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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627 : 정묘호란 (1627)ㆍ병자호란 (1636)ㆍ삼전도비

by 당대 제일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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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丁卯胡亂)"은 1627년 (인조 5),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으로"인조" 즉위 후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고,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조선ㆍ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인조ㆍ조정"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ㆍ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ㆍ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는데,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ㆍ청 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1. 정묘호란 (丁卯胡亂) : 1627.1월 중순~ 3월 초 (2개월간 전쟁)

정묘호란 : (인조 5) 청나라(후금)이 침입하여 조선과 싸움→ 형제국

1627년 (인조 5),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으로,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다. "후금 청 태종 (홍타이지ㆍ후금의 2대 칸ㆍ재위 1626~1643)"이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ㆍ만주 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ㆍ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 일 시 : 1627.1월 중순~ 3월 초 (2개월간 전쟁)       • 이 유 :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

• 결 과 : 후금은 "명나라"와는 불가능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의 의"를 요구하자,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고, 1636.12월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 군 사 : 조선 - 5만 명ㆍ후금 - 3만 명        • 피 해 : 조선 - 1만 명ㆍ후금 - 3천 명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ㆍ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ㆍ외교"에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뒤의 "사고 정비ㆍ서적 간행ㆍ호패의 실시" 등으로 눈부신 치적을 올렸다.

밖으로는 1616년 "여진족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이 "만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 정세에 대처하여 현명한 외교 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하려 노력하였다.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는 그 요청에 못 이겨 "강홍립"으로 하여금 1만 여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조케 하였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었다.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1624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련"의 아들(한윤ㆍ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이에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01.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강화"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했는데, "정봉수"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의사"를 표시했고, "조선"이 이를 받아들여, 03.0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2. 병자호란 (丙子胡亂) : 1636.12.28~ 1637.02.2459일간 전쟁병자란병란

병자호란 : (인조 14) 청나라(후금)이 침입하여 조선과 싸움→ 군신의 예

"조선ㆍ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인조ㆍ조정"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ㆍ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ㆍ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는데,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ㆍ청 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척화파(김상헌ㆍ정온 중심)"와 "주화파(최명길 중심)"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 일 시 : 1636.12.28~ 1637.02.24 (55일간 전쟁)        • 결 과 : 청나라의 승리ㆍ삼전도의 굴욕

• 이 유 : "청 태종(홍타이지ㆍ후금의 2대 칸ㆍ재위 1626~1643)"이 "명"을 공격하기 이전,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

• 승 패 : 조선 : 남한산성 내부에 비축된 식량의 부족ㆍ청에 의한 왕실피신지인 강화도 함락ㆍ구원군의 지속적인 패배로 인한 사기저하ㆍ임진왜란으로 국력상실ㆍ이괄의 난으로 북방군의 감소ㆍ오합지졸의 군사ㆍ수성위주의 방어전술ㆍ최고지휘관의 무능→ 항복    /   청 : "기병"을 통한 빠른 진격으로 "조선 수도 한양"을 점령

• 군 사 : 조선 : 17만 명 (속오군(지역군/예비군) 8~ 90,000ㆍ정규군 54,000ㆍ수군 30,000)  /    청 : 14만 명 (청태종 본대 84,000ㆍ좌군단 24,000ㆍ선봉대 5,000ㆍ한인수병 5,000ㆍ몽골인 보조군 12,000)

• 영 향 : 자신에게 조공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을 관계하는 사실에 조선 왕과 백관(百官)과 "명"을 받들던 식자층은 큰 충격을 받아, 이후 "북벌론"이 대두하였으며, "청"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운동"이 일어났다. "임경업"이 "명"과 연락하여, "청"을 치려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 삼전도비(三田渡碑)ㆍ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ㆍ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頌德碑)이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기념하고,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경기도 삼전도(서울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했다. (1639년(인조17)에 건립)

삼전도

"소현세자ㆍ봉림대군(효종)"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청 수도 심양(선양)"으로 가고, "척화파" 강경론자삼학사인 "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한양"은 "종로ㆍ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ㆍ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전쟁포로로 수십만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사회적인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조선 백성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명 이상이 거래되었고, 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ㆍ대신의 자녀 197명이 "청"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다. "소현세자ㆍ봉림대군(효종)"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청 수도 심양(선양)"으로 가고, "척화파" 강경론자삼학사인 "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① 청의 승리→ 삼전도 비ㆍ삼전도의 굴욕(三田渡 屈辱)ㆍ정축하성 (丁丑下城ㆍ 59일간 항전)

1636.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조선 측에서 반정이후, 끝까지 "친명배금"정책을 고집했으므로, 청은 어쩔 수 없이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ㆍ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정축하성(丁丑下城)"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 만에 "청 태종 "에게 항복, 1637.02.24(정축년),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송파구 잠실동)"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한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고 표현된다.

다만 당시 "인조"는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이라고 표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결국 "항복"을 결심한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하성"이라는 용어를 쓰도록 했다. 처음 "청군"은 "항복"의식으로서 "반합(飯哈)"을 요구했는데, 이는 마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타협에는 성공했지만, 이 또한 3번 절할 때마다, 3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이었다. 02.24일,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의 "어가(御駕)"는 한강을 건너,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했고, 공식적으로 "청"에 항복했다. "왕"이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에 굴복했다는 것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다"고 자부하던 "조선"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② 진행

1636.12.28일,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약 14만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청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기세를 꺾어 놓을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았으나, "청군"은 이를 우회하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한 사실이 "한성"에 1637.01.07일에 알려진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군해 있었다. "청군"의 남하 소식을 듣고, "인조ㆍ조정"은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청군"의 신속한 진군 속도에 시간이 부족하자, 1637.01.09일 밤, "강화도" 보다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잔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근왕군"을 모으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 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 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 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추위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조" 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01.10일 종전을 위해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남한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물자 부족 탓에 계속할 수 없었는데, 215cm 포신과 10cm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벽을 타격했고, 직결된 피해는 작았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01.22일,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했다는 소식이 01.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이 일로 "조선군"은 항전 의지가 꺾였다. 결국 01.28일,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01.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③ 소현세자 독살 사건 : 소현세자 (昭顯世子ㆍ1612~1645ㆍ33세ㆍ효종의 형) 일가 제거

소현세자 : 귀국 후 2개월 만에 석연치 않은 죽음→ 세자빈 강 씨는 그 직후 사사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다.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ㆍ서양 문물"을 접하였는데, 당시 세자가 "신문물"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는 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아 "둔전"을 경작해 곡식을 쌓고 무역을 하는 등의 생활 방안을 강구하면서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인조"는 "가톨릭ㆍ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ㆍ박대한다.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ㆍ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1644.11월 석방된 세자는 1645.0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고, 친청적인 뜻을 보이자 분노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 귀인 조씨)ㆍ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소현세자"를 독살하였다.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산림"은 "석철(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인조"는 이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 강씨"와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ㆍ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

"경선군ㆍ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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