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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② 송진우 피살 사건 (1945.12)

by 당대 제일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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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한민당) 수석 총무(당수)인 "송진우 (宋鎭禹ㆍ고하(古下)ㆍ1890~1945.12.30ㆍ향년 54세)"가 "한현우(34세)ㆍ유근배(21세)" 등의 권총 저격을 받고 암살된 사건이다.

 

1.  송진우 피살 사건 ( 1945.12.30일, 새벽 6:15분 ) 

"송진우 (한국민주당 당수)""한현우(34)유근배(21)" 등의 권총 저격을 받고 암살된 사건

"한국민주당 (한민당)"을 창당하여, "수석 총무(당수)"가 된 그는 당 조직을 확대했으며, 군정에 협력했고, 망명 정객들과의 연계를 통해 정략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한민당"에서는 신탁통치를 놓고, "탁통치 반대론 (김성수)""탁통치 불가피론 (송진우)"가 있었다

"송진우""5개년 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5.12.27"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발표된 조선의 미소 양측의 5개년 신탁통치의 문제에 대해서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와 견해 차이를 나타냄으로써 마찰을 빚었고, 이로 인해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생각한 "한현우(34)유근배(21)" 두 사람에 의해 피격 암살당하고 말았다.

"송진우 암살" 배후로 "하지"는 "김구"를 지목하였고, "장택상ㆍ조병옥"도 "김구"를 "송진우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송진우

일 시 : 1945.12.30일 새벽 6:15

장 소 : 송진우 자택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

상 태 :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 (얼굴 1심장 1복부 3하관절 1발 관통)

암살범 : 한현우(韓賢宇34남 출신일본 유학파월남청년민족주의 광신자)유근배(21) 4

송건호(언론인)"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라고 평가했다. 백의사 "한지근"(본명 이필형여운형 암살범월남청년 출신)은 한때 "한현우 형"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총기 제공자 : 이들에게 총은 건네준 사람은 "전백"으로 "영화(永和)기업사"라는 해운회사를 차려 사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전백"은 자신이 배후라고 주장했다.

배 후 : "장택상""미군정" 인사에게 "김구 배후설"을 제기하기 이전에, "하지(미군정청 령관)"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1946.01.01일 김구를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고, 관련 증거들은 "한현우""김구"와 연결시켰다.

 "조병옥 (경무국장ㆍ정치인 조순형ㆍ조윤형 부친)"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훗날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술에 취해 말하기를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미국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학 석좌교수)리처드 로빈슨(MIT공대 명예교수)" 역시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다.

주범 한현우의 진술 : 배후는 없으며, 자신들의 거사를 "김구이승만" "애국자"라고 칭송했음을 거듭 주장했다.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법정에서는 "한민당" 계열의 성토가 있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방청객도 존재했다 "왜 송진우 선생을 죽였냐?"고 물으니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 둘 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먼저 여운형 선생을 죽이려고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파고다공원(종로3)" 근처에서 여운형이 걸어오는 걸 보고 죽이려 했는데, 그가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 현우군! 오랜만 일세"하고 다가와서는 어깨를 탁탁 두드리니, "차마 못 죽이겠더라."고 진술했다.

2. 개 요

1945.12.29일 저녁 10시부터,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우파" 회의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되, 방법은 직선적감정적이기보다는 합리적신중하여야 함을 역설했다.

1945.12.30일 새벽 4, "송진우와 임시정부 측"의 면담은 끝났으며, 2시간 후인 새벽 6:15분에 "송진우"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청년단" "한현우" 등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한편 "송진우" 집에 병원 통원치료차 왔다가, 자객들을 추격하던 외사촌 "양신묵"은 달아나던 범인들이 휘두른 칼에 맞고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양신묵"은 당시 상황을 "29일 저녁 형님과 둘이서 취침하게 되었는데 아침 4시쯤 잠이 깨어 두어대 담배를 피우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5시쯤 다시 잠이 들었다. 6시가 될까 말까 해서 돌연 인기척이 뒤꼍에서 났다. 이 때 형님은 "누구요?"하고 평상 말투로 소리쳤으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뒤이어 마루의 덧 유리 창문이 열리더니 난데없는 육혈포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예닐곱 발 쏘는 소리가 났는데 형님은 아무 말 없이 태연자약하게 쓰러졌다 그 뒤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증언하였다.

사건 발생 후, 건넌방에서 자던 "송영수(조카)"와 하인들은 암살범들을 추격했고, 암살의 주범인 "한현우" 주요 범인인 "유근배"를 검거하고, 나머지 공범 4명도 4개월 뒤, "군정청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1946.02.13, "장택상(수도경찰청장)"형사로부터 "송진우의 경호원으로 있었던 김일수(金日洙)가 해안경비대에 입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미군 스톤 부장"의 양해를 얻어 미군 2명을 "해안경비대"에 파견하는 한편, 찰관들을 서울역 주변에 잠복시켰다.

1946.02.13일 오후 2, 경찰은 "정종칠(鄭鍾七)"과 경비대에 입대하게 된 "김일수"를 검거하고 취조를 개시하여,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던 "백남석김의현신동운박민석유근배" 등이 1945.11월 말경에 의견이 충돌하여, 경호원에서 물러난 점을 알아냈다.

