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④ 김구 피살 ③ 홍종만의 양심선언

by 당대 제일 2022. 9. 21.
반응형

 

1949.06.26일 12:36분, "김구 (金九ㆍ1876~1949ㆍ72세)"는 서울 자택인 "경교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시각, "김구"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왔으니, 그는 바로 육군 포병사령부 소위인"안두희 (安斗熙ㆍ1917~1996ㆍ78세)"였다. "안두희"는 당시 군복 차림을 하고 "경교장"에 와서 비서진에게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비서진들의 안내에 따라 1층에서 대기하였다.

 

1. 1971년 , "홍종만 (암살 하수인 관리ㆍ"백의사 특공대원)"의 양심선언

범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만, 돌이켜 보면, 악몽과도 같은 인생 행로였다25년 전, "정치 잡배들"의 꾐에 말려들어, 그전에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백범선생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나는 막상 "선생"이 같은 행동대원의 한 사람인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신 직후부터 깊은 후회와 번민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살아생전 어느 때고, 꼭 한번은 국민 앞에 속죄하고 모든 진상을 밝히겠다고 마음먹어 오던 차에, 사건내막을 털어놓게 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으면서도, 국민 앞에 그저 양심이 부끄러울 따름이다이제 내가 아는 범위에서나마, 국민 앞에 속죄하는 뜻에서, "백범 선생의 암살음모"에 얽힌 참 내막을 모두 털어놓고,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밝게 살아보려 한다.

2. "홍종만""안두희 (조카 사위 뻘)""한독당"에 입당시켰.

"평북 의주"가 고향인 나는 "815 해방" 직후 월남해서, "서북청년회 태평지구 특별 분회원"으로 있다가 사건 해인 1948.11, 우연한 기회에 "한독당 훈련부장 백낙천(白榮昊)"의 소개로 동료 30여 명과 같이 "한독당"에 입당했다나는 당시 "서울시청 고원"으로 근무하며, "태평로"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 즈음 조카 사위 뻘인 "안두희" "서청"에서 "포병 소위"로 입대하게 되어, 같은 건물 안에서 사는 그의 가족들을 돌보게 됐다.

하루는 내가 "백범일지""안두희"에게 보였더니, 몹시 흥미를 가지며, 자기도 입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 가깝게 모시던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金學奎)"씨에게 간청해서 "안두희""한독당"에 입당시켰그 당시는 "한독당"에 입당한 "서청원들"이 모두 "김구 선생"을 숭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안두희"가 당원증에 "()"를 하나 눌러달라고 하기에, 반대하는 "김학규"씨를 설득시켜, "()" 도장을 하나 찍어주도록 했다. 당시 "한독당""비밀당원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3. "김지웅 (거물 고급 정치 브로커)"을 소개받았다.

어느 날, 한독당 "백영호"씨가 "김지웅(金志雄)"이란 사람을 내게 소개했다. 1949년 초로 생각된다몸이 좋고,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김지웅"은 나와, 몇 번 만난 어느 날 "비밀히 말할 것이 있다"면서 "시청" , 내 집으로 찾아와, "김구선생이 중국에 있는 자기 양자격인 "김은충 육군 소장"을 시켜 "모택동"에게 손을 잡자고 제의하는 편지를 전달하려 한다."고 귀뜸했다그때만 해도, "반공"이라면, 물불을 못가리던 나는 "김지웅"의 말에 넘어가, "김구 선생"이 빨갱이와 손을 잡을 수 있느냐고 속으로 분개했다.

"백범 선생" 암살 후에 생각해보니, 그때 "김지웅"의 그 같은 속삭임은 "김구 선생"에게 반감을 갖도록 하는 술책이었음을 깨달았다"안두희""태평로 서청사무실"에서 내가 "김지웅"에게 소개했는데, "김지웅"이 퍽 호감을 갖는 눈치였다그 후, 셋이 "요정" 등에서 자주 어울렸으며, "김지웅"에게 용돈도 받아썼다.

