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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728 : 이인좌의 난ㆍ무신란ㆍ영남란ㆍ경종독살설 (영조)

by 당대 제일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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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4) "소론 강경파ㆍ남인 일부"가 "경종 죽음에 영조ㆍ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내전이다. (영조 (英祖ㆍ1694~1776 (82세)ㆍ21대 왕(1724~1776) )

 

1. 이인좌의 난무신란 (戊申亂)영남란 (嶺南亂)

① 무신란 (戊申亂) : "난"이 일어난 해가, 간지로는 "무신년"

② 영남란 (嶺南亂) : "난"의 주요 지역이었던 "경상도 (영남)"의 이름을 딴 것

③ 나주괘서사건 : 1755(영조31), "윤지(尹志)"가 나주 객사에 붙인 벽서와 관련하여 일어난 역모 사건

④ 경종 독살설 : 경종 (景宗ㆍ1688~1724 (36세)ㆍ20대 왕(1720~1724)ㆍ숙종 맏아들ㆍ장희빈 아들ㆍ영조 이복형)이 승하하기 전, "게장ㆍ감ㆍ꿀ㆍ인삼차" 등을 수라로 든 일이 있어, 독살설 유포

"이인좌"는 "선조" 때, "붕당"을 예견했던 "명재상 이준경"의 후손이자,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비록 단시일의 "내란"이긴 하였으나, "청주성"을 중심으로 "진천ㆍ죽산ㆍ안성" 등지는 그 형세가 몹시 위태로왔으며,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된다.(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신임사화" 이후, 실각 당하였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ㆍ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1727.07월(영조3)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ㆍ김영해ㆍ정희량ㆍ박필현ㆍ심유현"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먼저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해,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격문의 요지는 "경종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흉악한 무리(영조ㆍ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군사들은 "경종"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고, "이사성(평안병사(平安兵使))ㆍ김중기(총융사)ㆍ남태징(금군별장(禁軍別將))"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려 하였으나, 용인에 퇴거하고 있던 "최규서(소론의 원로)"가 이를 조정에 고변해 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고,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의 관군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6일 천하"로 끝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을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영남(남인의 고장)"에서 "모의자ㆍ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난"이 평정된 후, "영조"는 "대구부"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 박았다. "소론(완론)"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난"의 주동자의 대부분도 "소론 강경파(준론)"이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50여년에 걸쳐,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했으며, "조식"의 문하인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갖지 못했다. 과거 응시가 허용된 뒤에도 필기시험 합격자에게 왕이 낙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금지는 사실상 130여년 후, "대원군의 과거 혁파" 때까지 계속되었다.

2. 이인좌 (李麟佐1695~172833조선 영조 때 역신(逆臣))

세종대왕 (4대)의 4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9대손ㆍ관찰사를 지낸 "이운징"의 손자

이인좌

1728(영조4) "이인좌(33)"4아들 "중명인명문명화명""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 등에 따르면, 7~12세인 관계로 "함경도""관노(官奴)"가 되었다과격한 "소론" 이었던 그는 "신임사화"로 득세하였으나, "영조" 즉위로 "소론"이 몰락하면서 함께 각했다. (사진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오명항 (吳命恒1673~172855))

그리하여 비밀리에 "소론파"를 규합하여 1728, "정희량"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청주" 함락하고, "안성"에 이르렀으나, "도원수 오명항"에게 대패하여, "죽산"으로 도피하였다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추격으로, 산사에 숨었다가 "신길만" 등 마을 사람들에게 붙들려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해 음력 03.26, 친국에서 역모의 전모를 공술하고, 다음날 "대역모반죄""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군기시 (軍器寺): 고려조선 시대, "병기기치융장집물" 따위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로, "방위사업청"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현재 "서울시청" 자리에 있었다.

1873(고종10), "정도전이현일윤휴한효순목내선정인홍"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최익현김평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그러나 "정도전이현일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었다.

이에 "최익현김평묵"1873~1876년까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한효순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남인 윤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 민암목내선이인좌정희량이현일의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하여,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그 뒤에도 "최익현김평묵""남인이인좌의 난" 관련자들의 복권을 결사반대하였다결국 "최익현김평묵"이 모두 죽은 뒤, 1907(융희2)에 가서야 "윤휴이현일" 등과 함께 복권된다.

3. 밀풍군 탄 (密豊君 坦1698~172931왕족)

인조(16대)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증손, 경안군 이회(소현세자 3째 아들)의 손자

1723년(경종3)과 1726년(영조2)에 "사은정사ㆍ동지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대청외교"의 주요현안을 담당했다.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반란이 평정된 후 자결을 명령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 1864년(고종1)이 되어서야 신원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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