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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⑥ 조봉암ㆍ진보당 (1959.07ㆍ사법 살인)

by 당대 제일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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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07.31일,  "조봉암 (曺奉岩ㆍ1899~1959ㆍ59세죽산(竹山))"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ㆍ간첩죄" 혐의로 체포ㆍ조봉암을 사형 집행한 사건으로, 제2대 대통령선거(1952.08.05)와 제3대 대통령선거(1956.05.15)에서 2위를 기록하면서 "이승만 (李承晩ㆍ1875~1965ㆍ90세)"의 라이벌로 부상하자, 1958.01월, "간첩죄ㆍ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하였다.

 

1. 진보당 조봉암 사건 (進步黨 曺奉岩) : 1959.07월, 대표적인 사법 살인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국가변란간첩죄" 혐의로 체포조봉암을 사형 집행한 사건,  2대 대통령선거(1952.08.05)에서 797504표를, 3대 대통령선거(1956.05.15)에서는 무려 2163808표를 얻은 "조봉암"1956.11.10"진보당"을 결성하고 지방에서 지역당 조직을 확대해 가자, "이승만 정권(당시 505만표 획득)"은 정치적 위협을 느꼈다.

1958.01.12"민의원 총선거"4개월 앞두고, "서울시 경찰국""진보당 간부들(조규희윤길중김달호이동화"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정부 전복 기도)"로 체포하였다. 1958.01.13, "조봉암"은 자진 출두 도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1959.07.30, 그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기각되고, 07.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2. 조봉암 (曺奉岩1899~ 1959.07.31향년 59)

독립운동가공산당 조직 활동(건국준비위원회)제헌국회의원농림부 장관 (1)국회 부의장 (2)ㆍ진보당 총재농림부 장관 재직 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 주관ㆍ"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는 동안, 줄곧 독방에 갇혀 있었고, 고문으로 손가락 7개가 동상으로 잘려 나가, 형무소 생활 중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하며, "박헌영"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 전향ㆍ"장택상 (수도경찰청장)"과 이념을 넘어,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 "대통령 선거(3)"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9상인 양명산의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변란간첩죄" 혐의로 체포조봉암이 사형 집행된다.

3. 사건 진행ㆍ죽산 조봉암의 생애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국가보안법 위반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1959.07.31일 오전 10: 30. 한 사형수에 대해 사형 명령. 15분 후인 오전 10: 45. "모시 저고리모시 바지"의 사형수가 현장에 도착, 가족들은 "형무소" 정문 앞에서 면회를 기다리고 있었다집행관이 집행 조서를 읽어나가는 동안, 그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사형이 집행된 순간은 11;03. 죄수 번호 2310, 독립운동가정치가로 평생을 살았던 "조봉암"이었다3년 전, "진보당 결당대회 개회사" , 자신의 정치 이상을 소리높여 외쳤다.

"그 시대에 맞고, 그 사회에 맞고, 그 인정에 맞도록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고침으로써,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게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을 가르켜서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1958, "진보당" 간부 검거령 ! 12대법원 결심공판 : 조봉암 사형 !

재판에 회부되기 전, 그는 "2 야당의 당수"였다. 바로 혁신개혁을 주장하며 창당된 "진보당"이었다1958.01.12,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체 검거령이 떨어졌다새벽, "서울시경 수사관들""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집에 들이닥쳤다그러나 그곳에 "조봉암"은 없었다이미 닷새 전부터 피신하라는 경고를 받은 "조봉암"은 바로 전날 친구 집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죽산 선생을 잡으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에 보내 줄테니까 본에 가겠는가?" 이런 얘길 했는데, "(NO)! 가다니! 내가 왜 가느냐, 죄지은 게 없는데 나 잡아가면 뭐 죽이겠냐!" 하셨죠." < 전세룡 (진보당 조직차장)>

다음날인 13. "조봉암""시경"에 스스로 출두한다저녁 기사에는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17명에 대한 체포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2 야당"의 간부 전원이 체포된, 해방 이후 최대 정치 사건, "진보당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문제가 된 것은 "진보당"의 정책강령, 그 중에서도 특히 "평화통일론"이었다"진보당""북한"과 야합할 목적으로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는 것이었다검찰은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간첩죄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우리는 안으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 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 진보당 강령 제4>

검거된 지, 2달 후인, 1958.03.13일 첫공판이 열렸다이 자리에서 "진보당"의 정책평화통일론에 대해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검찰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론"과 동일하다며, "진보당조봉암"을 압박했다.

