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 (金芝美ㆍ김명자ㆍ1940~)"는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린다. 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에는 "최은희"와, 60년대 후반에는 "남정임ㆍ윤정희ㆍ문희" 등의 후배 트로이카와 경쟁을 했다. 60년대 후반, "최은희ㆍ엄앵란ㆍ문정숙" 등의 기존 여배우들이 2진으로 물러났으나, "김지미"만이 살아남아 60년대 트로이카와 경쟁을 한 것이다.
◆ 김지미 (金芝美ㆍ김명자ㆍ1940~ ㆍ충남 대덕군 북면ㆍ160cmㆍ1남2녀)
데뷔 : 황혼열차 (1957ㆍ김기영 감독)ㆍ덕성여고ㆍ "나훈아"와는 "사실혼" 관계였으므로, 법적 결혼은 총 3번이었고, 이혼 역시 3번 했다.
2003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4번 결혼ㆍ이혼을 회고하며, "나이 많은 남자, 어린 남자ㆍ능력 있는 남자ㆍ다 살아봤는데 남자는 별거 아니더라. 4번 결혼해본 자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남자는 다 어린애고,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그렇지만 함께 자녀를 낳아 길렀던 "최무룡"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1. 감독 홍성기 (洪性麒ㆍ1924~2001ㆍ충북ㆍ16살 연상ㆍ김지미 21살ㆍ1961~1962ㆍ1녀) 영화계 꽃 "김지미". 그 꽃을 피어나게 했던 장본인은 "홍성기"였다.
"홍성기"가 1957년 "황혼열차"로 영화계에 데뷔한 무명의 "김지미"를 처음 발견한 것은 1960년 "홍 감독"의 전성기로 "홍성기 프로덕션" 이라는 영화사를 차려, "실락원의 별"을 제작감독하고 있을 때였다. "이상철(제작 부장)"이 "김지미"를 데려왔다. 이 영화에서 여대생 단역으로 커트 출연시켰다. 그것이 명장 "홍성기"와 신성 "김지미"의 만남이었다. "1961년 초였어요. 다음 작품 "별아 내 가슴에"를 연출하면서 김지미를 주연으로 픽업했어요. 국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170,000 관객을 동원해 그 당시까지는 최고 감격 관객을 동원이었지요. 김지미도 하루아침에 스타 됐고요"
"홍 감독"은 김지미와 1961년 여름 "별은 창 너머로"를 촬영하면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다 결혼 1년 뒤인 1962.09월에 헤어졌다.
"홍 감독"이 홍콩에 로케이션을 갔을 때, 서울에서 "김지미ㆍ최무룡"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두 사람은 갈라서고 말았다. "최무룡 사건"이 있기 전,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이상기류가 형성 되고 있었다. 내외가 별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에 충실치 못했던 나에게 허물이 있었다. 의욕을 살려 벅찬 일을 해 나가자니 외국 여행도 있고 해서, 자연 가정을 등한히 하게 되고. 나는 내 처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는 이 "별거"가 세상에서 생각하듯이, 이혼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반성하기 위한 냉각기를 갖기 위해, "자신이 먼저 제의 했다"고 얘기했다.
이에 대해 "김지미"는 "내 성격상 쾌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분은 달라요. 마음이야 천하의 둘도 없이 좋은 분이지요. 그러나 함께 있는 시간이 1달 가야 2~3일. 게다가 온종일 가야 댓 마디 말을 할까 말까 해요. 그이와 내가 바뀌었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본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김지미"는 "합의 이혼"이라는 말의 힘을 주면서, "홍 감독"이 요청하면 출연할 용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7년 후, "김지미"는 "홍 감독"의 "너와 내가 아픔을 같이 했을 때"에 담담하게 출연했다.
영화 제작 편수 79편을 기록한 1961년 영화계 가장 큰 화제는 "김지미ㆍ최은희" 대결이었다. 이는 영화감독 "홍성기ㆍ신상옥"의 대결이기도 했다.
"홍성기"는 아내이자, 톱스타 "김지미"를 "춘향"으로 하여, "컬러 영화 춘향전"을 만들었고, "신상옥" 역시 톱스타 "최은희"를 "춘향"으로 내세운 "컬러 영화 성춘향"을 만들어, 설날 흥행적으로 맞대결을 벌인 것이다. 이 맞대결은 배급사인 지방흥행업자 "춘향전ㆍ성춘향"으로 나뉘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개봉 전에는 "홍성기ㆍ김지미"의 "춘향전"이 지방흥행업자의 관심을 더 끌었으나, 개봉이 되고 난 후 75일간 360,000명의 관객을 동원한 "신상옥ㆍ최은희"의 "성춘향"이 완승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성춘향"의 완승에는 "방자(허장강)ㆍ향단(도금봉)"의 연기 덕이 컸다는 평가도 나왔다.
