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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④ 김구 피살 ① 1949.06.26일, 12:36분

by 당대 제일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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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06.2612:36, "김구 (金九1876~194972)"는 서울 자택인 "경교장"에서 "안두희(육군포병소위)"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군총참모장)장은산 (포병사령관)김창룡(소령)김병삼(대위)김태선(서울 경찰국장)김성주(서북청년단 부단장)김지웅(정치브로커)"등이 가담하고, "안두희홍종만"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1. 안두희 (安斗熙1917~1996향년 78)

김구 암살범군인한주둔 미군방첩대(CIC) 정보원백의사 특공대원무대장 김창룡의 복ㆍ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 서울 제1지부 종로지부(본부 직속) 사무국장기업가(군납기업 신의기업사 사장)

신의주 최고 갑부 안병서(安秉瑞)의 아들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Informer)요원(Agent)으로 활동  백의사(白衣社우익 테러조직)의 자살 특공대원으로 활동 : "염동진(백의사 사령(司令))"의 전언에 따르면, "김구가 군부 내 반() 이승만파와 손잡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

• 1949.06.26 : 백범 김구 서거 → 1949.08.06 : 안두희 "무기징역" 판결 → 1949.11 : 안두희 "징역 15년 형"으로 감형 → 1950.07.10 : 안두희,  "잔형 집행정지" 처분(국방부 특명4) 받고, "육군 소위"로 복귀

2.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1971"홍종만"이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1992.04"권중희김석용"이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1992.11"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1995.12월에 작성하였다.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이 하수인으로 활동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서 어떤 목적으로 지시를 받게 되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현재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948.08.15"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09.09"북한 정권" 수립이 된 이후에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비판적이고,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요인으로 추앙을 받자, "이승만 정권"에 많은 부담이 되었고, "군부"는 대부분이 "친일파""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반대하는 세력의 최고 지도자로, "이승만""자신의 권력"을 위해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안두희"의 증언을 분석하면, "김구 암살사건""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김구 암살" 계획실행을 주도한 실질적 "이승만 참모진"이 흔히 "88 구락부"라고 부르는 세력이다"이승만"이 직접적인 지령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는 개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김삼웅"에 의하면, 당시 군부경찰의 정보관계 핵심들인 "장은산(포병사령관)김창룡(육군정보국 방첩대장)채병덕(육군 참모총장)신성모(국방장관)원용덕(재판장)장택상(외무장관)김준연(한민당 총무간사)김지웅(거물 고급 정치 브로커)" 등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수시로 모여 정보를 교환하며, 시국 문제를 논의해온 "비밀그룹"으로, "전봉덕(헌병부사령관)고문수사관으로 소문난 일제경찰 출신인 노덕술최운하" 등이 참여했다는 것이다"김지웅(金志雄)"은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하였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하였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고, 1차적 배후는 "군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육군 1연대 헌병대장"으로 근무했던 "한필동" 씨는 "헌병대 부사령관"으로 사건 직후, "사령관"으로 승진한 "전봉덕"이란 인물을 거명하는데, 아마도 "백범 암살 실행"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은 거의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백범 암살 실행""안두희 암살"과 함께, 그의 신병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주변에 대기하다 신고하기 전에 나타나, "경비 경찰"로부터 빼앗아 간 "헌병대 일단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라인이 결국 "암살" 미리 알고 있던, 실질적으로 암살을 배후 지원한 이들일 것이다그리고 라인의 정점에 "전봉덕"이란, 후에 "친일경찰"이란 경력을 완전히 세탁하고, "변호사"로 변신한 인물이 있을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안두희"에게 암살을 결심할 동기를 제공한 이들에 비하면, 여전히 사건의 주범이기 보다는 종범이며, 그 이상이라는 증거는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건 즉시 범인을 경찰에게서 탈취할 정도의 역할이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비중의 역할이다. (전봉덕의 헌병대 역할이 미미함은 그가 일찍 참모그룹에서 탈락해 율사의 길을 간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공연히 가담자의 수만 늘려, 보안유지만 더 어렵게 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실제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죽음" 같은 것은 이 사건의 관련자가 쓸데없이 많았다는 것이 드러난다"장은산"의 경우는 "서청계 오병순" 등에게 "암살 훈련" 등을 시켰다.결국 실제 실행단계와는 무관한데도, 무리하게 내막을 잘 아는 것처럼 떠벌린 것이 화를 불렀을 것이다.

