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05.24일 발생한, "삼성의 왕자의 난ㆍ사카린 밀수 사건ㆍ국회오물투척 사건"은 막대한 정치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이 손잡고 벌인 일이었다.
1. 사카린 밀수사건ㆍ국회 오물투척 사건
막대한 정치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이 손잡고 벌인 일로, 1966.05.24일,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가 정부 정치자금과 관련해, 건설자재로 가장하여,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대량으로 밀수입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당시 "삼성"에서 "중앙일보"를 세우고, 언론계에 진출할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인데, 그래서 "사카린 사건"에 대한 경쟁 언론사(경향신문 등)의 공격이 따가웠던 것이다.
• 일 시 : 1966.05.24
• 결 과 : 한국비료 국가 헌납ㆍ삼성 이병철의 은퇴ㆍ국회 오물투척 사건 발생
• 파 문 : "박정희 정부"가 외친 구호가 "구악일소(부패척결)"이었는데, 사건으로 정권의 모순이 드러났다.
09.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 "이만섭 의원(민주공화당)ㆍ김대중 의원(민중당)"은 삼성 "이병철"을 구속해 "법정 최고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 순서인 "김두한 의원(무소속)"은 하얀 보자기로 싼 통을 들고 와서,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고 고함을 지른 뒤, "맛을 봐라"면서, 국무위원 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ㆍ장기영 부총리" 등 여러 명의 각료들을 향해, "인분(人糞ㆍ똥물)"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09.24일, "김두한"은 이 사건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국회의원 자격을 잃는다. 10.05일, "장준하(사상계 사장)"은 "민중당 대구 유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두목"으로 규탄했고, 이 발언의 책임을 물어, "장준하(10.26) "가 구속되었다,
"국회 인분투척사건" 직후, "정일권 내각"은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민복기(법무장관)ㆍ김정렴(재무장관)"이 해임되었으나, "정일권 총리"의 사표는 반려돼, 6년 7개월이라는 최장수 총리기록을 남겼다. 삼성은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으며, "이창희(이병철 2째 아들)"이 구속됐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쯔이 물산"으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200만$까지 들여왔는데, "미쯔이 물산"과의 "차관교섭ㆍ도입과정ㆍ조건협상"은 "이병철"이 직접 담당했고, 정부는 "지불보증"을 서는 것으로 지원했다. "요소플랜트"는 실제 3,500만$ 인 것이 4,390만$ 로 올라갔고, 차액 약 30억 엔은 "한ㆍ일 양국 정치인"들에게 제공되었다.
차관의 내용은 "비료 연 생산량 33만 톤ㆍ외자 4200만 $ㆍ이자율 연리 5.5%ㆍ2년 거치 8년 상환"이었다. 당시 이자율이 보통 6∼6.5%였음을 감안하면,이는 상당히 저리였기 때문에 "삼성특혜설"이 돌기도 했다.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다가 들통이 났다. "사카린 원료(OTSA)"를 비롯하여, 당시 금수품이었던 "양변기ㆍ냉장고ㆍ에어컨ㆍ전화기" 등을 건설자재로 속여 대량으로 밀수하고, 이것을 "암시장"에 되팔아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6월에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이 사건은 "한ㆍ일" 양국의 대재벌이 밀수를 간여했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① 김두한 의원(무소속)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국회 회의록)
② 하얀 보자기로 싼 통
통 안에는 "파고다 공원"에서 퍼 온 "인분"이 담겨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채원기(김두한 국회비서)"는 거사 전날 "김두한 의원" 집인 "서울 신문로" 주택 화장실에서, "김두한 의원ㆍ채원기 비서"가 코를 막으며 직접 푼 것으로 확인됐다.
③ 진행과정
1964년, 울산(100만 평)에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최초의 비료 민영회사) 공장 설립 (매출액이 삼성그룹 전체 매출액의 30%) → 이병철(한국비료 사장) "사카린이 한국보다 일본에서 매우 싸다. 관세를 내지 않고, 사카린을 밀수입해서 타 회사에 팔면, 엄청난 돈을 벌겠다" → 부산세관에 적발 (건설자재가 아니고, 사카린)→ 벌금 2천만 원 처벌→ 잠잠 → 4개월 뒤, 신문사 보도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 정부가 조사도 안했다" 삼성소유 중앙신문을 견제하기 위해, 경향신문 및 다른 신문사들은 은 1달 동안 대대적으로 보도 → 이병철 은퇴 기자회견
"저는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한국비료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 회사 경영에서 빠지겠습니다."
