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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암살ㆍ학살ㆍ수용ㆍ살인

암살 ⑧ 현준혁ㆍ백의사 암살 (1945.09)

by 당대 제일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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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혁 (玄俊赫ㆍ1906~1945.09.0338세)"은 평남지역 공산주의자로, 건준 평남지부(평남 건준ㆍ조만식)과 대립관계였으며,  "김일성"과의 대결 구도를 버텨내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1. 현준혁 (玄俊赫1906~1945.09.03향년 38

"박정희 (대구사범 출신)"에게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한다. 해방 직후, 38도선 이북에서 가장 유력한 민족주의자는 "조만식"이고, 가장 유력한 공산주의자는 "현준혁"이었다. "현준혁" "김일성"과의 대결 구도를 버텨내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조선공산당 평남지구당위원장 (평남 조공평남 지역의 대표적 공산주의자)ㆍ건준 평안남도지부(평남 건준조만식)과 대립관계해방 직후, 이북 최초의 정치 테러로 사망

  출생 : 평남 개천군

  사망 : 암살 (백관옥 (대동단(大同團백의사의 전신) 단원에게)  /  다른 노선을 취했던 공산당 세력의 내부의 소행 또는 소련군정의 암살설이 있다.

  학력 : 연희전문학교 문과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대구사범 교사 (6년간 옥고)

국내 기반이 취약했던 해방 직후의 "김일성"은 자신의 역량과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신속히 기반을 구축했다. 그가 이 과정에서 항일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제쳤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그가 제친 또 다른 인물은 항일 공산주의자 "현준혁"이다. "현준혁(1906)김일성(1912)" 6살 차이다.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인생 자체가 극적이었다"평남 개천군"의 빈농 가문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마쳤다"경성제대"를 마치고,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된 것은 만 23세 때인 1929년이다빈농 자녀가 식민지 한국의 유일한 대학을 졸업하고, "사범학교 교사"가 됐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입지전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일본을 잡겠다."는 더 큰 목표를 세웠다"제국주의"를 잡기 위해 그는 반()제국주의인 "공산주의"를 도구 삼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겉으로는 "사범학교 교사"이지만 실제로는 항일 투사였다.

2. 암살설 - 1 : 백관옥 (백의사 단원)

평양에서 "대동단(大同團백의사의 전신)" "백관옥"에게 암살당했다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약탈부녀자 겁탈 등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대동단 단원들" "현준혁"을 찾아가 "소련군에 대한 조선공산당이 강력한 조치를 원했다"고 한다

"현준혁"을 암살한 이유에 대해, 1986.05.21 "백근옥(백관옥의 형)"이 녹취한 녹음에 의하면"소련군 강훈 소좌를 염선생(염동진) 2번 만났거든 그 놈(강훈 소좌) "동무들은 위대한 소련군을 이해 못 한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한 독일군도 여자 겁탈하고 재산 약탈하고 그랬다. 그런데 뭘 그러느냐." 백관옥은 현준혁을 만났다.

•  백관옥 : 당신이 공산당 책임자니까 (소련군에게) 이야기 하시오.

•  현준혁 : 제가 이야기 하죠.                                                 •  백관옥 : 내일 다시 오겠다.

•  백관옥 : (다음날 다시 가서) 그것 어떻게 됐습니까?          •  현준혁 : ?

•  백관옥 : "알았어, 이건 없애야 되겠어 그래서 없어진 거야"고 한다.

3. 암살설 - 2 : 김일성?

1945.09, 그는 "조만식"과 함께 "이반 치스차코프(소련군 제25군 사령관)" 만난 뒤, 승용차를 함께 타고 돌아갔다. "장규식(중앙대 교수)""민중과 함께한 조선의 간디, 조만식의 민족운동"묘사된 바에 따르면"자동차가 출발해 200M 쯤 갔을 때, 누군가가 차를 세우더니 차창 안으로 총알 2발을 발사했다 두 발 다 현준혁을 겨냥했다. 해방 직후 이북에서 최초의 정치 테러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인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당시에는 극우파 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안재성(역사저술가)""박헌영 평전""그의 공산당 활동에 불만을 품은 극우 청년들의 행위로 추정되었다"고 설명한다.

"현준혁"이 암살된 날은 09.03일 혹은 그 무렵이다"평양"에 있는 "현준혁 묘"1945.09.03일 사망했다고 표기돼 있는 점, 당시 경찰서장으로 수사에 관여했다가 월남한 "유기선""9월 초에 암살됐다"고 남한 언론에 밝힌 점, "현준혁"이 죽은 다음날 신문에 추도사를 쓴 "안지홍"이 사건 발생일을 9월 초로 증언한 점 등이 그 근거다.

암살이 9월 초에 발생했다면, 09.19일 귀국한 "김일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해방 직후, "평양"으로 파견된 "현준혁"이 단시간 내에 "평남 조선공산당"과 자신의 위상을 높이면서 "조만식"과 제휴 관계를 구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김일성"과 대립할 기회가 없었다"김일성"이 북한 땅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4. 생애

그가 "제국주의 일본을 잡겠다."는 목표를 세운 항일 투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만주사변(1931)" 도발로 인해 식민지 조선 학생들의 반전운동이 활발하던 1932년이다경찰이 "대구" 지역 학생들의 반전 삐라 살포를 "보안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수사하던 중에, "현준혁"이라는 사범학교 교사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32.12, "대구지방법원"은 징역 2,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학교 무대를 잃은 그는 농민조합을 무대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조선의 레닌 박헌영"이 체포된 이후, 와해와 재건을 반복하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운동에도 가담했다그런 뒤 재차 체포돼 1936"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1945,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의 레닌 박헌영"이 평남도 조직 활동을 지시하는 새로운 과제가 떨어졌다역사학자 "연정은"의 논문 "해방 직후 북한 내 반동분자 등장과 그 인식의 변화(2013년 역사연구 25)"에 따르면, "현준혁""경성역"을 출발한 날은 1945.08.17일이고 "평양"에서 활동을 개시한 날은 18일이다.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별도 조직을 꾸리기 위한 공산주의 진영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38도선 이북의 정치 중심지인 "평양"을 무대로 해방 직후에 두각을 보인 양대 조직이 있다하나는 "조만식의 건준 평안남도지부(평남 건준)"이고, 하나는 "현준혁""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평남 조공)".

우위를 점한 쪽은 "기독교우파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평남 건준"이다친일적 인물들도 끼어 있었던 이 그룹은 "조만식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결집돼 있었다이에 비해 "평남 조공"은 조직 규모 면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했다그래서 출발 당시, "현준혁"의 위상은 "조만식"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 점령군"의 방침에 따라 두 조직이 대등한 지분을 갖고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통합된 데 이어, "조만식" 그룹 내의 친일적 인물들과 반공산주의 인물들이 도태되거나 월남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양쪽의 위상 격차는 빠른 시간 내에 상당부분 해소됐다.

형식상으로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북 인민정치위원회"였다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기는 했지만, 그 기구 안에서 "현준혁조공 그룹"은 위상을 넓혀 나갔다이 일이 불과 2주 만에 벌어졌으므로, "현준혁"의 역량은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의 능력 발휘는 거기서 갑자기 "멈춤"을 하고, 인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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