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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④ 김구 피살 ② 암살범 안두희 (신의주 최고 갑부의 아들)

by 당대 제일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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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두희 (安斗熙ㆍ1917~1996ㆍ78세) "는 "김구 (金九ㆍ1876~1949ㆍ72세)"의 암살범으로,  1996.10.23일 오전 11:30분경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기사였던 당시 46세의 "박기서(朴琦緖)"가 휘두른 "정의봉"에 의해 피살당했다.

 

1. 안두희 (安斗熙1917~1996향년 78)

김구 암살범군인한주둔 미군방첩대(CIC) 정보원백의사 특공대원무대장 김창룡의 복ㆍ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 서울 제1지부 종로지부(본부 직속) 사무국장기업가(군납기업 신의기업사 사장)

 신의주 최고 갑부 안병서(安秉瑞)의 아들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Informer)요원(Agent)으로 활동   백의사(白衣社우익 테러조직)의 자살 특공대원으로 활동 : "염동진(백의사 사령(司令))"의 전언에 따르면, "김구가 군부 내 반() 이승만파와 손잡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

• 1949.06.26 : 백범 김구 서거 → 1949.08.06 : 안두희 "무기징역" 판결 → 1949.11 : 안두희 "징역 15년 형"으로 감형 → 1950.07.10 : 안두희,  "잔형 집행정지" 처분(국방부 특명4받고"육군 소위"로 복귀

출 생 : 평북 용천군       • 사 망 : 인천 중구 신흥동       • 가 명 : 안영준(安英俊)       • 아 명 : 안덕희(安德熙)

사 인 : 피살 (박기서(44)가 휘두른 정의 봉에 의함)     • 묘 소 :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  학 력 : 1934- 평안북도 신의주 고등상업학교 1939-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3년 중퇴 1949- 육군사관학교 (8)       • 가 족 : 부친- 안병서(安秉瑞) 신의주 최고 갑부 / 사촌 동생- 안세희(연세대학교 총장)       • 경 력 : 육군 소령 (육군 포병사령부 연락장교)

안두희

1934"평북 신의주 고등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1939"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후, 중국 등에서 상업을 하였다그 뒤 귀국하였으나, 1947년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월남하였다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49.06.26일 독립 운동가였던 "김구의 암살범"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안두희의 "백범 김구 암살""이승만"의 지시로 저질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1992.04.13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하여,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하여 큰 화제가 되었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1949.06.26일 정오경, "경교장"에 찾아가, 권총으로 "김구"를 암살하였다"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3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1950.06.27)"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하였으며, 1953.02.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에는 군납기업 "신의기업사" 사장을 지낸 바 있다.

1996.10.23일 오전 11: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기사였던 당시 46세의 "박기서(朴琦緖)"가 휘두른 "정의봉"에 의해 피살당했다평소 "백범 김구"를 매우 존경하던 "박기서""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를 응징할 기회를 노리다가 살해에 이르렀는데, 1997년 이러한 범행 동기가 정상 참작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8"31절 특별사면" 이후 일주일이 지난 후인 1998.03.08일로 당시 대통령 "김대중의 특별사면" 받아 석방되었다.

가족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이혼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다른 나라로 출국한 상태였다"안두희" 전처와 자녀들처럼 이민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정체를 알아본 "출입국관리 담당자"들이 출국을 허락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2. 권중희 (민족정기 봉)박기서 (정의 봉)의 처단

그러나 암살범 "안두희"는 끝까지 함구했다.  "안두희"는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마치 입을 열면, 죽음을 받겠다."는 각서라도 써놓은 사람 같아 보였다그의 함구는 "백범 김구"를 숭배하는 이들의 분노를 샀다.

"김구"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를 "효창공원"에 강제로 끌고 가, "백범 묘소"에 참배시켰다. 그러면 마음이 움직여, 진상을 털어 놓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두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횡설수설로 일관했다.

