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丁允姬ㆍ1954ㆍ1970~1984 활동)"는 "단군" 이래 한국 최고의 미녀로, "유지인 (兪知仁ㆍ1956)ㆍ장미희 (張美姬ㆍ1958)와 함께, 여배우 (영화계) "트로이카 (2세대)"를 형성했다.
1. 정윤희 (丁允姬ㆍ1954ㆍ1970~1984ㆍ경남 통영ㆍ1남ㆍ조규영(중앙건설ㆍ1946)
단군 이래, 한국 최고의 미녀ㆍ158cmㆍ48kg ㆍ배우자 : 조규영 (중앙건설ㆍ1946)ㆍ1남 (사망)ㆍ"정윤희"는 "긴 생머리"로 활약한 적이 없다. 아무리 길어도 어깨머리가 끝이고, 상당 기간을 "단발머리"로 활동했다.
• 장미희 (張美姬) : 1958ㆍ1976~ ㆍ서울ㆍ명지대 석사ㆍ167cmㆍ미혼ㆍ본명- 장미정(張美貞)
• 유지인 (兪知仁) : 1956ㆍ1973~ ㆍ부산ㆍ중대 석사(2호)ㆍ160cmㆍ2녀ㆍ본명- 이윤희(李允熙)
• 같이 열연한 주요 남자 배우 : 신성일ㆍ하명중ㆍ한진희
"정윤희"는 활동 당시에 별의 별 소문이 다 떠돌았는데, "백치미 여성ㆍ술집여자 역을 자주 맡았다는 점"과 워낙에 3명 중에서 외모가 출중했던 이유로 단순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건 "술집 여자설ㆍ중졸설“이었다. 고등학교를 안마치고 술집을 전전하다 연예계로 데뷔했다는 설이다. 심지어는 "숨긴 자식이 있다"는 루머에 휩싸이며 살았다. 당시 "정윤희"의 사생활을 캐려고 기자들이 목욕탕까지 따라왔다고 할 정도였다."성룡이 정윤희와 연인 관계"라고 "홍콩" 신문들이 난리가 났었는데, 이에 "정윤희"는 "성룡"과는 딱 2번 만남뿐이었다고 해명했다.
2. 우월한 몸매
① 일본 방문 시 : 그녀가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영화인"한 사람이 "일본 일류 여배우 100명을 합쳐도 정윤희의 매력엔 못 당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② 원로 카메라맨 : "여배우는 어디 한 군데쯤은 흠이 있는데, 정윤희는 아무데나 갖다 놓아도 화면에 완벽하게 나온다."고 칭찬했다.
③ 김호선 감독 (1941) : 영자의 전성시대ㆍ겨울여자ㆍ사의 찬미
알맞은 키, 360도 회전해 봐도 고르고 알맞게 살찐 여자. 어쩌면 작은 몸매에 그토록 알맞은 몸의 균형을 가지고 있을까? 대바구니에 담아도 담겨질 것 같은, 주머니에 넣어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않을 것만 같은 새 같은 여자다. 윤기 흐르는 까무잡잡한 피부는 블랙 올페의 연인을 연상케 하고 가늘고 긴 목과 작은 어깨는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작은 공간에서는 한없이 작아 보이고 큰 공간에서는 한없이 커 보이는 여자
④ "정윤희"와 유년기를 보낸 친구의 회고 ("혜화여고" 시절,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 부산의 어느 빵집. 당시는 고교생들의 빵집 미팅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까까머리 남 고생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우리학교 친구들과 함께 "혜화여고" 여학생들과의 단체 미팅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지금처럼 남녀관계가 편하고 자유로운 시절이 아니라서, 수줍어하며, 긴장감에 연신 우유만 들이키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 눈을 놀라게 만드는 상황이 펼쳐졌다. 자리에 먼저 나온 여학생들은 인물이 그닥 아니어서, 친구들과 실망감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데 눈이 튀어나올만한 여학생 하나가 등장한 것. 그녀가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와 친구들은 전기에 감전된 듯 경악했다.