2. 배우 최무룡 (崔戊龍ㆍ1928~1999ㆍ파주ㆍ12살 연상ㆍ김지미 22살ㆍ1962~1969ㆍ1남1녀) "홍성기"와 결혼한 "김지미"는 "홍콩"에 합작 영화를 촬영하러 갔다가, "최무룡"과 만남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록 허드슨 "최무룡", 자유세계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아리따운 미모의 여배우 "김지미"라고 "타임지"까지 오르내린 스캔들은 "김지미"에게 한 여자로서 성숙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한편 "다시는 영화인과 결혼하지 않겠다."던 "김지미"는 1962.11.31일 동료 배우 "최무룡"과 함께 간통죄로 구속되었다. 수갑을 찬 두 사람의 행복해 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가 되었다. "검찰 신문"에서 두 스타는 간통한 사실은 솔직히 시인하는 대신, 원고인 "강효실"이 간통의 정을 알고, "금전으로 해결하려 때문에, 이에 양해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검찰"은 두 피고소인으로부터 간통한 사실 시인이 대한 자백을 받은 후, 처음 정을 통할 때 쌍방이 각각 배우자가 있는 몸이었다는 점을 중시해, 두 스타를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구속된 지 꼭 1주일 만에, "강효실"이 그때 돈으로 위자료 330만원과 자기가 진 부채 78만원을 판상 받는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 1962.12.07일 밤 10시, 10:30분에 "김지미ㆍ최무룡"이 각각 "서울 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인 400만원(위자료 330만 + 채무 70만)을 지급하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당시 400만원은 이루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액이었다.
심지어 6년 뒤, "최무룡"과 이혼할 때도 "김지미"가 "이혼 위자료"를 전부 부담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 혼자, 그 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기가 힘든 시대였고, 통상적으로 "이혼 위자료"를 남성이 다 책임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김지미"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지미"는 석방 후, "영화인들에게 줄기차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을 대로 다 맞고, 이제는 찬연히 빛나는 태양의 빛을 받아야겠습니다. 나에게 또 다시 먹구름이 가리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최무룡"은 "효실이는 나에게 쇠사슬을 채워주고, 지미는 결국 풀어준 셈입니다. 김양의 집을 저당함으로써, 위자료 문제를 해결하고 출감했습니다. 지미에게 물심양면으로 빚을 져서 이젠 우리 두 사람의 사이는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있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참고로, 간통 당시 "최무룡"은 3명의 딸과 100일 무렵의 "최민수"를 둔 상태였고, "김지미"는 딸 1명을 두었었다. 잠시 "최민수"를 맡아 기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최민수"는 성장한 후에도 어머니처럼 모셨다고 한다. 아버지와 "김지미"의 관계로 인해, 부모가 이혼했고, 이후 대부분을 친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도 대외적으로 "김지미"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원망을 보인 적은 없다. "최민수" 본인이 말하기를,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원망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흥행" 실패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69.02월, 7년 가까운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한다. (이혼한 후에도 영화에서 부부로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의 관계는 유지했다)
"최무룡"은 제작감독 등 "영화 흥행" 실패로 늘어나는 부채 때문에, "김지미"에게 더 많은 부담을 주지 않고, 또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이혼을 결심했다"고 폭탄선언 했다.
"최무룡"은 "배우ㆍ감독ㆍ제작자"까지 15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나, 흥행실패 등에 등으로 3,000만원 정도의 부채가 있어, "지미는 우리 영화계의 재산이다. 그게 남편으로써 더 피해를 강요할 수 없지 않은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불후의 명언을 남기고, "김지미" 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1녀가 있었으나, 아들(1964~1966)은 화상을 입고 숨졌고, 딸 "밍크(최영숙ㆍ 1968~)"이 있다. 1976년 "최무룡"은 "영화사 등록"이 실패하고, 몇몇 나이트클럽 쇼에 출연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김지미ㆍ나훈아 결합 발표"에 충격을 받아, 얼마 뒤인 9월 재미교포 위문공연 명목으로 외국 여행길에 나섰다. "주디 김"과 결혼해, "영주권"을 얻은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이트클럽을 경영하는 등 새로운 인생을 펼치게 되는데, 서로의 견해 차이로 그들은 1년 후에 헤어지게 된다.
3. 가수 나훈아 (羅勳兒ㆍ최홍기ㆍ1947~ ㆍ부산ㆍ7살 연하ㆍ김지미 36살ㆍ사실혼관계ㆍ1976~ 1982) : 활동(1966~)ㆍ배우자(이숙희(이혼)ㆍ김지미(결별)ㆍ정수경(이혼))ㆍ자녀(1남 1녀) "혼인 신고"는 한 적이 없고, 1976~ 1982년까지 동거를 한 것으로, "사실혼 관계"였다. 두 사람의 교제 기간은 6년이다. 연예계에선 2번째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었다. "나훈아 팬"들은 "김지미"에 대한 악감정이 큰 편이다.
