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미국"은 "이승만 (李承晩ㆍ1875~1965ㆍ90세)"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승만"이 "반 휴전태도"를 고수하자,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UN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 레디 작전(Operation Ever ready)"을 수립했다.
1. 미국의 이승만 제거 시도 (에버 레디 작전ㆍOperation Ever ready)
1952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이 "반 휴전태도"를 고수하자,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UN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 레디 작전(Operation Ever ready)"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마땅한 대안자를 찾지 못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유지하되, 주변 측근들 중, "강경파"를 숙청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미 정부"는 "이승만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 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미국"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
1950년대 말, 한때 "장면"을 대안으로 세웠으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기붕(자유당 내 온건파)" 등을 통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추진하려 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1960년 "4ㆍ19혁명" 당시, "이승만 퇴진"에 대해, "미국 사람들이 앞장서서 한 짓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했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3ㆍ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3ㆍ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으로, 이 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 측의 계획된 공작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2. 김구 : "이승만 암살 미수" 의혹
1947.12.02일 발생한 "장덕수 (1894~1947ㆍ향년 52세ㆍ한국민주당 당수) 암살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이승만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 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백의사 특공대원ㆍ암살 하수인 관리자ㆍ안두희가 조카 사위 뻘)"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 김학규(1900~1967): 독립운동가ㆍ한국광복군ㆍ1948년 남북협상 반대ㆍ김구와 갈등하던 중,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 주었다가,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는다.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가 만날 때마다, 한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서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는 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는 "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는데,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2장 크기의 하얀 천"을 1장 보여주었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묻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고 한다. 이 사건 직후, "김학규"는 "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
그러나 "김학규"가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가 "이승만 정권"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는 애매한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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