"공산괴뢰가 먹는 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먹는 이라고 하지. 아니해야 한단 말인가 공산괴뢰가 통일하기를 원한다고 떠들면 우리는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해야겠단 말인가!" < 조봉암 >   그런데, 공판이 한참 진행 중이던 5. 재판의 내용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한다. 바로 "양명산"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양명산"1955년부터 남북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인이었다바로 "양명산"을 통해 "조봉암"이 북한으로부터 정치공작금을 받았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었다그가 받았다는 정치자금은 2,700만원이었다.

검찰은 "조봉암"이 돈을 받는 댓가로 "북한 정권"에 협조하기로 하는 등 명백한 간첩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양명산"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모두 시인했다. 하지만 "조봉암"의 주장은 달랐다"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양명산이 간첩이라는 것은 몰랐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다. 북괴공작첩보부대인 HID요원 "엄숙진"이었다"양명산"이 남북으로 오갈 때, 감시자 역할을 했던 "엄숙진""양명산"이 북에서 정치자금을 받아 남쪽으로 건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했다20여 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1958.07.01,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다검찰은 "조봉암"에게 "간첩죄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구형한 상태였다.  "윤길중(진보당 간사장)""간첩방조죄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당시로 봐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구형 문제는 내가 단독으로 할 수 없어 상부와 의논했다. 검찰총장, 대검의 정보부가 하고 우리는 사건 실명만 했다. 기본 방침은 거기서 나왔다 (구형량까지도 상부에서?) 그렇습니다. 일반 사건과는 다르니까." < 조인구 (진보당 사건 담당 검사) >

그러나 검찰의 구형과는 다르게, "재판관""진보당"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진보당"의 정책평화통일론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봉암"에게는 5년 형이 선고되었다"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간첩죄"에 대해선 무죄"국가보안법"으로 유죄였다"우리 1심으로서는 그런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군사기밀을 탐지하고 제보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무거운 행위는 아니다, "단순히 국가보안법 상에서 금지하고 있는 북괴와 협력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았죠." < 이병용 (진보당 사건 1심 배석판사ㆍ변호사) >

하지만 재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검찰은 재판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다재판 두 달째인 1958.09.04, "진보당 2심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처음에는 "조봉암진보당"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듯 했다첫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양명산"1심에서의 진술을 번복하고 나섰던 것이다"양명산은 특무대에서 말하는 대로만 하면 조봉암만 처벌받고 너는 괜찮다, 아마 그렇게 조정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1심에서 둘 다 똑같이 사형이 구형되어 버리니까 의아하잖아요. 죽게 되었거든. 그러니까 "특무대한테 꼬임에 빠져서 그런 것이지 사실 아니다" 그랬는데, 그게 이미 늦어서" < 이병용 >

"양명산"의 진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호인 측이 신청한 증인과 현장 검증 요구도 거부되었다다음달 열린 2심 공판. "진보당" 간부들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당수 "조봉암"에게는 더 무거운 형이 떨어졌다. "사형"이었다해를 넘긴 1959.01.2712:20. 대법원 결심 공판. 재판부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이 자리에 선 사람들은 모두 21. 그 중 17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그러나 "조봉암"2심과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그렇게 되고 나니까. "울 거 없다, 재판은 잘된 거다. 무죄 아니면 죽는 거지. 다른 방법이 없잖아. 정쟁이라는 거는 그런 거다" 하셨어요." < 조호정(조봉암 딸)> "이박사가 나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평화통일 운동을 하다 이렇게 떳떳이 죽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 조봉암, 사형집행 전날 진보당 간부들과의 옥중 대화 중 >

정책강령 문제로 시작된 "진보당 사건""간첩죄 판결"로 막을 내렸다그리고 5개월이 지나서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언론사 앞으로 보도 지침을 보낸다. 바로 사형수와 가족들에 대한 일절 보도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그만큼 민심의 동요를 우려했던 것이다반면 해외에서는 "조봉암의 죽임"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영국" 한 언론에서는 "무고한 조봉암의 목에 오랏줄을 매서 정적을 말살했다"고 비난했다이렇게 국내외의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승만"이 "조봉암"을 제거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까?