빵가게 주인과 다른 손님들 시선도 일제히 그 여학생에게로 쏠리며 놀라는 눈치였다. 그 때 "세상에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다니!" 하면서, 날 놀라게 만든 여학생이 바로 훗날 영화배우가 된 "정윤희", 당시 혜화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 당시 "정윤희"는 키는 작았지만, 유난히 작은 얼굴과 약간 까무잡잡하고, 탄력 넘치는 고운 피부를 지녔고,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유난히 큰 눈과 맑고 까만 눈동자 그리고, 속삭이는 듯 붉고 도톰한 앵두 같은 입술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늘에서 별이 내려와 앉는다."는 외국 시인의 구절이 문득 떠오른 순간, 얼굴도 얼굴이지만 각선미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 여자들은 "무다리"가 많았는데, "정윤희"는 교복치마 밑으로 곧게 뻗은 종아리를 지녔고, 내가 살면서 지금 현재까지 "정윤희"의 각선미를 능가하는 여자다리를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수십년 전 보았던 너무나도 예뻤던 단발머리 여고생 "정윤희"의 모습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하며,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여태 이 땅에서 본 경험이 없을 만큼 너무나도 황홀한 아름다움이었다.
3. 은퇴 : 정윤희 (1954) - 조규영 (1946(8살 차)ㆍ중앙건설 회장)ㆍ1남
1984년, "조규영(중앙건설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조 회장은 "유부남"이라 불륜인데, 당시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해서 처벌받았다. 그 이후(1984.12월), 조 회장이 전 부인과 갈라서고, "정윤희"와 재혼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조 회장은 이미 부인과 불화하여 별거하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라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83.04월부터 "정윤희"를 만나 왔다는 전처(대단한 집안의 딸임)의 주장과는 달리, 조 회장은 1983.10월 이후에야 "정윤희"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10월은 조 회장이 부인과 별거한 시점을 말한다. 즉, 결혼 생활 파탄은 "정윤희"와는 무관하다는 것. "정윤희" 또한 1983.12월에 상대 남성을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실제 "통정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원래 "간통죄"는 현장 증거가 있어야 "고소"가 가능하므로, 전 부인은 "정윤희" 집에 자신의 남편이 있는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제출하긴 했는데, 둘이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남녀 단 둘이 있는 현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가정부ㆍ매니저ㆍ조카ㆍ운전사)도 함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정윤희" 측에서는 "통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양육비를 조건으로 위자료를 더욱 많이 받아냈다"는 기사 내용과는 달리, 어찌된 일인지 전처 자녀들(1남1녀)를 "정윤희"가 길렀다. 당시 자녀들의 나이가 1~2세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처음부터 정윤희가 다 키웠다. 이 때문에 당시 주부층에서도 "정윤희"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 듯 했으나, 1993년 남편 회사 "중앙산업"의 가구 브랜드 "하이츠"의 TV광고 모델로 활동한 적 있다. 이때 전성기에서 10년 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미모를 자랑한다. 2011년, 친아들의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 정지 사망"으로 화제가 되어 뉴스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받았고, 언론의 추적을 받았다. 집안 사업도 어려워졌는지,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26억 상당에 경매에 붙여지고 현재는 경기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부모 때부터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낭비를 하지 않고, 내핍 생활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시어머니 수발도 지극정성으로 하고, 살림도 잘한다고 한다. 사치도 하고 돈도 잘 쓸 것 같은데 검소하기가 이를 데 없을 정도로 예쁘게 산다고 한다.
• 조규영 : 로맨틱한 자상함에 묻어나는 인간미에 "정윤희" 쪽에서 더욱 호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상당히 멋이 있는 사람으로 친구들 사이에는 "영국 신사"라고 불릴 정도로 매너 좋은 멋쟁이였다. 1984년 결혼 후에는 부부 사이에 일체의 잡음이 없이 잉꼬부부로 잘 살았다.
※ "하이츠" 브랜드로 알려진 "중앙건설"의 모태는 조회장의 부친 "조성철(1981년 별세)"가 1946년 설립한 "중앙산업"이다. 조 회장이 선친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중앙산업"은 1950년 "6ㆍ25전쟁" 이후, 복구 바람을 타고, 각종 건설공사를 수주해 1952~1954년 3년 연속 국내 건설업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하는 등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로 성장했다.
1958년, "서울 종암동"에 한국 최초의 APT를 건립했다. "조성철"은 "이병철"등과 한국 경제인 연합회를 창립한 경제계의 원로였다. 1977년, "중앙산업"이 공중분해 위기에 놓이자, 귀국해서 회사를 재건하여, 2000년대 중반에 "하이츠"라는 브랜드로 활발하게 APT를 공급했으나, 2010년 "워크아웃"에 이어 2014년 "기업회생 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갔다.
