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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⑦ 최능진ㆍ혁명의용군사건 (1951.02)

by 당대 제일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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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능진 (崔能鎭ㆍ1899~1951ㆍ향년 51세)"은 해방 후, 친일파가 다수였던 경찰 중에서 이례적으로 "친일 청산"을 부르짖었으며,  "이승만"에 정면으로 대항하다가 끝내는 "혁명의용군사건"의 혐의를 쓰고, 친일헌병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김창룡(1920~1956ㆍ군ㆍ경ㆍ검 합동수사본부장)"의 손에 총살형을 당한다.   : 한국 경찰의 8할 이상이 친일파라면, 한국 백성의 8할 이상은 좌익이 된다.

 

1. 혁명의용군사건 (革命義勇軍事件)

1948.10.01일 "최능진ㆍ서세충ㆍ김진섭" 등이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한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정권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한 사건이다. 

1948.08.15일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고, 10.01일 "최능진 (崔能鎭ㆍ1899~1951ㆍ향년 51세)"은 "수도경찰청 형사대"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 연행된다. 씌워진 혐의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인민해방군 사건)"이었는데, "최능진"이 "서세충(독립운동가)ㆍ오동기(광복군 출신으로 14연대장 역임)" 등과 연계해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1949.05.31일, "최능진(징역 3년)ㆍ김진섭(징역 3년 6개월)ㆍ서세충(무죄)"가 선고되었다. 1949.11.02일, "최능진ㆍ김진섭"은 추가 피소되어, 2심에서 내란음모 및 정부계획 방해기도죄로 "최능진(징역 5년)·ㆍ진섭(징역 6년)"을 선고 받았다. 공범 중, 국군 소속에겐 1949.01.27일 "오동기(징역 10년)ㆍ안종옥(징역 5년)ㆍ박규일(징역 3년) ㆍ김봉수(징역 3년)ㆍ김용이(징역 2년)ㆍ오필주(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

그가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10.19일에 공교롭게도 "여순사건"이 터졌고, 그에게 이 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1951.02.11일 총살되기 전에 유서를 남겼는데, "금일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됐다.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 군인이 정치사상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악질적인 친일헌병 출신인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 김교식(방송작가)이 저술한 "죽음을 부른 권력(마당문고사·1984)"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재연해 본 것 >

1970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동양방송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 담당 방송작가로 마침 여순사건 부분을 집필하고 있던 김교식에게 한 노인이 찾아왔다. 그 노인은 때때로 긴 한숨을 내쉬며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조작입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만약 공산당이었거나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6.25 때 괴뢰군을 따라 북으로 가지 않고 나를 박해한 자들이 세도를 부리고 있는 이 땅에 남아 있을 리가 있습니까?  혁명의용군,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방송을 듣다가 여순사건 이야기가 나오기에 역사의 기록만은 사실대로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경위가 어쨌든 당시 상황에서 그는 "이승만" 일파가 파 놓은 정치 공작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1심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례적으로 2심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5년형을 선고 받는다.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다른 수형인들과 함께 출옥한 그는 곧바로 "김구·김규식" 계열 인사들과 접촉하는 한편, 북한과 남한 양측에 즉각 동족상잔의 전쟁을 중단할 것과 UN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누구도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09.28일 "서울 수복" 뒤, 납북될 것을 우려해서 숨어 지내는 한편, 한국 정객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당시 19세였던 장남 "최필립(전, 스웨덴 대사ㆍ전,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최능진은 "이승만ㆍ이기붕ㆍ조병옥"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일파 입장에서는 탈옥한 범죄자가 화해 운운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었다. 그 해 11월 그는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김창룡(군ㆍ경ㆍ검 합동수사본부장)"에 의해 구속됐다. 재판은 불공정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군사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

2. 최능진 (崔能鎭1899~1951향년 51)

일제강점기의 흥사단계 독립운동가ㆍ미군정기의 경무부 수사국장(경무부장 : 조병옥)반 이승만 운동 전개ㆍ중도우파 경찰공무원ㆍ통일운동가

•  출생 : 평남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  사망 :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동 (대구 수성구 파동)            •  사인 : 총살형

•  : 일석 (一石)

•  학 력 : 듀크대학 체육학과

•  큰 형 : 최능찬(1881~1932독립장): 평남 사천리에서 3ㆍ1운동 주모자로 붙잡혔다가, 고문후유증으로 사망

•  작은 형 : 최능현(1887~1933애족장): 형과 같이 잡혔다가 탈출윤봉길 의사와 폭탄제조실험 중, 폭발사고로 사망

•  : 이풍옥 (43세에 과부가 됨)5남매

•  자녀 : 1남 최필립 : 외교관박근혜 의전비서관(1974~1979)정수장학회 이사장(2005~2013) / 3남 최만립 : 1971년 이낙반도체 (, 대한마이크로전자) 창업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  손자 : 최우석 : 조선일보 기자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방우영 회장" 보좌