1954, "사사오입" 개헌안! "이승만의 중임 제한" 철폐!  1956,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의 혁신" 구호

1954.11.27. 국회에서는 "개헌안"에 대한 개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개헌 내용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승만"이 다음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게 하는 개헌안이었다. 결과는 부결(否決)이었다.

개헌안 통과에 단 1표가 모자랐다그런데 다음날 해괴한 산술이 등장한다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는 135.3. 0.31명이 될 수 없으니 1/3선을 넘은 것이다하루 만에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뒤집혔다. 사사오입 개헌!  이 사건으로 정치권에 "반이승만 세력들"이 결집하기 시작한다그 해 12, 이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신당 창당을 추진한다.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 출신 의원들이 중심을 이룬 가운데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이 합류했다"조봉암"에게도 참여 요청이 왔다. 그는 적극적으로 신당 참여 의사를 밝혔다"이 운동을 위하여 나의 협조를 구하기에, 비록 미력하기는 하지만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조봉암 참여"에 대해서 "호헌동지회" 내에서는 입장이 엇갈렸다.

"장택상서상일""조봉암 참여"를 적극 지지했지만, "조병옥장면"은 전면 반대했다"민주당 쪽에서 조봉암에 대해 굉장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중성이라든가 조봉암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라든가, 그 세력이 들어왔을 때 오히려 내부에 있었던 민주당 내의 중요한 세력들을 유명무실화하면서 이 사람이 더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 박태균 (서울대 교수) >

"호헌동지회"로 시작된 신당 창당 운동은 1955.09.18"민주당"을 출범시킴으로써 결실을 맺었다그러나 "조봉암"은 새로운 당에 참여할 수 없었고, "조봉암"의 합류를 주장했던 팀도 탈퇴했다이들은 보다 새롭고 혁신적인 정당의 창당을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진보당(進步黨)"의 시작이었다그 해 12, "조봉암""서상일" 등과 함께,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킨다그러나 "진보당"의 본격적인 출범은 당장 눈 앞에 다가온 "3대 대통령 선거(1956.05)" 때문에 잠시 미뤄졌다.

선거는 "이승만(3선 도전하는 자유당 후보)ㆍ신익희(민주당 후보)ㆍ조봉암(진보의 기치를 내건 진보당)"의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선거를 20일 앞둔 1956.04.25일. "신익희ㆍ조봉암" 사이에 전격적인 회담이 열렸다. "신익희ㆍ조봉암"은 2대 국회에서 함께 "의장ㆍ부의장"으로 활동했던 사이였다.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결렬되었지만 5월초 후보를 "단일화를 발표한다"는 밀약이 있었다고 한다"밀약으로, 조봉암은 신익희한테 "내가 투표 전에 사퇴할 테니까, 그 대신 진보당을 말살하지 말고 같이 동참해서 뭘 하자"고 했고, 신익희도 당시로서는 굉장히 연로한 편이고 하니까, 후계를 노리고 그런 흥정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표가 되지 않았고" < 엄홍빈 (중앙일보 기자) >

"조봉암"은 선거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 노선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05.01"조봉암"이 내세운 "선거 공약 10"에는 이런 그의 노선이 분명하게 담겨 있다1번째로 내세운 것이 바로 "평화통일론"이었다"남북한에 걸쳐 조국의 통일을 저지하고, 동족상잔의 유혈극의 재발을 꾀하는 극좌극우의 불순세력을 억제하고,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성취한다." < 공약 10장 진보당 이것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제기된 "평화통일론"이었다.

