심지어 "이난영"은 소양강 댐에서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8.08.18일 당시, "KPK악극단"은 "춘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08.18일 밤 11시 경, "이난영"은 "소양강 백사장"에다 "나는 갑니다 김해송"이라는 말을 적어놓고는 강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였다. 마침 그곳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던 "소양로 파출소 박영훈 순경"이 "이난영"을 구출하였다고 한다. 당시 순경은 순찰을 돌던 중, 웬 여인이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강가에 와 있어서 누구냐고 물었으나,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고 그 여인이 곧장 강가에 뛰어들자, 헤엄을 쳐서 구출을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당시 신문에 의한 자살 동기는 "김해송"과의 의견 충돌로 사소한 언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김해송"은 같은 "KPK 악극단 단원"과 염문이 나 있었다. 대상은 "이난영"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로 공연을 몇 번 같이 하기도 했었으며, "이난영ㆍ김해송"이 "조선악극단"에서 "약초가극단"으로 옮길 때, 둘을 따라간 "조선악극단"의 멤버 중 1명이었던 "홍청 자"였다. 심지어 어떤 한 기사는 "김해송"의 부인이 "이난영"이 아닌 "홍청자"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4. 남인수 (南仁樹ㆍ1918~1962ㆍ향년 44세)
가수 (트로트)ㆍ이난영 (2살 연상ㆍ목포의 눈물)과 로맨스ㆍ1936~1962 활동 (26년)ㆍ애수의 소야곡 (1938)ㆍ약 10,000곡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ㆍ인생의 애달픔ㆍ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 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 출 생 : 경남 진주 • 사 망 : 서울 • 사 인 : 폐결핵 • 학 력 : 진주고등보통학교 중퇴
• 별 칭 : 원명 (原名) : 최창수(崔昌洙) • 개명 (改名) : 강문수 (姜文秀)
• 처 : 김은하 (1921)ㆍ김용환 (독립유공자ㆍ건국훈장 애족장)의 3녀 • 자 녀 : 4남매
• 대 표 : 애수의 소야곡(1938)ㆍ낙화유수(1942)ㆍ가거라 삼팔선(1947)ㆍ달도 하나 해도 하나(1949))ㆍ이별의 부산정거장(1954))ㆍ추억의 소야곡(1955))ㆍ산유화(1956)ㆍ무너진 사랑탑(1959)
원래는 "최창수"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로 바뀌었다.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 "남인수"이다. "최창도(남인수 형)"의 딸, 그러니까 남인수 조카가 되는 "최삼숙"은 북한의 인민배우로, 무대 공연 2600회를 한 인기 가수라고 한다.
가수 데뷔 전 경력 역시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는 설과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부로 올라왔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36년, "김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그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ㆍ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ㆍ고복수ㆍ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 강점기 말기, "백년설ㆍ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ㆍ아들의 혈서"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군국 일제"에 의해 취입하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남인수"를 "백년설"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대중 가수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
5. 이난영 (李蘭影ㆍ1916~1965ㆍ향년 49세)
가수 (트로트)ㆍ1936~1962 활동 (26년)ㆍ목포의 눈물/목포는 항구다/해조곡ㆍ"박시춘 (작곡가)ㆍ반야월 (진방남ㆍ작사가)"와 함께 "가요계의 3보(寶)"라고 불린다. 이난영의 자식들은 "미국"에서 "김 시스터즈ㆍ김 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했고, 1970년에는 내한공연도 했다.
1936년, 같은 가수로서 함께 노래했던 "김해송"과 결혼을 하게 된다ㆍ1939년, "박향림(오빠는 풍각쟁이)ㆍ장세정(연락선은 떠난다)ㆍ이화자(화류춘몽)" 등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한국 최초의 "걸 그룹"으로 꼽힌다.
• 출 생 : 전남 목포 • 사 망 : 서울 • 사 인 : 심장마비 (알코올ㆍ아편 중독 후유증)
• 별 칭 : 본명 : 이옥례(李玉禮)ㆍ호적명 : 이옥순(李玉順)
• 남 편 : 김해송(1910~1950?)ㆍ가수 겸 대중음악 작곡가 • 자 녀 : 4남 3녀
• 대 표 : 목포의 눈물(1935)ㆍ해조곡(1937)ㆍ다방의 푸른 꿈(1939)ㆍ울어라 문풍지(1940)ㆍ목포는 항구다(1942)
1916년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인 "이봉룡"과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16세 때, "제주도"에서 "삼천가극단"의 순회 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다니게 됐다. "삼천가극단"이 일본에서 순회 공연을 할 때, "작사가 강사랑"이 "이난영"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에게 추천해서, 1932년에 "고적(문호월의 곡)"을 처음으로 취입했다.
1934년,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히트를 쳐서 가요계의 스타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1936년, 21세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목포는 항구다ㆍ다방의 푸른 꿈" 등으로 당대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유명인이 되었다.
해방 후,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극단" 등에서 활동했으며, 6ㆍ25로 "김해송"이 납북된 후로는 자식ㆍ조카들을 혹독히 연습을 시켰으며, 각각 "김시스터즈ㆍ김보이즈"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같은 가수였던 "남인수"와 사랑이 싹트는데, "남인수"의 폐결핵으로 사랑은 얼마 가지 못하였으며, 2~3년이 지난 1965년 서거하셨다.
자신의 젊었을 적 분신ㆍ복제품 수준이라는 "이봉룡 선생의 자식"과 함께 모아 "김 시스터즈"라는 3인조 "재즈 걸 그룹"을 만들고 이들을 음악적으로 훈련시키는데, 상당한 공을 들여 결국 성공시킨다. 이후,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였다. 1965년, "알코올ㆍ아편 중독의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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