이들 대원들에 의한 "암살시도""안두희" 외에도 몇 번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이로 인해 마지막 임무는 "홍종만" 등에 의해, "한독당원"으로 잠입해 있던 "안두희"에게 떠넘겨졌다.

"전봉덕"이란 인물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헌병대의 간여""88클럽"이라는 모임의 정체활동내용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한다여담이나, 이 사건과 관련된 또 하나의 정체가 아직까지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백의사"란 단체에 대해서도 같은 궁금증을 갖는다.

"백의사"는 정부수립 전까지는 분명 "남한의 백색테러"를 주도한 단체였고, 오히려 "임정계열"과 가까운 단체였으며, 당연히 "이승만 집권" 이후에는 사실상 활동할 수 없는 단계였음에도, 최말단 실행자는 결국 "백의사 단원들" 중에서 "용병"이 차출 된 셈이다.

3. 김구 암살

"김구""남북협상"이 좌절되고,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시기에 할 일 없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1949.01"백범학원", 3월에 "청암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독서와 여가에는 휘호를 쓰면서 나날을 보냈고, 가끔 1947.03월에 개소한 "건국실천양성소"에 나가 학생들에게 강연도 하였다.

1949.06.26일 일요일 11:30분경,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년이 되는 때, "안두희""김구"를 만나러 왔다. "안두희"는 그전에도 몇 번 찾아와서, 비서는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거실로 안내했다비서가 나간 후, 2~3분 뒤에 총소리가 났다.

비서가 황급히 뛰어올라가자, "안두희"는 계단에 총을 버리며, "백범 선생을 쏘았다"고 하였다비서가 얼른 의사를 불러왔지만, "김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안두희"는 당시 "특무대 김창룡"의 심복으로, "김창룡"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친일파"였다"김창룡""이승만"의 아래였고, "안두희""조직의 행동대장" 정도였던 것 같다아마도 "김창룡""김구"가 속해있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라"고 사주했을 가능성이 크다(자유당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김구가 눈에 가시였을 터이다.)

"안두희""김창룡"의 추천으로 해방 후, "육사"에 특채로 입학한다"안두희""서북청년회"의 확실한 비호를 받게 된다"김구" 살해로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군에 다시 복귀하고, "대위"까지 진급한다.

그 후, "김창룡"이 살해되고, "이승만""419혁명"으로 물러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름까지 바꿔가면서 은신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권중희"라는 사람에게 몇 번씩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결국에는 "박기서(소신여객 버스 기사)"라는 사람에게 맞아서, 사망한다.

"419혁명"은 승승장구하던 "안두희 삶"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419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진상규명 위원회"가 조직되었기 때문이었다이로부터 "암살범 안두희"의 기구하고 척박한 인생 역정이 시작되었다.

"안두희"는 신변에 불안을 느껴 은신했지만,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적발되어 경찰에 넘겨졌다하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 나왔다이어 1965, "곽태영(백범 독서회 회장)""안두희"를 찾아내, 칼로 목을 찔렀다. 그는 병원의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났고, 이후 개명변장을 하고, 이사유랑을 거듭해야 했다.

4. "장준하"의 회고 :  김구, 과연 누가 죽인 것인가?

"김구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준하""임주호"를 찾아갔다. "임주호"는 혼자서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준하""임주호"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번쩍 고개를 쳐들면서 물었다"임 형, 대관절 누구의 짓이오?" "백범의 죽음으로 이익을 볼 집단이겠지요." "임주호"의 설명에는 무서운 사실이 담겨 있었다"안두희"는 포병장교일 뿐 아니라, 주한 미군의 정보요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뿐만 아니라, 그는 국내 극우테러 단체와 선이 닿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정은 최고 친미파 장덕수의 암살을 한독당 소행으로 몰았잖습니까 그 사건으로 김구는 미군 중위의 무례한 취조를 받았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미군정이 김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들이 지어 붙인 별명에서 드러납니다 "김규식"은 시클리(sickly), 이름자 "규식"에서 딴 별명이겠지요. 아울러 "약골"이란 뜻이고요 "여운형""실버엑스", 은도끼처럼 겉보기에는 좋은데 막상 써 먹을 수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백범에게는 "블랙타이거"라고 했다더군요. 그들은 백범을 제거해야 할 맹수로 본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김구의 죽음은 미국과 이승만의 합작품입니다.","그러면 안두희 패거리는 무엇이지요?" "극우 테러리스트 결사체겠지요. 그들을 미국이 이용한 것이고 이승만이 후원했다고 나는 봅니다."