4. 다른 미녀 여배우들과의 비교 : "정윤희" 이전에는 "김지미"가 있었다.
"정윤희"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여배우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미녀 여배우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여배우이다. "정윤희" 이후에는 "원미경ㆍ황신혜ㆍ김희선ㆍ김태희ㆍ한가인ㆍ손예진ㆍ전지현"이 미녀 여배우의 뒤를 이었다.
1990년대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나 드라마에서만 성공한 미녀 여배우로는 "김희선ㆍ김태희ㆍ전지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에서는 죽을 쒔지만, "정윤희"는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둔 여배우이다. 거기다가 "김태희" 경우에는 전성기 시절에는 인기가 있는 여배우 중 하나의 위치밖에 오르지 못했고,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을 누를 정도의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다.
"정윤희"는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유지인ㆍ장미희"가 "정윤희"의 인기를 많이 위협했지만, "정윤희"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인기에서 이 둘을 크게 눌렀다. "임예진"은 단순하게 하이틴 영화에서의 활약만 두드려졌을 뿐, 외모 면에서도 "정윤희"와 비교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임예진"은 성인 이후 흥행작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정윤희"와 비교하기 민망하다.
이런 "정윤희"와 비교해서 외모와 인기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 여배우로는 "정윤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유지인"이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성적 면에서 "원미경"이 영화ㆍ드라마ㆍCF 모두에서 "정윤희"와 어느 정도 대결을 할 만 했다. 연기력으로 혹평을 받는 "한가인ㆍ김태희"와 더불어 "정윤희"도 이들 못지않은 부족한 연기력을 가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토속 물ㆍ호스티스 물ㆍ연애 물" 등 다양한 장르에 출연했으며, 부족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연으로 나온 출연작에서 성공을 거둔 적이 많다는 점에서 "김태희ㆍ전지현ㆍ김희선"은 "정윤희"와 비교하기 조금 민망한 면이 있다. 또한 "정윤희"는 데뷔 후, 꾸준히 노력을 한 덕분에 70년대 중반 이후부턴 노출연기를 직접 소화하는가 하면, "안개마을" 등의 수많은 작품에서 성우의 도움 없이 직접 목소리 연기를 하는 등 연기력에도 굉장한 성장을 보여, 70년대 말 이후에는 "발연기"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정윤희"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ㆍ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다. 공식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이기 때문에 애초에 "김희선ㆍ김태희"와 연기력으로 비교하는 건 큰 실례다.
5. 생 애
1954년생으로, "경남 충무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친구와 같이 대학 응시를 했다.
그러나 친구는 "S대 음대"에 붙었지만, "정윤희"는 떨어졌다. 그 친구에게 경쟁심을 가진 "정윤희"는 친구의 1년 후배가 되기 싫어 "미술"로 전공을 바꾸었다. 주로 "명동" 일대에서 활동하며, "서울 말씨"를 익혔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정윤희"는 "부산 미니스커트 충무시 의문의 1패"로 불리며, 그 일대에서 외모로 유명했다고 한다.
"미술"을 지망했던 "정윤희"였지만, 당시 생활비가 부족했고, 또 그녀의 외모가 전국구임을 알게 된 "정윤희"는 배우로 장래희망을 바꾼다. 그래서 그녀가 1번째로 응시한 영화가 1974년 최고 흥행 영화로 유명한 "별들의 고향". 그러나 배우 경험이 없던 "정윤희"였기에, 여주인공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정윤희" 대신 "안인숙(安仁淑ㆍ1952~ ㆍ1962~1975ㆍ중대 학사ㆍ2남1녀ㆍ박영일(대농그룹 부회장)"이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된다.
원래는 1974년 "바보들의 행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인 "욕망"은 흥행에 실패하며, 무명 여배우로 남나 싶었으나, 2번째 영화 출연 기회를 맞이한다. "김지미ㆍ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원래 신인 여배우 "강경희"가 맡기로 한 자리였으나, "강경희"가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어 그 자리에 "정윤희"가 대신 들어간 것이었다. 비록 "청춘극장"은 거하게 실패해 버렸지만, 이전의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ㆍ윤정희"가 맡았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지명도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동시기에 "해태제과 전속모델"이었던 "양정화"도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며, 계약이 파기 당하면서 "정윤희"가 이 "해태제과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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