또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국시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 한국 사회에서 표현할 수 있는 진보 사회의 최대값이기도 했다"이북 사람 다 죽이고 통일하고, 이북 사람 다 굶고 있는데 통일을 하고, 이남 사람 다 죽이고 통일을 하고 그런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민족이 자유스럽고, 번영하고, 그 다음에 평화스럽게 사는, 이런 것을 가져올 수 있는 통일이 바람직한 거지. 적어도 그것을 죽산 선생은 생각했던 거예요." < 김용기 (진보당 학생당원고려대 교수) >

"조봉암의 평화통일론"1954"제네바" 회담의 "남북한 통일 14개 원칙"과 맞닿아 있었다원칙의 골자는 "UN 감시" 아래, 남북이 동시 선거를 실시한 다음,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세계적 차원에서 미소 양국 냉전체제는 사실 더 견고해지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드러난 현상으로는 평화라고 하는 말들이 국제사회에서나 북한의 어떤 당대회에서나 자주 나오고 있던 단어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 또 마치 국제사회가 핵전쟁의 위기를 피하고, 전쟁은 절대 피해야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됨으로 해서 평화통일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는, 이러한 입장이 우리 사회에 수용될 걸로 생각한 거죠." < 조민 (통일연구원 박사) >

"공약 10"장에서 "평화통일론"과 함께, 또 하나 중요한 정책을 내세운다. "수탈 없는 계획경제"로 요약되는 경제 정책이었다. "6항 대중적 수탈정책을 폐지하고, 연차경제계획을 수립이 정책의 구체적인 계획 방안으로, 농민들에게는 농촌 고리대금을 일정기간 지불유예 해주고, 노동자들에게는 단체교섭권단결권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선거가 치뤄지던 50년대 중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빈곤이었다농촌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도시는 빈민실업자들로 넘쳐났다"대통령 선거"가 치뤄지던 1956년도 봄, 7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밥을 굶고 있었다하지만 정권은 그런 국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배만 불렸다.

대표적인 것이 "중석불사건 (重石弗事件)"이었다정부가 민간 상사에게 밀가루비료를 수입하게 한 다음, 농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판매하게 한 사건이었다궁핍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려고 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날이 갈수록 야당 후보들의 인기는 치솟았다. 특히 "신익희( 민주당 후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야당의 승리가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그러나 한강 유세를 마치고, "전주"로 내려가던 "신익희"는 기차 안에서 "뇌일혈"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는다. "국민장"으로 치뤄진 장례식에는 많은 국민들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신익희"의 죽음으로 유일한 야당 후보가 된 "조봉암".  그는 곧 "박기출(진보당의 부통령 후보朴己出ㆍ1909~1977ㆍ부산ㆍ의사)"를 사퇴시킨 후, "장면(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밝힌다. 그러나 "민주당"은 끝까지 "조봉암"과 손을 잡지 않았다

1956.05.12, "민주당""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져달라 호소한다. "추모표라는 고금동서에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것이 없었으면, 반 여당표반 이승만표가 죽산한테 쏠렸을 거 아닙니까. 민주당은 그렇게 될 경우에 차기 정권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지 이승만의 집권을 도울지언정 죽산의 집권은 도울 수 없다는 이런 건 확고했다고 봅니다."  < 엄홍빈 (당시 중앙일보 기자)>

닷새 후 1956.05.15. "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조봉암"은 선거에서 "이승만"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가 얻은 득표수는 216만 여표. 전체 유효 득표수의 20.5%였다이 선거로 인해, "조봉암"은 일약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게 된다"투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는 졌다" 선거가 끝났을 때, 한 해외 언론은 "조봉암"의 패배를 그렇게 설명했다.이 말은 개표 과정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저질러졌음을 암시한다동시에 "조봉암"이 선거에서 얼마나 "이승만"을 위협하는 인물로 떠올랐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기도 한다.