5. 안두희 : 남한주둔 미군방첩대(CIC) 정보원백의사 특공대원특무대장 김창룡의 심복

1971, "홍종만"이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1992.04"권중희김석용""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안두희""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 관리청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했다.

"편찬위" 측은 해외사료 이전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에 파견한 "방선주 박사정병준 박사""미국 정부" 측에 수년전부터 비밀해제를 요구해 열람하게 된 "김구: 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Kim Koo : 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란 제하의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1949.06.29일 작성)" 이 같은 사실이 적시돼 있다고 밝혔다.

문서에 따르면, 1948년 말까지 "미군 방첩대(CIC) 요원"으로 한국에 근무했던 "미 육군소령"이 이후 미 본토로 귀환, "1군 정보과장"으로 근무 중, 1949"김구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이 문서를 작성했으며, 이 문서는 신뢰도면에서 "ABCDF(1234등급으로 세분)"등급 중 "A2등급"을 받아, "신뢰도가 높다는 미군 자체평가가 붙어있다""편찬위" 측은 말했다"편찬위" 측은 "이 문서에 김구선생 시해사건 당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빠져있어, 미 방첩대가 시해사건 배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성자는 한국 근무 당시 안두희를 잘 알고 있었고, 안씨가 CIC 위한 정보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정식 요원이 됐다고 기록했다"고 말했다.

, 1942년 결성된 최대 우익 청년 단체였던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 앞에서, 안두희가 "죽음으로써 하겠다."고 맹세했으며, "김구 선생이 염동진과도 잘 아는 사이"라는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고 "편찬위" 측은 말했다문서에는 "김구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에 다녀온 후, 연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 "큰 나무인데, 공산의라는 벌레가 꼬이고 있다""백의사" 측의 비판적 발언이 기록돼 있어, "김구 선생"이 이념투쟁 과정에서 "우익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편찬위"는 말했다.

이밖에 "편찬위""이 문서에는 1948년 여순사건 진압부대였던 한국 4연대가 여순 반란자들과 관련돼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와 북한 정권과도 다른 파시스트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정부의 수반으로 김구 선생을 옹립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미국 측의 여순사건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6. "서북청년회" 활동

월남 후, "안두희"가 처음 접촉한 단체는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이었다안두희는 "이범석(李範奭)의 민족청년단" 등 여러 청년단체를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서북청년회" 선택했던 것이다이러한 선택은 당시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인 "김성주(金聖柱)문봉제" 등과의 친분 때문이었다이리하여 "안두희"는 서울에 온 지, 3달 만에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가입하여, "서울 제1지부"이며 본부 직속인 "종로지부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당시 "서북청년회"는 좌익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차, "반공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하던 단체였으며, 경찰 및 군의 정보기관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경찰군부는 빨갱이와 싸우는데, "청년단"이 필요하였고, "서북청년회"도 정부기관의 보증과 지원이 필요하였다.

당시 "경무국장 조병옥도경찰청장 장택상" 등 경찰 수뇌부의 밀접한 지원 아래, "서북청년회"는 경찰이 할 수 없는 성질의 대공 투쟁을 담당하였다경찰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찬조금"을 주거나, "소금 배급표"를 몇 천 장씩 주어, "서북청년회"그 간부들의 활동비를 보조하였고, 이러한 관계를 기반으로 "안두희"는 경찰의 수뇌부중견 간부들과 알게 되었다.

"안두희"는 이러한 경찰과의 인연을 넘어, 군의 정보기관, 특히 "특무대(SIS)""김창룡"과 연결되었다당시 "김창룡"은 대위 계급의 "1연대 정보장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채병덕 총참모장신성모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정보계의 실권자였다"김창룡"은 소공동에 "대륙공사(大陸公司)"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보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육군 중령 김일한"이었다"김일한""안두희"의 외가 쪽 친척이자 고향 후배로서, 월남하여 "인천 특무대 대장"을 하고 있었다"김일한""안두희"에게 "대륙공사의 김창룡"을 소개하였다

"안두희""서북청년회"에서 처외삼촌뻘이 되는 "홍종만"을 만나게 되었고, "홍종만""김지웅""안두희"에게 소개했다"김지웅""안두희"와 같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찍이 "만주 관동군의 헌병통역 출신"이며, 중국 "왕조명(汪兆銘) 정권의 고문"을 역임했다고 자칭하고, 해방 후 귀국해서는 "왕금산(汪金山)장군" 자처하면서, 고급 정보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던 과거 경력이 수상한 인물이었다.