어느 날, "김지웅"은 나에게 "김학규씨는 안두희의 입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나중에 안 것이지만, 안두희가 퍽 이용가치가 있게 보였던 것 같다김학규(1900~1967): 독립운동가한국광복군1948년 남북협상 반대김구와 갈등하던 중,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 주었다가,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는다.

4. "김구 선생"과의 만남

나는 처음 "김학규"씨 안내로 "백범 선생"에게 인사했고, 그 후 한번은 "안두희"와 같이 가는 등, 서너 번 "백범 선생"을 만났다그러나 "백범 선생이 공산당과 손을 잡는다."는 소문에 다소 숭배하는 마음이 없어진데다, "김지웅" 을 물 쓰듯 하는데, 그만 매혹이 돼버려, 사실 어느 샌가 "김지웅"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됐다.

당시 "시청" 뒤에 있던 내 집에는 2칸 방이지만, 같은 고향의 선후배 되는 "군인 서청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그중에서도 "오병순한경일강창걸" 등 육군 소위와 "한국영이춘익독고녹성정익태한국상봉수" 등이 자주 찾아왔으며, 이들은 대부분 독신들이라, 내 집에 며칠씩 묵기도 했다"김지웅"의 각본에 말려 들어간 우리들은 1번에 3~ 4만원씩 갖다 주는 돈을 몇 천 원씩 나누어 쓰기도 하고, 술도 먹고 하다 보니, "김지웅"의 부하 비슷하게 돼버렸다.

"김지웅""거물 정치브로커"로 알려졌으며, "행정부경찰"과도 잘 통했다. 한번은 잘 아는 모 교수가 "문학가 동맹"에 가입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어, "김지웅"에게 석방을 힘 써 달 했더니, 그는 나를 데리고 바로 "김태선 시경국장실"로 찾아가 부탁했는데, 금방 효과가 나타나 풀려 나왔다당시 "행동대원"이란 명칭은 없었지만, 우리 10명은 "김지웅"의 각본에 따라, 시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졌다.

5. 당시 우리 행동대원 10명 중에는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만이 권총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안두희" 우리에게 "45구경 권총"의 성능에 대해 설명해주어, 내가 "우리 전부 권총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다그랬더니 "김지웅"은 곧 "장은산(포병사령관)"에게 말해, 하루는 "안두희"를 시켜, "45구경 권총 9자루" 보내왔다. "행동대원" 중 민간인인 우리들은 불법소지인지도 모르고. 그 권총을 신이 나서, 품고 다니게 됐다우리 행동대원들이 무기를 지급받게 된 것은, 바로 "백범 선생"이 암살당하기 2달 전쯤인 1949.04월경의 일이다.

어느 날, 우리는 "우이동"에 가서. 10여발씩 "사격 연습"을 했다당시 나와 "안두희""태평로 시청" 뒤에 가족과 함께 살았고, 다른 독신자들은 모두 "북창동"2평 다다미방을 하나 얻어 기거했으므로, 독신자들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사격연습을 나갔으나, 나는 빠졌다

"김지웅"은 수시로 "행동대원"의 생활비를 조달해왔으며, "특별 야간통행증"도 경찰에서 떼서 왔다우리들은 서로 따로따로 있다가, "김지웅"의 지시가 있으면, "김지웅"의 계동 집이나, 우리 집이나, "창동"에서 만났다솔직히 말해서, 사건 얼마 전쯤만 해도 나는 "백범 선생 암살음모"에 우리가 이용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고작 생각했대야, 우리를 훈련시켜 "김일성"을 죽이려 "이북"에 보내거나 빨갱이를 잡는데, 이용할 것으로만 생각했다.

