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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③ 장덕수 피살 사건 (1947.12)

by 당대 제일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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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한민당) 수석 총무(당수)인 "장덕수 (張德秀ㆍ설산(雪山)ㆍ1894~1947ㆍ향년 52세)"가 "박광옥(한국독립당 당원ㆍ미군정청 경찰관ㆍ종로경찰서 경사), 배희범(한국독립당 당원ㆍ초등학교 교사)" 등의 권총 저격을 받고 암살된 사건이다.

 

1.  장덕수 피살 사건 ( 1947.12.02일)

"장덕수 (한국민주당 당수)""박광옥배희범"5명의 권총 저격을 받고 암살된 사건

"장덕수""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두고, "김구"와 갈등하였고,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도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1947.12.20, 배후로 "조소앙""군정청 경찰"에 연행되었고, 이어 "김구" 역시 "군정청 재판"에 출두하였다.

일 시 : 1947.12.02.

장 소 : 장덕수 자택 (청설장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

암살범 (현장체포): 박광옥 (한국독립당 당원미군정청 경찰관종로경찰서 경사) / 배희범 (한국독립당 당원초등학교 교사)

배 후 : 김석황 (한독당 중앙상무위원임정 출신국민회의 동원부장) /  조상항 (한독당 중앙위원임정에도 관여국민회의 비서장)

2. 개 요

서울 제기동 자택을 방문한 "박광옥배희범"등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하녀가 소리치자 이들은 도피했지만, "청설장"에서 500m 떨어진 지점에서 "군정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붙잡힌 "박광옥배희범"등은 배후로 "김석황"을 지목했다용의자들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08"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1947.06"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3. 결 과 (이승만- 김구의 결별)

"김구""장덕수 암살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 때문에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하였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이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12.22,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4. 암살 배경

1947.05월부터, "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반대하는 "이승만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독립에 미국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참가 여부를 놓고도 "장덕수ㆍ김구"는 갈등관계에 있었고, 이는 "김구""미 군정청 법정" 출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1947.10.18,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했다.

이어 그는 "국제연합(UN)"에 호소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 1947.09"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김구조완구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 "김구"1947.02.2631절까지 "한민당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 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 시도에 "김성수"는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반대하였다"장덕수""한독당과의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5. 사건 이후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 것해방 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지만,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허정""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외치고는 뛰쳐나갔다

1947.12.20, "조소앙""장덕수 살해"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다.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환당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여론이 조성되었다.

1947.12.20, 조소앙은 정당관계 등 일체를 사퇴하는 정계은퇴 성명을 냈다그러나 1948.01"남북협상"에 참가를 선언하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에 서중석은 "장덕수 살해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은 것도 한 원인이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이를 눈치 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섭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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