"홍종만" 역시 "김지웅"의 지시를 받고 있는 정보에 밝은 사람이었다"홍종만""김지웅"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지내는 형편이었다"김지웅""안두희"의 첫인상에 대해,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그는 "김지웅홍종만"의 영향을 받아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 자신 스스로 정보를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이후 "김지웅홍종만안두희"는 자주 회동하였다"김지웅""안두희"에게 "안동지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워 주었고, 이들을 후암동에 있는 자택으로 데리고 가서, "안두희"에게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며, 각별하게 대접하는 등 "안두희"의 환심을 샀다"김지웅""빨갱이 정보"와 더불어 "한독당"의 수상한 활동에 관한 정보를 들었고, "안두희""노덕술" 경찰간부, "김일한" 등 특무대에 알아 본 결과, "김지웅"이 제공한 정보의 정확성에 크게 감명 받았다.

이제 안두희는 "김지웅"을 존경하기 시작했다결국 안두희는 월남 후,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하였고, 이것을 기반으로 한편으로는 경찰 및 군 수뇌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뒷날 "백범 김구" 암살의 핵심 실무를 담당하는 "김지웅홍종만" 등과 연결되었던 것이다1947"대동청년단"이 결성되자, "서북청년회" 중에서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대동청년단" 가입하였으며, "서북청년회" 중에서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1949.06.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

그러나 "안두희"에 대한 의혹 가운데 하나인,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 의혹자세한 배후 등에 대해서는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는데, 당사자인 "안두희"가 확실한 증언을 하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이 의문은 끝내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다만 "안두희"에 대한 감형예편 후의 군수업자 근무이승만과 김구와의 대립미국의 배후 개입 등으로 인해, 권력과 결탁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다만 "안두희"가 중형을 면하였고, 1년여 밖에 복역하지 않았으며, 석방 후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그의 범행을 은닉시켜주거나, 방임시킨 일면이 있었다"419혁명" 직후인, 1960.06.26일 결성된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규명위원회"10개월여의 추적 끝에, 1961.04.18"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 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으나, 조사받기는커녕,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한번 확정 판결된 사건은 다시 심리하지 않는다는 형사소송법상의 원칙)"의 원칙에 의거해, "형사 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 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516군사정변 "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56.10, "안두희"에게 폭행당한 "양구경찰서 순경 길종하""진상규명위원회"의 권유로 "안두희" 고소했으며, 결국 1962.01.25"특수 폭행 치상죄",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그 뒤 1965.12"곽태영"이라는 청년이 "안두희"를 테러했으며, 1966"김지웅" 자신이 "김구 암살의 총책임자"라고 일본에서 폭로하는 등 진상규명의 분위기가 일자, "안두희"는 미국 이민을 시도하였다.

1971"홍종만"이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1992.04"권중희김석용""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1992.11"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1995.12월에 작성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이 "하수인으로 활동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서 어떤 목적으로 지시를 받게 되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현재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7. "백의사" 소속설반론

2001"정병준 박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방선주 교수(재미사학자)""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하였음""미국 국립 문서기록 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

2001.09.04일 공개된 "김구 암살에 관한 배후정보"라는 문건에서, "안두희"에게 직접 "백범 김구 암살"지시한 인물이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활발한 테러활동을 벌였던 "백의사(白衣社)"라는 극우 테러단체의 "단장 염응택(본명 염동진)"이었음을 알아냈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백찬옥(백관옥 동생백의사 단원)""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하며, "백범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 진" 연관이 없다고 증언하였다"백범 김구"를 연구한 "도진순 교수""염동진이 백범 김구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고 반론하며, 설령 실제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 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견해를 내놓았다.

또한, "장덕수 암살송진우 암살"의 배후가 "백의사"라는 주장 또한 사실과 다르며, "백의사"가 해방 직전 "신익희" 주도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이 모태가 된 것으로 주장하나, "백의사" 해방되기 전, 1943년 평양에서 조직된 "대동단"을 모체로 한 극우 테러집단으로, "비밀결사대의 후신이었다."고 기고문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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