아마 이때 "김지웅"은 벌써 "장은산" 등과 "백범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 같다"김지웅"은 경찰에도 자주 드나들었으며, 우리 "행동대원" 주변에는 항상 "경찰"이 맴돌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6. "김지웅"의 술책에도 넘어갔지만, 그 무렵 사실 나는 "한독당 노선"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한독당""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아, "남북을 통일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갔다나는 "한독당원"이었기 때문에, "행동대원들"과도 자주 어울리는 반면, "김학규씨(한독당 조직부장)" "한독당 인사" 등과도 수시로 접촉했다특히 "김학규"씨와는 자주 점심과 술도 같이 했는데, 어느 날 "김학규"씨는 "천하가 통일되면, 홍동지에게도 한자리 주지"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품고 있던 "한독당"에 대한 회의는 이 한마디로 더욱 짙어졌다. 나는 "반공정신"에 만은 투철했다.그래서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그 후부터 "한독당" 내에서 얻어지는 이상한 정보는 "김지웅"을 통하거나 또 내가 직접 "김태선 시경국장"을 찾아가 알렸다이 정보 중에는 지금 말할 시기가 아니지만, 엄청난 사건들이 많다.

"김지웅""한독당원"이던 나나, "안두희"를 이용하기 위해, 우선 "한독당의 노선"에 회의를 품게 해서, 사상적으로 돌려놓게 하는 비상한 머리를 썼던 것 같다"김지웅""반공정신"에만은 투철한 것 같았는데, 우리를 만날 때마다, "백범 선생의 사상 이념" 대해 심하게 비판했고, 욕도 했다.

다른 대원에겐 비밀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백범 암살 음모""장은산김지웅안두희"에 의해, 꾸며지고 있었다날짜는 잘 기억할 수 없으나, 우리가 "백범 암살 음모에 가담해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나는 한편으로 놀랐지만, 또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나는 결과적으로, "한독당의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7. 거사계획이 세워졌다.

1949.06.23일 밤을 틈타, 당시 "백범 선생"의 숙소인 "서대문 경교장"을 습격하기로 했다"경교장" 내부는 "한독당원""안두희"와 내가 몇 번 드나들어, 대충 알고 있었다이날 행동에 나설 대원은 "안두희"를 위시해서, "한경일오병순강창걸" 등 군인 4명과 "이춘익익태한국영" 그리고 "운전사 허모씨" 9명으로 정해졌다처음에는 "스리쿼터"를 타고 가기로 했으나, "허모씨""정익태""스리쿼터 운전"에 서툴러 "찝차 2"에 나누어 타고,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1949.06.23.일 밤, 우리 "행동대원" 일행은 2대의 "짚 차"에 나누어 타고, 밤이 어두워 "경교장" 근처에 다다랐다우리는 "신문로" 마루턱과 "서대문 4거리" 사이를 몇 바퀴 돌며, "경교장" 주위의 분위기를 살폈다인적은 뜸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두희"는 당초 "김지웅"에게 "경교장"을 습격할 땐, "정문 보초순경 2"해하고, "정문"으로 막 바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으나, 무너진 뒷담 쪽을 통해 들어가도록 행동방침이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 거리에서 차에서 내려, "경교장" 뒷담 쪽으로 갔다그곳에는 담 벽이 무너져 내린, 돌 깎는 장소가 있었다.

"안두희"가 앞장서서 "경교장"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안두희가 섬찟 놀라, 다시 돌아 나왔다들어가다 보니, 황소만한 셰퍼드 1마리가 메어져 있더라는 것이었다"안두희"는 다른 행동대원 일행을 담밖에 숨어있게 한 뒤, 어디로 가더니 조금 있다 쇠고기 튀김을 왔다. "안두희" 담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 튀김을 "셰퍼드"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그러나 개가 그것을 먹으려 하지 않고, 짖으려고 으르렁대기 시작하자, 우리는 다시 담 밖으로 밀려날 밖에 없었다. "오병순"이 먼저 "오늘은 틀렸으나 가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너도나도 "가자, 가자"하고 의견이 일치되어, 그날은 실패하고 돌아오고 말았다당시 "포병사령관 장은산 중령"은 폐가 나빠졌다는 이유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었다이날 행동이 실패로 돌아간 사실을 보고받은 "장은산"은 당장 "안두희오병순" "군인 행동대원들" 불렀는데, 이들은 호되게 기합을 받고, 돌아왔다.