•  1946 : 경무부 수사국장 파면 

•  1948 : 이승만 당선무효 소청서재필 추대운동혁명의용군 사건  

•  1951 : 국방경비법 제32(이적죄) 위반 및 총살형

최능진

"도산 안창호(1878~1938)"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 참여하였고, "흥사단"에 가입한 그는 "사대주의적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독립운동 세력 내에서의 파벌주의와 분열주의 조장" "이승만"의 정치행태를 지켜보며 이때부터 "() 이승만 노선"을 견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37년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인 "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기독교·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8ㆍ15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치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9월께 월남한 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됐다. (경무부장 : 조병옥)

미국 유학을 오래하여 영어를 잘했고, 경찰 고위직에 오르고 나니까 눈앞에 친일파들이 밟혔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중해야 하는데"라면서, 친일경찰 청산에 나서게 된다결국 친일경찰들의 견제에 밀려 결국 파면됐고, "이승만"의 독주를 막기 위해 1948.05.10"제헌의회 선거"에서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도전장을 낸다.

선거가 시작되자, "최능진"의 독립운동 경력 등이 부각되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부각됐다고 한다. 그러자 돌연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그해 08.15일 정부 수립 이후 1달 반 만에 "국군 안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한국전쟁이 터진 뒤,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정전·평화 운동을 벌인 그는 결국 이 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조사한 방첩대(CIC)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김창룡"이 이끌고 있었다. 

3.  미국 유학ㆍ안창호의 흥사단 운동에 참여

1915, "평양 숭실 중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1917 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프링필드 대학과 듀크 대학 체육학과"에서 수학한 뒤 4년 만에 졸업한 그는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를 맡는 한편,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도 참여했다"흥사단"에 가입한 그는 "사대주의적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독립운동 세력 내에서의 파벌주의와 분열주의 조장" "이승만"의 정치행태를 지켜보며 이때부터 "() 이승만 노선"을 견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29(30) 귀국해, "평양숭실전문학교 체육과 교수"로 부임하고, 1937.06"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징역 2(구류 통산 190)형을 언도받았다공교롭게도 "조병옥" 또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감옥 동기였는데, 이들이 해방 이후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1945(47),광복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해 09.03일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 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2일 후 1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38선을 넘는데, 서울에서 정당 활동을 하겠다는 동기도 있었다.

4. 경찰 활동 (경무부 수사국장)

1945.09.15, 월남 도중 "해주"에 도착한 그는 동지들과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 읽다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남한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뛰어든 곳이 바로 "경찰계"였다능숙한 영어 솜씨를 활용해, "미군정"에 스스로 접촉해 얻어낸 첫 직장인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한 그는 곧바로 "해주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강습소에 남아 있던 일제 총독부 경찰 출신자들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일이었다." < 조덕송(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의 저서 "머나먼 여로- 언론외길 반세기의 증언(도서출판 다다1989) 2"에서 증언 친일경찰 청산을 몸소 실천에 옮긴 그는 약 1달 후 "미군정""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경무부 부장""이승만"과 밀착해 있던 "한국민주당"의 실세 중 한 명이자 옛 동지인 "조병옥"이 맡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승만한민당 일파"가 친일파 출신을 경찰계 요직에 등용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덕술""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최운하최연" 등 일제강점기에 악명이 높았던 친일경찰 간부들이 요직에 속속 중용된 것이다. 그는 곧바로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친일 전력" 족쇄 때문에라도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리라 기대하며 그들을 중용했던 "조병옥장택상"은 즉각 반발하였으며,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조병옥 : 일본경찰 출신이라고 모두 Pro-JAP(친일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Pro-JOB(전직)이었다.

장택상 : 경찰은 기술직이므로, 어쩔 수 없다.

친일경찰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논쟁을 벌이던 그와 "조병옥장택상"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6.10.01일부터 대구 일원에서 발생한 "대구 101 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10.07"대구지방 소요사태에 대한 경위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되어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했다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직접 현지로 내려가서 면밀하게 조사를 실시한 "최능진"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결국 그의 강력한 요구와 이를 수용한 "김규식"의 제안으로 "대구사건의 원인규명과 대책수립을 위한 한미공동회담"이 열렸다. 그는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직접 조사한 내용을 거침없이 증언했다