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 해방 후 극우도 극좌도 아닌 "3의 길" 선택

"4대 대통령 선거"1년 앞둔 1958"조봉암"이 사형대에 서게 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조봉암""간첩죄"를 적용받은 것은 그의 과거 전력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다"조봉암"은 해방 직전까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1931, 포승줄에 묶인 피고들이 "신의주 감옥"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봉암"도 있었다. "조봉암"1925"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였다"일본" 유학시절 처음 "공산주의"를 만난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공산주의자"로서 항일 운동을 해오고 있었다

"신의주 감옥"에서 7년 옥고를 치룬 "조봉암". 그는 다시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비 검속에 걸려 "예비헌병대"에 갇혀 있다가, 이곳에서 독립을 맞는다. 그 때, "헌병대"에 들어와 해방 소식을 알린 사람이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해방이 되자마자, 바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결성하고, 08.16"휘문고교"에서 "건준" 성립을 알렸다. "조봉암""해방정국"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고향인 "인천"으로 돌아온 그는 "건준 인천지부"를 주도적으로 조직했고, 9월 들어 "건준""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인천시 인민위원회"에 참여한다.

1946년 초, "박헌영"을 중심으로 좌익 계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을 때도, 그는 "민전 인천지부 의장"에 선임되었습니다. 이 때까지 그는 좌익 노선을 걷고 있었다그런데 1946.06, 전격적으로 전향을 선포한다"민전" 주체로 열린 한 시민대회에서 "조봉암" 명의의 성명서가 대량으로 뿌려졌다.

성명서의 제목은 "()공산 정부를 세우자!" 사실상의 "전향서"였다"조선 민족은 공산당 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으로 된 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으로 정권을 취하려는 정책은 단연 반대한다."  이 시기, 공산주의자에서 갑자기 전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봉암"은 전향하기 몇 달전, "박헌영"에게 편지를 쓴다"존경하는 박헌영 동지에게"라고 시작된 긴 편지였다편지에서 그는 "조선공산당"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그런데 "박헌영 1인 중심"의 당 운영인사문제를 비판한 이 편지는 1946.05.074대 일간지를 통해 공개된다. "첫째 무원칙하오. 둘째 종파적이고, 셋째 봉건적이오. 넷째 무기력하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박헌영에게 주는 편지 초안을 빼앗긴 거죠 정서도 아닌 편지 초안을.. 거기서 이제 그걸 공개를 한거예요 신문에" < 조호정 (조봉암 딸) >

이 비판 편지를 압수했던 "CIC(미 방첩부대)""조봉암"의 전향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향서"가 뿌려진 06.23일이 "CIC"에 잡혀갔다가 풀려난 바로 다음날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전향에 "CIC"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1948년에 했던 여론조사를 보면, 당시에 사회주의 쪽 인물 중에는 조봉암이 가장 명망이 높습니다. 아마 제가 보기에는 그쪽 계열에서는 여운형 다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측면들이 미군정 쪽에서는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봉암 쪽에서 미군정 주요 인사들을 만나달라 할 때, 미군정 쪽에서 만나주었죠. 당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미군정을 이용하지 않고, 또는 미군정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서 정치활동을 하기는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 박태균 (서울대 교수) >

"박헌영"에 대한 비판 편지가 공개되면서, "조봉암""조선공산당"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박헌영"과의 관계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조봉암"으로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독재를,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 ()공산 정부를 세우자! 중에서 >

사실상의 "전향서"가 되어버린 글에서, 그는 "자본독재ㆍ공산독재"를 둘 다 부정하는 "제3의 길"이 자신의 길임을 밝힌다.그러나 전향한 "조봉암"은 자신과 비슷한 노선을 걷고 있던 "민족주의" 계열의 움직임에 동참할 수 없었다"김구김규식" 등이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동참하기 위해 38선을 넘었을 때도 그는 그곳에 없었다"핵심적으로 봐야 될 건 그건데, 조봉암은 남북협상에도 참여를 못하는 겁니다. 왜 못하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북한의 2인자가 박헌영으로 있는 상황에서 조봉암이 북으로 올라갈 수가 없어요." < 박태균 (서울대 교수)>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농지개혁 2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1948.05.10. 남한만 "단독정부 선거"가 열렸다새로운 정치노선을 모색하던 그는 결국 다른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단독정부"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인천"에서 출마해, 큰 표 차이로 당선된 그는 이로써 정치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초대 내각 "농림부장관"으로 "조봉암"을 임명한다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이승만"의 장관직 요청을 수락했다그는 이후 "지주자본가" 중심의 "한민당"과 맞서 나가기 시작한다"사실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이승만쪽이 아니구요, 민주당 계열이거든요. 한국민주당 계열이 조봉암의 눈에는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기득권층이다, 이렇게 바라봤던 거거든요." < 박태균 >