 

① 권중희 (權重熙ㆍ민족정기 봉 사용)

"안두희"는 복덕방에서 바둑을 두며, 소일했다. 그는 주변 노인들에게 인심을 잘 써, 인기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친구를 얻기도 했다. "권중희"라는 이름의 한량이었다. "권중희" 역시 일정한 일이 없이, 복덕방에서 바둑 두는 일을 좋아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절친한 바둑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미세한 바둑 승부의 계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권중희"가 손바닥으로 바둑알을 쓸어 버렸다. "권중희"는 얼굴에 시퍼런 서슬을 띠며 일어났다. 한량인 줄만 알았던 "권중희"의 돌변한 모습을 보고, "안두희"는 공포를 느꼈다. 어느새 "권중희" 손에는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 놈! 안두희, 민족의 방망이를 받아라."  "권중희"는 몽둥이로 "안두희"의 어깨를 사납게 내리갈겼다. "안두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안두희"를 실신시킨 몽둥이에는 "민족정기 봉"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쓰여 있었다.

젊어서 테러범과 북파공작원을 했던 "안두희"였지만, 이제 그는 무기력한 노인일 뿐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몽둥이를 맞거나,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그의 2번째 아내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렸다. "안두희"는 철저한 위장으로 은신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권중희"는 기어이 그를 다시 찾아냈다. 여전히 안두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년 후, "안두희"는 새로 만나 살게 된 여인과 함께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그는 비밀리에 "미국 이민 수속"을 밟아 놓은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미국 대사관의 이민 입국 심사"를 통과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그는 무서운 조국을 떠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 하고 있었다.

그가 짐을 끌고, 막 개찰구로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네 이놈, 안두희!" 호통과 함께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노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 "권중희"의 얼굴도 보였다. "세상이 여전히 쉬운 줄 알았더냐." 출국장에서 다짜고짜 "안두희"를 끌어낸 노인들은 그를 "백범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로 데려갔다.

노인들은 "안두희"에게 진상을 털어놓는 것이 바른 참회이며, 그것이야말로 곧 속죄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안두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② 박기서 (46세ㆍ朴琦緖ㆍ정의 봉 사용ㆍ부천 소신여객 버스기사)

1996.10.23일 오전 11: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기사였던 당시 46세의 "박기서(朴琦緖)"가 휘두른 "정의 봉"에 의해 피살당했다.

"안두희"는 "인천"에 있는 한 허름한 아파트로 피신했고, 두문불출하며, 철저히 은신하는 삶을 살았다. 집요하게 추적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는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그나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안두희의 처"가 슈퍼에 가려고, 아파트 문을 나섰을 때였다. "한 노인"이 "안두희의 처"를 밀치며, 무작정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인천과 인접한 도시인 "부천"의 버스기사 "박기서"였다. "박기서"의 몽둥이에는 "정의 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법원 형사 2부"에서 "3년 확정 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각계의 구명운동으로 2년 만에 풀려나왔다. 2년이지만, "안두희"의 복역기간보다는 긴 것이었다. 그는 다시 버스 기사로 돌아갔다. 그가 다니던 버스회사의 이름도 "소신여객"이었다. 물론 그 "소신(所信)"은 아닐 터였다.

< 한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 버스 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집에 돌아간 나는 잠깐 눈을 붙인 후, 새벽 3시경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에 넣고, 안두희의 집으로 갔습니다.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시간을 노렸던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틀렸나 보다하고 있는데, 마침내 문이 열렸습니다. 오전 11시 경이었어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는 일어나 나를 노려보았어요. "네가 백범 선생을 정녕 암살했느냐?"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안두희는 무언으로 시인하는 듯했습니다.

• 암살 사실은 쉽게 시인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안두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라고 나는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안두희"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분명치가 않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짐작으로, 자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너를 처단하겠다."고 말했는데, 마침 "안두희 처"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뒤쪽을 쳐다보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더니, 아파트 문이 열려 있는 겁니다. 

내가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나는 "안두희"의 큰 키와 주먹을 보고 위압감을 느꼈지만,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적개심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몽둥이를 내리쳤습니다. "안두희"는 쓰러졌습니다.

나는 "안두희 처"를 다른 방으로 보냈습니다.  "안두희 처"는 내 눈에서 살기를 느꼈는지, 자기는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거실로 나와, "안두희" 앞으로 가서 섰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보이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 주려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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