<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독립운동가 송남헌 선생(1914~2001)의 증언이다 "최능진 씨는 폭동을 일으킨 좌익을 철저히 다스려야 하지만, 그런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이 경찰 자체에도 내재해 있다고 진술했지요. 다시 말해서 일제강점기의 고등계 형사들이 광복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의 원성을 사고 있으니 그들을 숙청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동회담은 1달 동안 계속됐고, 공동결의문까지 작성해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전달했다이 결의안에 "최능진의 증언"이 대부분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12.05"하지 중장""친일파 출신을 조사해서 경찰에서 배제하거나 파면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한미공동회담"의 조선측 대표였던 "김규식" 등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책임을 물어, 그를 즉각 파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도 이 요구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병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최능진"이 그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병옥"은 "최능진""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유해한 인물"로 몰아서 사직을 강요했다그는 이를 거부하고 한동안 정상근무를 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조병옥"의 압력에 밀려 결국 12.05일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 조병옥 성명서"를 발표하며, "조병옥"을 정면으로 비판했는데, "귀하는 당연히 현직을 사퇴하여 3천만 민중 앞에 고두(叩頭) 사과하는 동시에, 속죄의 의미로서 8.15 이후 불의(不義) 취득한 재산을 전재(戰災) 동포를 위하여 제공한 후 광복 전의 애국자 조병옥으로 돌아가기를 충고한다." 이에 맞서 "조병옥장택상"도 최능진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이후 몇 차례 공개적인 성명전이 오가면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당시 "조병옥"의 인기가 바닥이었던지라 시민들은 최능진에게 절대적인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특히 최능진이 마지막 성명서에서 "조병옥장택상 씨가 경찰 행쟁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하여 자행해 온 것은 사실이다. (중략)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일갈하면서, 서민 대중 사이에서 그는 큰 지지를 받게 된다.

5. 반 이승만 투쟁

1917~1929년까지 미국에 머무르면서 "이승만"의 독선독단파벌주의를 목격한 바 있었고, 이에 "이승만"에 대한 그의 혐오감은 일찍부터 굳어진 상태였다. 이는 광복 이후 친일경찰 등 "친일파" 옹호하는 "이승만"의 행각을 목도하며, 확신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이 무렵 "이승만"은 우익단체의 "반민특위법 성토집회"에 참여해 축사까지 하는 등, 지지세를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최능진은 "반 이승만 운동"의 일환으로, "경찰계"를 떠난 뒤 "서재필"을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김규식"을 자주 만났으며, "김구김규식""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론"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독선거"는 강행됐고, 1948"510 총선거" 일정이 확정됐다그는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이승만""무투표 당선"을 노리던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 자신이 입후보해서 "이승만"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한 것이다그러나 이승만 추종 세력은 차기 지도자이자 단독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이승만"이 대놓고 도전받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승만 추종 세력의 집요한 선거 등록 방해 공작에 시달려야 했고, 공작은 치졸하고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번째 훼방꾼으로 나선 것은 "동 선거 위원회"였다당시 선거 등록 요건은 유권자 200명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 "동 선거위원회"에 제출, 적법 여부에 대한 인준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위원회"는 최능진 선거 운동원들이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하면 "선거 위원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는 식으로 둘러대면서 고의로 접수를 연기시켰다.

번째 훼방꾼으로 나선 것은 "정치 청부업자들"이었다그들의 방해 공작은 노골적인 정치 테러였는데, 등록 마감 직전 "동 선거위원회" 입구에서 2명의 괴한이 선거 운동원들이 가지고 가던 추천서 가방을 강제로 탈취해 도망가 버린 것이다탈취 사건의 전말은 "문봉제 (서북청년단 리더)"가 중앙일보 1973.02.08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회고한 바 있다"이 박사는 당시 "라이벌 최능진" 씨가 후보 등록 마감 전날인 04.15일 하오 추천서 꾸러미를 가방째 선관위 앞에서 날치기당함으로써 무투표 당선됐다. 이미 알 사람은 대강 짐작했겠지만 이때 최 씨의 가방을 날치기한 2명의 괴한은 바로 우리 서청(西靑)의 성북 지부장 계호순 동지 외 1명이었다."

물론 이들은 "이승만" 측근의 부탁을 받고 이런 테러 행각을 벌인 것이었다이들을 사주한 장본인은 "이승만"에게 "이화장(梨花莊)"을 기증한 "백성욱"이었다이들은 이 정치공작의 대가로 나중에 자유당 정권에서 "백성욱"은 내무부 장관(4), "문봉제"는 교통부 장관(6), "이성수(서북청년단 단원)""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된다.

"이승만" 일파가 그렇게 집요하게 "그의 선거 등록"을 방해하려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이승만"은 당시 웬만한 여론조사에서도 차기 지도자 1순위로 꼽히며, 거물급의 인사로서 자리매김했지만, 막상 선거를 앞두고 나서는 확실한 당선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당시 "윤기병(동대문경찰서장)""최병용(사찰 주임)"이 제출한 정보 보고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유권자 지지 성향을 조사해 보니, 민심이 "이승만"보다 최능진에게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유권자들은 2년 전, 친일경찰 청산을 과감히 주장한 정치지도자 "최능진"을 기억하고 있었고, 기꺼이 "익숙한 인물인 이승만"이 아닌 신선한 정치인인 "최능진"에게 표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윤기병 서장""장택상 수도청장"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박사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극비지령을 받았던 만큼, 이러한 예측 못한 상황은 패닉상태였다.

결국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취소되고, "이승만"은 원하지 않았던 선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최능진"은 단단히 "이승만" 눈 밖에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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