"농림부장관"이 된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농촌문제였다. 첫 시험대는 "농지개혁"이었다자신의 땅 1평을 가져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대다수의 농민들.  농지개혁은 그런 소작농들에게 경작지를 분배하는 정책이었다"농지개혁법"을 실현하기 위해, 농림부의 직원들과 함께 심혈을 기울였다"한민당"이 지주들에게 유리한 "농지개혁법 안"을 내놓았을 때, 그는 농민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제시하며 맞섰다.

"농지개혁법"과 더불어 열성적으로 일했던 것은 "양곡매입법"이었다"양곡매입법"은 정부가 추수한 양곡 전량을 다 들이는 지금의 "추곡수매법"이다그는 이 법의 추진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장관실, 그가 앉았던 양 벽면에는 각 도별로 "양곡매입 실적"이 표시된 커다란 도표가 걸려 있었다"내가 근무하면서부터 어쨌든 가장 인상 깊은 게, 그 기둥 그래프가 굉장히 굵은 게 그게 늘 올라가면 올라가는 대로, 장관님(조봉암)이 아주 그 만족스러운 흡족한 그런 표정을 지으셨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생생한 건 이쪽 벽 전체를 채운 그 기둥 그래프예요." < 김제영 (조봉암 여비서)>

1948.10.09, "양곡매입법"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미군정"이 실시했던 "쌀 수직정책"이 계속되고 있었다"쌀수직 정책"이란, 농민들에게 쌀을 무상으로 거둬들인 다음 다시 배급하는 정책을 말한다농민들은 "일제 시대 강제 공출"과 비슷하다며, 이 정책에 반발했다"강제 공출에 반대 기세세홉 배급이 최대 급무오늘부터 세홉 배급잡곡이 2.4홉에 쌀 겨우 0.6"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쌀을 전량 사들이는 "양곡매입법"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추수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가난한 농민들은 중간 상인들에게 쌀을 미리 팔아버리는 상황이었다"모리배의 매점 등으로 매곡 성적이 부진"거시적 차원에서 정부차원의 양곡정책이 안정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결국은 매점매석 또는 중간 상인의 수탈, 착취가 없는 것은 기층 민중의 생활상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법은 실현되는 것이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죠." < 조민 (통일연구원 박사)>

결국 "양곡매입 실적의 부진부당하게 씌워진 공금횡령" 때문에, 취임 6개월을 넘기지 못한 채, "농림부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49.02.22일 농림부장관 사임독립운동을 하며 얻은 동상고문 휴유증으로 "오른쪽 손가락 셋"은 마디가 잘려져 나가 있었다.  "농림부장관" 시절, "김제영 (조봉암 여비서)"은 부족한 손가락으로 볼펜을 쥔 채, 꼿꼿히 앉아 업무에 열중하던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비록 6개월여 만에 "농림부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에도 "국회의원"으로서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쓰는 데 앞장섰다당시 80%가 넘는 농민을 위한 정치는 바로 대다수 국민을 위한 정치였다1950년대가 넘어서면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정치 이념을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첫 무대는 1952"2대 대통령 선거"였다전방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던 1952.05.22.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출근하던 47명의 "국회의원"은 타고 있는 버스 채로 "헌병대"에 끌려갔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그 날 오후, "신익희(국회의장)조봉암(국회부의장)"은 급히 "이승만"을 찾아간다"이승만"은 이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1952.05월은 "대통령 선거"가 불과 3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그리고 "이승만" 측이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국회"에 상정된 때이기도 했다.