8. 2차 실행계획이 세워졌다 (수원 근처 병점 고개)

날짜는 "1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틀 뒤인 25일로 정해졌다이날을 "2차 실행일"로 작정한 것은 "한독당원"이던 내가 결정적인 정보를 "김지웅"에게 알렸기 때문이다나는 그 전날, 마침 "백범 선생"25"건국실천양성소 개소식"에 참석키 위해, "경교장"을 떠나 승용차 편으로 "공주"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 사실을 "김학규"씨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김지웅"에게 알렸더니, "김지웅""백범 선생""공주행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가 처지 해 버리도록 우리에게 지시했다"2차 때"의 행동대원은 "안두희한국영오병순강창걸운전사" 6명으로 줄였다"짚 차" 1대에 탈 수 있는 인원으로 제한했던 것이다.

우리 "행동대원"은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 "수원 근처 병점 고개"에 가서 잠복했다"짚 차"는 길가에 세워두고, 고장이 난 것처럼, 책으로 한쪽 바퀴를 들어 올려 두었다"백범 선생"이 탄 차가 스쳐가려고 할 때, "안두희오병순"이 가로막아, 무조건 차내로 총을 쏴, "백범 선생" 살해하고, 차에 불을 지른 다음, 도망치는 계획이 짜여졌다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백범 선생"이 탄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우리는 초조하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하여, 근처 오이 밭에 들어가 오이를 따먹기도 했다2시간은 더 지났을까. 멀리 "서울" 쪽에서 1대의 "짚 차"가 달려왔다.

그 차에 타고 온 사람은 당시 "포병사령부 장은산" 밑에 있던 "정보참모 김모 중위"였다그의 말이 "백범 선생의 공주행이 취소됐으니, 그대로 올라가자"는 것이었다뒤에 안 일이지만, 경찰이 "한독당의 건국실천양성소 개소식"을 못하도록 방해해, "백범의 공주행"마저 취소됐다는 것이었다나는 "백범 선생"을 살해하기 위해, 행동대원들과 같이 "병점 고개"에 가서 기다리는 동안, 막상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김모 중위""백범선생의 공주행 취소"를 알려올 때는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울로 돌아온 뒤, "서울대학병원"에 있던 "장은산"은 이 사실을 보고받은 노발대발했다는 것이다"2차 계획"까지 실패로 돌아가니, 몹시 초조했던 모양이었다"장은산"은 이번엔 "안두희" 만을 호통을 쳤는데, "장은산"은 이때 "다음번에는 김구가 죽든지, 네가 죽든지, 둘 중의 하나다"는 극언까지 했다고 들었다.

9. 1949.06.26, "경교장"에서는 끝내 "백범""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수원 병점 고개"에서의 "백범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음날 나는 집에서 하루를 쉬게 됐다일요일(1949.06.26)인데다가, 날씨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우리 집은 "태평로"에 있다가, "삼청동"으로 이사를 한 뒤였다이날 "문산 모 부대"에 근무하던 친구 "박윤근"이 찾아와, 우리들은 오래간만에 집에서 소주를 함께 나누며, 시국담을 했다.

이날 정오를 조금 지나, "경교장"에서는 끝내 "백범 선생""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야 말았다나는 이날 낮 2시경 집에 있다가, 이 소식을 알았다. 뜻밖의 일이었다"안두희"가 이날 혼자서, 범행을 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안두희"는 그 전날 "장은산"에게 불려 갔을 때, 이날 혼자서 "백범"을 암살하도록 지령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날 "수원 병점 고개"에서 돌아온 후, "장은산""안두희"를 불러, 3차는 그가 단독으로 행동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안두희""백범"을 암살하러 "경교장"에 나타나는 이날 아침 일찍, 미리 현장 분위기를 살피도록, "한독당원"인 나를 "경교장"에 보내게 돼 있었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안두희""홍종만 보다, 내가 경교장 내부 구도를 더 잘 안다"고 말하자, "3차 범행"은 전적으로 "안두희" 혼자에게 맡겨졌다.