1973.07월, "나훈아"는 돌연 "공군"에 자원입대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다가 1976.02월, "공군 복무" 중에 "이숙희(1째 부인)"과 성격 차이를 내세워 헤어졌다. 원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같이 다니는 사이일 뿐이었으나, 언론의 오해로 "교제 중"이라고 보도가 나고, 이에 "김지미"는 오기가 생겨, 정말로 교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지미"가 "나훈아"의 재능을 크게 사서, "예절ㆍ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 덕분에 현재도 "나훈아"는 "서예"에 능하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 평했다.
"김지미ㆍ나훈아"의 혼인이후, 화목했던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원래 둘은 평범하게 식당을 경영하면서 살고 싶어 했지만, "나훈아"가 가수로 복귀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2013년, "아궁이(MBN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홍택 교수(연예기자 1호)에" 의하면, "김지미는 내가 나훈아를 만난 것은 잘못인 것 같다"고 후회 했었다고 전한다. 훗날 "김지미"는 "내가 한 결혼은 3번뿐이다"며, "나훈아와의 동거"를 후회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게 되는데, 원인은 자신의 딸로 인한 "말 못할 아픔"이라 한다.
"우리는 지난 1972.02월 시민회관에서 가진 스타와의 밤 공연을 계기로 인사를 나누었고, 그 뒤 자주 만나면서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게 됐습니다."
1976.07.09일, 36살의 "김지미"는 7살 연하의 "나훈아"를 만나, 전격 결혼을 선언한다. "서울 외교부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두 사람은 기습적인 발표를 한다. "김지미"는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 위해, "나훈아"와 함께 일체의 연예활동을 포기한 채, "충남 신탄진"으로 낙향 하고 만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김지미ㆍ나훈아"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들이 "은둔 생활"을 결심한 것은 "김지미" 못지않게 "나훈아의 여성편력"도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고, 또 12월에는 "은퇴할 것"이라고 했었다.
"김지미ㆍ나훈아 부부에게 신상에 변화가 일고 있다." 1982년에 들어, 연예가에 퍼지기 시작한 "대형 스캔들 1호"였다. 이런 소문을 확인시켜 주듯, 두 사람은 가요계 컴백을 주장하는 "나훈아"와 이를 반대로 맞선 "김지미" 아집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결혼식 없이 6년 동안 동거해온 생활에 1982.01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당시 "나훈아"는 "김지미와 만나 배운 것도 많다. 헤어지는 이 순간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했고, "김지미"는 "연하의 남편이 다시 연예계 나가는 것이 몹시 불안하고 못마땅했다. 정말 좋아했는데 이렇게 됐다"고 착잡하게 말했다.
1982.01.05.일 이혼하였고, 당시 "나훈아"는 이 한 마디를 남기면서, 자신의 전 재산인 수천만 원을 "위자료"로 "김지미"에게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나훈아의 군자다운 면모가 보이는 일화) "남자는 돈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연상의 "김지미"와 헤어진 지 1년 만에, "일본"에서 가수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미모의 "정수경"과 동거해 아들을 얻게 된다. 1년 동안 "비밀 동거" 끝에 마침내 자식을 두게 된 것이었다.
4. 박사 이종구 (1932~ㆍ8살 연상ㆍ김지미 51살ㆍ사실혼 관계ㆍ1991~ 2002ㆍ심장 질환의 전문의) 보스기질 있는 자신의 성격에는 "주부가 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결혼 11년 뒤에 이혼한다.
1991년, "이종구 박사"와 결혼한다. "나훈아"와의 만남에서 힘들어 했던 "김지미"는 "이종구"와 만남에서는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변화를 원했지만,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훗날 한다. "신성일"의 회고에 의하면, "신성일"은 "김지미"와도 친했고, "이종구"와도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종구가 김지미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신성일"은 "형님, 4번째 남편이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하며, 만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구"는 "신성일"의 말을 듣지 않고, "김지미"와 결혼을 하였다. 바람을 피던 "신성일"의 충고를 들을 리가 없었고, 이로 인해 "김지미ㆍ신성일" 사이도 멀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연쇄살인ㆍ조폭ㆍ기생ㆍ연예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예인 : 남인수 (1918~1962)ㆍ이난영 (1916~1965)의 로맨스 (0) | 2022.09.09 |
---|---|
연예인 : 남진 (1945~)ㆍ나훈아 (1947 (1951?)~) 비교 (0) | 2022.09.09 |
연예인 : 정윤희 (丁允姬ㆍ1954ㆍ1970~1984 활동) (0) | 2022.09.08 |
연예인 :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 (장미희ㆍ유지인ㆍ정윤희) (2) | 2022.09.08 |
술 (酒) : 향토주 (지역별)- 2 : 경상ㆍ강원ㆍ충청 (2) | 2022.09.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