"이승만""국회의원들"을 위협함으로써, "직선제 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노렸던 것이다"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해서라도 이걸 통과시켜서 "대통령은 내가 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이거예요. 이승만이 "내가 해야겠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승만의 "내가 해야겠다" 하는 생각은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거예요. 미국하고 뭔가 맞는 데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히다가는 무슨 큰 사고가 난다, 그러니 여기에서 알맞게 타협을 해야겠다는" < 정태영 박사진보당 의원 >

"이승만"의 의도대로 "직선제 개헌안"은 통과된다사상 최초로 치뤄지게 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 "조봉암"도 이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도대체 이승만하고 대통령 선거를 해서 이기리라고 생각하느냐? 이기리라고 생각하면 그 머리로 대통령 못하고, 한 번 대통령 후보 됐던 이름이나 남기자 하면 목숨 걸 일을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느냐? 그 때 얘기했어요. "이박사하고 비교가 안 된다'는 거야, 자기는. 그러나 다만 우리가 남북 문제나 국가적인 것을 볼 때,이승만 정권이 저대로 나가다가는 안 된다는 자기 소신으로 이렇게 나온 거다"고 했어요." < 강원룡 목사 >

후보 등록 마감일은 07.26, 선거일은 08.05일로 잡혔다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날은 9.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을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날짜가 9일 밖에 없는데 그걸 대통령 선거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도 해야 하니까 플래카드 어떻게 하고. 저는 저대로 선전하느라고 마이크 잡고 다니고, 그랬어요 젊고 패기있고 정직하고, 이 분을 뽑자고. 골목을 다니고 그러면 막 박수 소리나고 그래요 힘을 얻고 다니고, 그렇게 며칠 다녔어요." < 조호정(조봉암 딸)>

조봉암은 신문에 광고를 실어 자신의 정견을 알렸다"이대로 살 수가 없다", 그가 내세운 정견은 "혁신"이었다"우리는 이대로 더 4년을 살아갈 수 없다. 대통령으로 혁신정치가 조봉암 선생을 선출하자이때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체제극우반공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이웃은 내 편 아니면, 적이 되어버렸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많은 국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처벌을 받았다조봉암이 말하는 "혁신"은 이 암울한 시대를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극우극좌"가 만연하고, "부정독재"가 만연한 사회 대신, 동포가 서로 화합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었다. < 이승만 : 4,969,299조봉암 : 762,772이 선거 운동을 통해, "조봉암"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시켰다큰 표 차이로 2위에 머물렀지만, 이 선거로 "조봉암"은 많은 것을 얻었다.

기존의 자유당민주당에 맞서는 새로운 혁신정당 "진보당"의 행보! "이승만"의 탄압

"2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진 1950년대 초반은 "극우 냉전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던 시기였다하지만 이 선거에서 "혁신"을 기치로 내건 "조봉암이 선전했다는 것"은 해방 공간에서 분출되고 있었던 "개혁과 혁신"에 대한 열망이 아직 식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4년 후, 1956"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다그리고 "3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한국 진보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게 된다.

1956.11. "진보당"의 결당대회가 열렸다. 당수로 뽑힌 그는 "진보당"의 정식 출범을 세상에 알린다"오늘 이 자리에서 사회개조의 원리인 진보사상을 주장하는 우리들이 일당을 해서 역사적인 회합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동지들이라고 부르는 기쁨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 진보당 결당대회 개회사 >

"죽산 선생께서 "내가 정치행동을 하면서 동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내가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면서,눈시울이 붉혔던 그것이 제 눈에 선해요." < 허영무진보당 서울시당 조직부장 >

"자유당민주당"이라는 두 기존 정당에 맞서는 새로운 혁신 정당, 진보당의 출범그것은 2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조봉암진보당"에 대한 대중적 지평이 그만큼 넓어졌기에 가능했다"진보당"에 모든 혁신세력들이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진보당""혁신의 기치"를 높이 걸고, 양심에 따른 선거 운동을 했다.