"안두희"26일 범행 날 아침, "태평로 집"을 떠나, 먼저 "계동 김지웅"의 집으로 짚 차를 몰았다고 한다그런데 도중에 "운전사 허하사"가 자칫하다 어린이를 칠 뻔하자, "안두희"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하며, "짚 차"를 놔두고, 다른 차편으로 "경교장"으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백범 선생"의 암살소식으로 온 장안이 물 끓듯 소란해진 이날 오후 늦게까지 나는 집에 박혀 있었다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 없었다비록 이번 범행에는 함께 가지 않았다 해도, 어째든 나도 오래 전부터 이 음모를 꾸며오던 공모자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10. "백범 선생"이 암살된 뒤, "종로서"로 연행되었다.

이날 저녁때쯤, "종로경찰서"에서 나를 잡으러 왔다. "종로서"로 연행됐다그곳에는 "이춘익한봉수"도 와 있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형사들은 취조도 하지 않았다1주일가량 경찰서에서 지냈고, 나는 "수송국민학교" 옆에 있는 한 병원으로 옮겨졌다그곳에는 잡혀간 "안두희"만 빼 놓고, 우리 "행동대원" 모두 드나들게 됐다나는 "안두희"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이 병원에서 지냈다. 병원비는 물론 "김지웅"이 모두 댔다병원에서 나온 후, 나는 다시 "삼청동"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행동대원들은 "김지웅""장은산"으로 부터 접수한 "후암동 반 양옥집"에서 지내게 됐다

우리 행동대원들은 범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나면, 그 대가로 충분한 생활비와 좋은 일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 "김지웅"의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백범 선생"이 암살된 뒤, 그의 약속은 달랐다"김지웅"은 우리 행동대원을 먹여 살린다는 구실로, 모처에서 돈을 뜯어다가는 자기가 쓰고, 우리에게는 제대로 내놓지 않았다.

하루는 악만 남은 행동대원들이 "김지웅""후암동 집"에 가두고, 행패를 부렸다행동대원들은 팬티만 남기고, "김지웅"의 옷을 홀랑 벗긴 채, 권총을 겨누며, "돈을 받아다 어디에 느냐"고 죽일 듯 위협하자, 그는 와들와들 떨었다이날 뒤늦게 "후암동"에 들렀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 나는 행동대원들을 달래어 "김지웅"을 돌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모 씨"에게 불려갔다그는 내게 "갖고 있는 권총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내가 "권총을 줄때는, 언제고 달랄 때는 언제냐"면서 호통을 쳤더니, "최모 과장"은 나를 달래면서, 2만원을 주었다.

11. 돌이켜보면, 모두가 악몽과도 같았던 과거였다.

나는 "백범 선생"의 암살음모는 "정치적 의견차이가 빚어낸 것"이라고 그때부터 생각했다"안두희" 재판 때, "김지웅"은 내게 증인으로 재판정에 나서거든,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씨가 한독당원을 공산당 식으로 점 조직하도록 코치했다"고 허위증언을 하도록 지시했으나, 나는 그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 "백범 선생" 암살 직후, 나는 나도 모르게 "한독당"을 탈당하는 성명서를 낸 것처럼 세상에 알려졌으나, 그 탈당성명도 "김지웅"이 경찰과 상의해서 꾸며낸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모두가 악몽과도 같았던 과거였다"419혁명"이 일어난 후,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산대구울산오산" 등지로 숨어 다녀야 했다이제 세월도 어느덧 25년이나 흘렀다그러나 지금이나마, 모든 진상을 털어놓으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그렇다고 내가 지은 죄를 용서만 받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벌을 달게 받을 각오가 돼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