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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624 : 이괄의 난ㆍ논공행상 불만 (인조반정 가담공신)

by 당대 제일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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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李适 亂)"은 1624년(인조2)에 일어난 반란으로,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시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이후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압되었다.(길마재 :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1. 이괄의 난 (李适 亂)

일 시 : 1624.01.24~04.01        장 소 : 한양한반도 북부 일대          결 과 : 관군의 반란군 진압

지휘관 : 이괄측 : 흥안군 이제기익헌한명련이수백이흥립한윤김효신서아지사쇄문고효내 /  정부측 : 도원수 장만- 정충신남이흥이시발이중로이성부이원익박효립김충선임경업

병 력 : 반란군(북방군 12,000여 명ㆍ관군포로 5,000여 명)ㆍ관군(30,000여 명ㆍ항왜 300)    피 해 : 전 병력 전멸, 관군 10,000여 명   (이괄이 거병한 영변성)

1622(광해군14),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1623.03,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으나,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반정""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다그러던 중 1624.01"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이전(이괄 아들)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이괄은 "기익헌한명련"등과 함께 압송하러 온 사람들을 죽이고, 1624.03.11"항왜병" 100명을 선봉장으로 하여,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그러자 "인조""김유"의 말을 들어, "기자헌김원량"40명의 연루자들을 처형시켰다이괄은 "황주신교"에서 "정충신남이흥"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탄"에서 다시 "부도제찰사 이시발"이 이끄는 관군을 격파하고, "황해도방어사 이중로""우방어사 이성부"를 전사시켰다"이괄 군""개성"을 지나, 03.26"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그날 밤 서울을 버리고 "수원"에 도착하였으며, "천안"에서 "반란군"의 평정소식을 접하였으나, 패주하는 "반란군""이천"쪽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12일 새벽 "공주"로 피란을 갔다.

03.29, "이괄 군""한양"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서 "선조의 서자"10째 아들인 "흥안군 제(興安君 瑅)"""으로 세웠으며, "인조"6일 동안 "공주"에서 ""을 피해 있어야 했고, 한편 이괄은 포로가 된 "풍천부사 박영신"이 끝내 협력하지 않자, 그를 참살했다.

이괄은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03.29,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장만임경업"이 지키는 "길마재"를 포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수구문" 나와 "광주"로 향하다가 "장만정충신남이흥"등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괄의 군사에 의해, "송강 정철"의 사위이자 "광주목사""임회"가 살해당했다.

도망가던 이괄은 04.01, "이천"에서 "아들 이전부하 한명련"과 함께 "부하 기익헌이수백"에게 살해되었다이로써 "반란"은 마무리되었고, "반란군"에 투항했던 "이흥립"은 자결했으며, "이괄"이 왕으로 세운 "흥안군" 또한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국문"도 없이 "간신배 심기원"에 의해 처형당했다하지만 "한명련"의 아들 "한윤한택"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휘하로 들어가, 이후 "정묘호란" 명분이 되기도 했다.

2. "논공행상"에 불만

"이괄""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 공신"에 책록되자, 불만을 가졌다"포도대장"을 지낸 뒤,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얼마 후, "후금"과의 국경분쟁이 "인조"의 핵심 현안으로 떠오르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영변"에 출진, 성을 쌓고 국경지대를 수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훈록(勳錄)"에 있어서 "김유"보다 낮은 2등에 책록되자, 사람들도 억울하다 하였다.

그 뒤 "이귀"가 최종적으로 "훈록"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반정하던 날 이괄의 공적이 많았다"고 역설하였으나, "김유"의 고집으로 "2등 공신" "한성판윤"이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평안도 지방"에 오랑캐의 침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평안도"로 전출되었다그 이후에도 그는 평소 "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직위가 낮아 속으로 원망을 품었다고 전해진다.(학계에서는 이것을 "이괄"을 폄하하려는 "사대부"들의 왜곡이라 추측하기도 함특히, 그는 "김유"등의 "기회주의적인 성격"에 큰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3. 이괄 (李适1587~1624.02.14향년 37)

인조 때, 반란자(이괄의 난)"인조반정" 가담공신자무신군인정치인한학을 수학한 조선의 무관 관료 겸 군인"능지처참 형"을 당해, 육신을 전국 8도로 보내고, 목은 잘려 "수급""인조"가 피난해 있던 "공주"로 보내져 효시(梟示)되었다"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서예"에도 능하였으며,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고, "역모"로 몰려 단죄되면서, 작품과 저술 대부분은 사라졌다.

출 생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사 망 : 조선 한성부         활 동 : 1606~1624

사 인 : 암살 (부하 기익헌(奇益獻)이수백)후에 유해가 능지처참 형

주 군 : 흥안군 이제 (선조 서자10째 아들)      경 력 : 반란군 부원수함경도/평안도 병마절도사(2품급)겸 부원수

"선조" 때이던 1606년에 "무과"급제하여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1622(광해군14) "함경도 병마절도사"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했다"고령군수영흥부사"로 재직할 때, 일을 처리하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는 칭찬을 들었다"인조반정" 거사 도중, 기밀이 누설되자, 후퇴한 "김류이귀" 등을 대신하여, "반정군"을 인솔하여 "반정" 성공하게 했고, "후금"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성책을 쌓고 국경을 경비했다.

사실 "인조반정""이괄"의 과단성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쿠데타였다"반정군"의 대장을 맡기로 한 "김유"는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거사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해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다"이괄"이 대신 대장을 맡아 군사를 움직이자, "김유"는 그제서야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 반정에 합류했다.

"이귀""인조반정" , "논공행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괄의 공로가 적지 않았음을 주장했다"고 전해진다"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 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그러나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서인 공신"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서인"내부에서 주도권 다툼에서 밀린 "이괄"은 중앙의 "서인"들이 자신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인조" 즉위한 지 10개월 만에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군했다.(인조반정

"반정"이 성공할 수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는 "이괄"임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린 후, "외직"으로 축출되었고, 중앙의 "서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괄""역모"로 몰았다1624(인조2)1월 아들 "이전"이 지식층과 사귀다가,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았다.

"문희이우" 등이 "이괄"의 아들 등과 짜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며, 인조에게 고해, 그의 아들 "전이"잡아가려 하자, 그는 "반란"을 일으켜 이에 반발한 것이었다"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난 것과 아들 "전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해 "반역의 무고"를 받자,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기익헌한명련"등을 포섭하여 ""을 일으켰다서울 함락이 눈앞에 닥치자, "인조""서인"정권은 "공주"로 피난하기로 결정했다."임진왜란" , 서울을 버리고 도망한 지, 불과 30년 만의 일이었다"반란" 초기, 서울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서울 입성 2일 후 "관군"에게 패퇴한 뒤, 부하 "기익헌이수백"에게 암살되었다.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길마재 :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괄"03.29일에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장만임경업"이 지키는 "길마재"를 포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수구문을 나와 "광주"로 향하다가, "장만정충신남이흥" 등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괄"의 군사에 의해, 광주 목사인 "임회(송강 정철의 사위)"가 살해당했다.

도망가던 "이괄"04.01"이천"에서 "아들 이전부하 한명련"과 함께 "부하 기익헌이수백"에게 살해되었다이로써 "반란"은 마무리되었고, "반란군"에 투항했던 "이흥립"은 자결했으며, "이괄"이 왕으로 세운 "흥안군" 또한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국문도 없이 "간신배 심기원"에 의해 처형당했다하지만 "한명련"의 아들 "한윤""한택"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휘하로 들어가 이후, "정묘호란" 명분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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