"3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부각된 "평화통일론""진보당"의 가장 중요한 기치였다"조봉암"이 전향 직후부터 견지해온 "3의 길""진보당 기치" 아래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뭉치자 혁신세력이룩하자 평화통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 같이 거부하고 청산하는 동시에, 우리들의 이상인 복지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새 이상을 파악하고 이론적으로 뭉친 정당은 필연적으로 광범한 근로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피해 대중의 전위대가 되는 것입니다." < 조봉암 "피해 대중이라고 한 것은 그 당시에 국민 대다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관료 독점 자본주의가 완전히 지배를 하고, 나머지 국민은 전부가 피해 대중에 속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 정태영 박사 >

또 하나의 중심 정책은 "수탈없는 계획경제"였다이것은 "연도별 경제발전 계획"을 세우되, 국가의 자본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제를 적절히 한다는 것이었다"정당이 어떤 파벌이나 지역에 근거하기보다는 당시의 국민 대중이 원하는 정책을 파악해서, 그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당을 꾸려가고 정치를 한다라는 부분이 역시 저는 진보당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태균 교수 >

그러나 "진보세력의 결집"은 "이승만 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창당 대회 직후부터, "진보당"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정당 등록증"6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교부받을 수 있었고, 지방에서 열린 "지구당 결당대회"는 깡패들의 난립으로 제대로 치뤄지지도 못했다"전북도당에 갔을 때는요, 꼭 죽게 됐다고. 또 그 쪽에 테러, 밤에 나타나는데 말이야 "야 이 공산당 새끼들아"하면서 불 끄고 그래서 그때 내가 혼자 잤으면 죽었는데, 둘이 잤거든요 내가 같이 잤던 사람이 밤에 테러단이 들어와 때리니까 저항했단 말이에요. 나는 그 틈을 타서 속옷 바람에 여름인데 뛰어서, 담을 넘어서 도망쳐서 살았어요." < 전세룡 (진보당 조직차장)>

1957년부터는 "조봉암"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시작되었다.

10, 혁신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박정호"라는 인물이 "위장간첩"이라는 명목으로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를 넘긴 1958.01.12"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다이때부터 "시경찰국 분실"에서는 "진보당"의 강령을 공산당 이론과 연계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체포된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고문도 행해졌다. 이것은 상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전세룡(진보당 간부)"의 수사를 맡았던 "한승격(서울시경 수사관)"은 지난 1999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당시 일을 고백하며 사죄를 구했다"나를 고문한 사람이, 한승격이라는 사람이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면서 내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구요 청와대(경무대)특무대경찰, 이렇게 합동으로 해서 청와대(경무대)에서 회의를 했는데, 조봉암이가 515 대통령 선거 때 표가 너무 많이 나와서, 1960년 다시 선거하게 되면 그때는 이걸 막지 못할 거 아니냐,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 전세룡진보당 사건은 조작됐다(1999.08.18.일자 동아일보) >

"진보당 사건"이 터진 직후인 1958.01.14. "이승만"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경무대"에서 사건을 보고받은 "이승만""조봉암"을 두고,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이 조사가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 < 신두영 (1공화국 국무회의 비망록) >

리고 1년 뒤, "대한민국 사법부"는 법의 이름으로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조봉암 (曺奉岩)양명산 (梁明山)에 사형" < 진보당 사건대법원 최종 선고1959.02.27 > "진보당의 강령""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간첩 조봉암"이 조직한 단체라는 이유로 "진보당"도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진보당"의 정당 등록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도 전에 취소되었다이 사건에 대해 다른 정당들은 입을 닫았다

"진보당에 대해 탄압이 들어오고, 조봉암에 대해서 탄압이 들어오는데, 이게 혁신세력이라고 해야 사실 많지도 않은데, 이 세력마저 분열되어 있으니까 힘을 모아서 여기 대항하는 힘을 만들 수가 없는 겁니다." < 박태균 교수 >

"대법원"에서 "재심 청구"를 기각한 바로 다음날. 07.31"조봉암""사형"을 당했다. 마지막까지 수감되어 있었던 곳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의 좁은 감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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