한편 "김일수"의 진술 중, 그가 시내 종로 모처에서 "김의현"을 만나, "송진우"의 암살을 물었을 때 김의현이 "그건 왜 묻느냐? 누구면 알아서 뭘 어쩔 작정이냐? 그만 두어라"라고 답했다고 진술했다.

"김일수"의 진술로 "김의현"이 암살범에 대해서 안다고 본 "장택상"02.14"백남석김의현신동운" 등을 각각 체포심문하였다1946.04.08, "인천 화평동"에 숨어있던 "유근배"를 체포하고, 같은 날 10:20분 경 서울 신당동에서 "한현우"를 체포하였다.

3. 결 과

"장택상한민당 인사"들은 "김구임시정부"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있던 미국의 라우터 백은 "송진우가 암살된 이유는 미국의 후견을 지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1945.12월 말, 서울에 도착하여 일주일간 체류한 미국의 한 기자는 "민주당 영수는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하였다.

4. 암살 배경

1945.12.27,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1945.12.29일 저녁, "송진우"는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를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 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미국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학 석좌교수)"에 의하면, "김구""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

"송진우""5개년 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고 한다"송진우""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송진우"의 이러한 주장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김구"의 추종자들은 1945.12.30, 그를 자택에서 저격사살했다.

1945.12.29일 저녁 10시부터,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우파" 회의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되, 방법은 직선적감정적이기보다는 합리적신중하여야 함을 역설했다.

"한민당"에서는 신탁통치를 놓고, "탁통치 반대론(김성수)""탁통치 불가피론(송진우)"이 있었다"송진우""임시정부가 미군정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충고했다.

이는 12.29일 저녁 10시부터 열린 "경교장 회의"에서도 표현되었다"경교장"에서는 "미군정을 타도하자"는 여론이 강하게 나왔고, "송진우""미군정을 무조건 적대시하다가는 상대방에게 유리한 일만 할 것"이라며, 당분간의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송진우"12.29일의 "경교장 회의"에 앞선 12월말, "미국계 인사"와의 인터뷰에서 주한 미군이 주둔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군정"에 도전할 경우, "우익 진영"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고, "3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탁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지만, "송진우"는 자신을 적극적인 "탁치론자""신탁통치"에 지지하는 것으로 몰고 가는 여론을 불쾌히 여겼다."송진우"가 군정의 주둔을 어쩔 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서울 거리에는 "송진우 타도"등을 적은 벽보삐라가 대량으로 살포되어 있었다

"송영수(조카)"는 정국이 흐려지고 이상한 소문이 돌 뿐 아니라, 집 주위가 어수선해지자, 문단속을 제의했는, "송진우"는 응하지 않았다"문을 안으로 걸까요?"라는 "송영수"의 질문에 송진우는 "문을 왜 거느냐? 그냥 내버려 둬"라고 대답했다.

5. 암살의 배후

해방 당시 한때, "송진우""건준"에 반대하고, "여운형박헌영"에 반대했으며, 좌파와의 협력을 놓고 "안재홍" 갈등을 벌인 것을 두고, "한민당" 세력에서는 "송진우의 암살 배후는 좌파 진영"이라고 주장했다.

후일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장택상이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경교장에서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겁니다."라고 회고했다.(로빈슨 저 "미국의 배반"참조)

"한현우가 두 사람을 다 죽이고자 했다면, 김구 선생이 개입됐을 리는 없습니다 김구 선생은 1947 장덕수 선생 암살 배후로도 의심받아서, 미군정이 그를 법정에 불러내 조사하려 한 일이 있죠."라고 김구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

"김구 선생과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미국 사람들이 송진우 선생을 죽인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다고 봤다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겁니다. 미군정은 김구 선생을 싫어했으니까"라고 회고했다.

6. 임시정부 - 송진우 갈등

1945.12월 중순, "송진우(당시 한민당 수석총무)""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환국환영 준비회"를 겸한 간담회를 "국일관(서울 관수동 근처)"에서 열었다"임정 요인(김구김규식이시영조소앙신익희조완구엄항섭)" 전원이 초대된 자리였다.

"신익희(임정 내무부장)""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그러자 좌석은 싸움판으로 변하였다. 장덕수는  "해공!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국내에 있던 사람은 다 친일파라니 임정 요인들은 그런 색안경을 쓰고 우리 국민들을 보고 있었나?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해공,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며 거칠게 항의하였다.

이에 "송진우""신익희"를 설득하였다. 그로부터 "임정" 측의 "친일파 숙청론"은 고개를 숙였다"여보 해공! 표현이 좀 안됐는진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민공화국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천만에요 해외에서 헛고생을 했군. 해방된 우리 국민들에게 임시정부를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 개인을 위해선 줄 알고 있소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 살았는지, 여기서 모르고 있었는 줄 알어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국내 사람들보다 오히려 적었을 거 아니야 가만히들 있기나 해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은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송진우" 측은 "정치적 헤게모니친일파 문제" 등으로 "중경 임시 정부"측과 갈등이 적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은 "송진우"측의 "중경 임정 측"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반탁투쟁""반 미군정 투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미군정"과 밀착된 그의 입장은 "중경 임정" 측의 "즉각 정권 인수 의지"와 대립될 수 있었다.

"송진우"는 모측의 위협을 받았으며, "미군정 CIC"가 이를 경고를 하였고, 그의 보디가드들은 항상 경계태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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