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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592 : 임진왜란 (1592~1593)ㆍ정유재란 (1597~1598)

by 당대 제일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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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25)~1598년(선조32)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으로,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1. 임진왜란 (壬辰倭亂ㆍ1592.05~ 1598.12ㆍ 6.6년 전쟁)

임진란ㆍ조일전쟁ㆍ임진전쟁ㆍ도자기 전쟁1차 (임진왜란) : 1592.05.23~1593 (2년) → 화의 결렬 (1594~1597) →  2차 (정유재란) : 1597.08.27~ 1598.12.16 (2년)

 이 유 :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0961세)"는 타국의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안정과 권력 공고화를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을 억제하려고, "명(明)"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결 과 : 휴전회담 진행(3년간)→ 화의 결렬(1597년)로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림→"정유재란" 발발

 군 사 :  조선(최대 사망(100/전체인구 500)피랍(10))(3)일본(2~17)

④ 3대첩 : 한산도대첩(이순신)ㆍ행주산성(권율ㆍ의승장 처영)ㆍ진주성(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ㆍ39세 졸)진주성 1(3.8: 2승리김시민 전사)2(6~7: 10패배관민 6만 명 학살)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2(선조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선조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1592.05.23일(음 04.13) 오후 5시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선봉군 "왜군 함대 700척ㆍ병력 약 16만 명"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 20일 후, "한양"이 함락되었다. 화의 결렬(1597년)로 "히데요시"는 재침략의 명령을 내린다. (중국 : 명나라 시대)

가도입명 (假道入明) : 1592년, "도요토미"는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하고, "명(明)"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고 명령하였다.

 정명가도(征明假道) : "소 요시토시 (쓰시마 도주)"는 "명(明)을 정벌하는데, 길을 빌려 달라."는 말로 좋게 바꾸어, "조선"에 교섭해 왔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는 1592.05.23일 군대 약 20만을 "조선"으로 파병해, 침공하였다. 이날 "부산진성(정발이 수성)ㆍ동래성(송상현이 수성)"이 일거에 함락되었다.

1593.09월, "명나라"는 "일본"과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하게 휴전하는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2. 정유재란 (丁酉再亂ㆍ1597.08~ 1598.12ㆍ 2년 전쟁)

일본 :  게이초 전쟁 (게이초노에키)  • 대첩 (大捷) : 명량해전ㆍ노량해전(이순신)

• 결 과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0961세)"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조명 연합군"이 전략적으로는 승리하였지만, 쌍방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음.

"도요토미" 정권은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였다. 초기에는 "일본군"의 공세가 이루어지다가, "명량해전"을 변곡점으로 남해안의 왜성들에 틀어박힌 "일본군"에 대한 "조명 연합군"의 공격 양상을 띠었다. 때문에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대부분 공격 측, "일본군"은 대부분 방어 측에 서게 되었고, "명량해전ㆍ노량해전"을 제외하면, "조선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전투는 거의 없는 "교착전쟁"의 모습을 나타냈다.

3. 조선인 이총 (朝鮮人 耳塚)교토 귀 무덤코 무덤(京都 耳塚)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 대신, 베어갔던 조선인 약 20,000명의 "귀와 "를 묻은 무덤이다 본래 이름은 "코 무덤(鼻塚)"이었으나, "하야시 라잔(林羅山)""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에서 "코를 자른 것은 야만적"이라며, "귀 무덤(耳塚)"이라고 쓴 이래로 "귀 무덤"으로 바뀌었다.

"일본 무장"들이 "조선"에서 조선군민중들을 죽인 뒤, ""를 베어 "일본"에 보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코 영수증"을 써주고,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 장수들에게 "감사장"을 써 보냈다 그런 다음, "일본" 온 나라를 자랑스럽게 순회시킨 뒤, "교토"에 묻었다.

건 립 : 1597.09월    수 량 : 조선인 약 20,000명의 "귀와 "    소 재 :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차야마치 (京都市 東山区 茶屋町) 공원에 방치ㆍ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는 곳)에서 100M 떨어진 건너편 공원

구 성 : 무덤 위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만물의 구성요소인 "()()()()()"을 상징해서 쌓아올린 "고린토(五輪塔)"라 불리는 석탑이 세워져 있고, 둘레는 돌로 둘러쳐져 있다. 석탑의 높이는 약 m, 가로 폭은 약 49m이다.

4. 이순신 장군 해전 :  45 40 5무승부 

① 옥포 해전   (1592.06.16) : 이순신이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

② 사천 해전   (1592.07.08) : "거북선"이 출전한 1번째 전투ㆍ"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

③ 한산도대첩 (1592.08.14) :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ㆍ"학익진"(육전의 포위섬멸 전술) 처음 사용

④ 명량 해전   (1597.10.25) :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으로 왜군 "333척" 중 "131척" 격파

⑤ 노량 해전   (1598.11.19) :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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