1째(이맹희ㆍ1931~2015ㆍ84세ㆍ도쿄 농대ㆍ미시건 주립대 박사)가 삼성을 승계한다. 1966.11월, 2째(이창희ㆍ1933~1991ㆍ58세ㆍ한국비료 상무ㆍ새한그룹 창립ㆍ와세다대 박사ㆍ1965년 귀국)에게 "자신 대신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갈 것"을 지시 → "이맹희"의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창업 공신들과 마찰이 심했고, 경영실적이 불량하여, 그룹전체가 위험 → 1968.02월, "이병철" 경영 복귀 : 대구대(현, 영남대)를 정부에 헌납하는 조건
"맹희야, 넌 이제 회사 운영할 생각은 하지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크게 좌절한 "이맹희"는 일본으로 잠시 떠났다가, 1975년 귀국하여, 겨울에는 사냥하고, 여름에는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야인생활을 시작 → "이창희"는 출감한 후, 아버지 대신 감옥을 갔다 왔으나, 아무런 보답이 없자,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한다. "아버지는 탈세도 많이 하고, 해외로 100만 $ 밀반출도 했다." → "박정희"는 탄원서를 보고, "이런 패륜아를 봤나, 위법사항을 떠나 아버지를 고발하다니, 이 탄원서는 못 받아들인다." 박정희는 이 사실을 "이병철"에게 통보
→ "이병철"은 "이창희"에게 "넌, 앞으로 삼성에 발들일 생각을 하지 마라."면서, "이창희"를 호적에서 파 버린다. → 그래서 3째에게 경영권이 넘어간다. "업무도 잘하고, 성실한 막내에게 삼성을 맡긴다." 1987년, "이병철" 사후부터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3째(이건희ㆍ1942~2020 ㆍ77세ㆍ와세다대 경제학과ㆍ조지 워싱턴 대 경영대학원 MBA)
2. 개 요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삼성그룹 계열사)"는 "일본 미쯔이 물산"에서 "상업차관"을 도입하여 "울산"에 "요소비료공장" 건설을 계획했다. 당시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이맹희(이병철의 장남)"의 회고에 의하면, 공장건설은 정권과의 합의사항이었는데, 즉, 1967년 "대선준비"에 대한 강박관념과 농촌인구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비료공장 건설"은 훌륭한 "홍보용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이병철"은
• 국민ㆍ정부ㆍ언론이 비료공장 건설을 지원할 것 • 정부가 책임지고, 10억 원의 은행 융자를 해줄 것 • 공장 건설에 필요한 인허가 등을 신속히 해줄 것 • 공장 건설과 관련하여 한 푼의 정치자금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3. 이맹희 (이병철 장남)의 회고
1993년 발간한 "회상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사카린 밀수를 현장 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ㆍ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싼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하였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 $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이맹희)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 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ㆍ냉장고ㆍ에어컨ㆍ전화기ㆍ스테인레스 판ㆍ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4. 결 과
문제는 "정부가 밀수행위를 묵인ㆍ방조ㆍ지원했다"는 의혹에 있었다. 정치자금을 매개로 "권력 상층부와 특정 기업이 거래했다"는 것이다.
후에 "니시지마 상무(사건 당시 미쯔이 한국담당자)"는 "상대측이 건설자재로 요구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미쯔이 물산으로서도 내자부족 등으로 한국 측이 공장이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필요할 수밖에 없는 행위로 생각했다"고 변명했다.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한 것은, "밀수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당시 "김정렴 재무부장관"이 나서서 "사건은 삼성계열의 한국비료와 무관하며, 한국비료 직원의 개인적 밀수"라고 주장했고, 이날 "한국 비료측도 동일하게 주장한 점"이다.
그러나 "밀수사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고조되자, 1966.09.19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검에 전면수사를 지시했고, 09.22일에는 삼성 "이병철"이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일체의 기업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병철"의 성명이 있던 날, "미쯔이 물산이 사실상 삼성이 밀수의 주체였음"을 확인해주는 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에서는 "사카린 원료(OTSA)"는 건설자재로 정식 수출계약된 것이며, 그 대금은 차관대금에서 결제했다는 것으로, 이 밀수사건이 "한국비료 일개 직원의 개인적 밀수가 아님"을 확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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