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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589 : 기축옥사ㆍ정여립의 난ㆍ정여립 역모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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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 (己丑獄事)"란, 1589.10월(선조22), "정여립(鄭汝立ㆍ홍문관수찬)"의 모반으로,"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3년여에 걸쳐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1.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10(선조22,) "정여립(鄭汝立홍문관수찬)"의 모반으로,"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 3년여에 걸쳐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발단은 1589.10, "한준(황해도관찰사)박충간(재령군수)이축(안악군수)한응인(신천군수)"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었다정치적 결사의 성격을 갖는 "대동계"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고발로 관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고, 모반을 꾀한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체포되기 직전 자결했다.

"정여립"이 자살을 하면서, "정여립동인"은 모반죄로 몰렸고, "정철" "서인"의 주도로 사건이 조사되면서, "이발백유양최영경" "동인"의 주요인물이 거 연루제거되었으며, 이때 숙청된 인사는 1,000여 명에 달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사망 이후, 그의 집은 허물어지고 파헤쳐져,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그가 "대동계"를 이용하여 반란을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는 "조작설모설"의 양설이 있다"기축옥사""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후 "전라도""반역향"이라고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인"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정철"이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이후 "동인""기축옥사"를 일으킨 "송강 정철"의 처벌을 두고 다시 분열한다. "정철"을 사사하고 "서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제시한 "이산해 일파""정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무리하자는 "유성룡 일파" 간의 반목은 결국, "동인""남인북인"으로 갈라지는 배경이 되었다결국 "선조""유성룡(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철"을 유배형에 처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2. 정여립 (鄭汝立1546~1589향년 43): 사상가이이와 성혼의 문인

"이이"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1570(선조2)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으나, "서인"의 비판과 "선조"의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이후 고향 "진안 죽도"에서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출 생 : 전라도 전주         사 망 : 전라도 진안군 죽도          사 인 : 자살 또는 암살 (선전관 이용준(李用濬)과 현감)          : 죽도(竹島)ㅊ개인별장이 있던 곳 ("죽도"는 현재 "진안읍 가막리"에서 "진안군 상전면 내송리외송리"에 뻗어 있는 산)

 부 모 : - 정희증 (鄭希曾ㆍ익산군수ㆍ첨정)ㆍ- 박씨 부인(박찬(朴纘)의 딸)         자 녀 : 1남- 정옥남 (부친 정여립 자살 후, 체포)         가 족 : 형제- 정여복(鄭汝復)정여회(鄭汝會)정여흥(鄭汝興)누이 2명          9- 정언지정언신(좌의정)ㆍ14- 정인겸 

스 승 : 이이성혼의 문인          경 력 : 1570(선조2)-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

정여립

조선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그의 사상은 후대 "실학자들의 민권사상"에 계승되었다"천하공물설(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하사비군론(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와 같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과 "민중군경하기 때문에, 왕위계승은 혈통보다는 자격여부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 ""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간주했다이는 봉건왕조의 기본적 가치관의 하나인 "군신강상론"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1570(선조2),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홍문관부수찬수찬 등을 지냈다처음에는 "서인"으로서 "이이성혼"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면서 "이이성혼박순"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짓고, 사회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 지역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해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발이 있어 피신하던 중 자살하였다"서인"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고, "동인"과 그 후신인 "남인"에서는 그가 모반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팽팽히 맞섰으며, 이후 사건은 "기축옥사"로 확대되어 1,000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1587,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 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1589, 한강이 언 틈을 타서 입경, "대장 신립" 등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안악군수 이축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고변으로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고 그도 관군에게 쫓기게 되었다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했으나, 포위망이 좁혀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평 가

"신채호""공화주의적 사상"을 두고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하였고, "역사학자 이이화"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고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뜯어고치고자 온몸으로 현실에 부딪친 진보적 지식인이었고, 선진적 사상가였으며, 민중에 토대를 둔 개혁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신채호"는 자신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정여립의 개혁 사상과 이론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물론 정여립의 개혁 이론과 사상은 극히 단편적으로 전할 뿐이며, 그를 반역자로 몰아붙인 세력들에 의하여 소개되었기 때문에 다소 과격하게 그려졌을 가능성은 있다그러나 "신채호"의 평가처럼 정여립의 주장과 이론들이 당대 사회의 권력층을 긴장시킬 정도로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4. 인 물

옹골차고, 기백이 있으며,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말솜씨가 좋아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말이 옳고 그른 것은 불문하고, 좌석에 있는 이들이 칭찬하고 탄복하였고, 비록 임금의 앞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쉽사리 꺾지 않고, 유난히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성품 때문에 주변에 적도 많았지만, 그를 따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강직하고 어찌 보면 불온한 성품은 당대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위협적이고 불편한 것이었다"이이"의 다른 제자들은 정여립을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고 드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5. 사상과 신념

천하공물설 (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 (何事非君論)과 같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표방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갖고 있었다"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는 주장과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이를 보여준다또한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므로(民重君輕), 왕위계승은 혈통보다는 자격여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고, "()()()"로 이어지는 왕위의 선양(禪讓)을 이상적인 모범으로 간주했다.

이는 봉건왕조의 기본적 가치관의 하나인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영국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견주어, 그를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서얼 허통론

당시 그와 관련하여 "참언"이 무성하였는데,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나서 "공사천""서얼"을 금고 하는 법을 모두 혁파하고 태평성대를 이루리라는 내용이었다조선 건국 이래 참설이 무성하여, 충남 연산현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라 하였는데, 정여립은 일찍이 중 의연의 무리와 국내의 산천을 유람하다가 폐암(폐 암자, 중이 없는 절) 벽에 "객이 되어 남쪽 지방에 노닌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하여라. 무자, 기축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태평성세 이루는 것이 무엇이 어려우랴." 라는 내용의 시를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불사이군론 거부

군주에게 절대 복종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을 부정했는데, 그 예로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의 충신 왕촉"의 일화를 들었다"왕촉""제나라"가 망할 때, "연나라의 대장 악의(樂毅)"가 그의 어진 인품을 보고 불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자살한 인물이다그러나 정여립은 이러한 "왕촉"의 자살 행위를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였으며, "왕촉"의 언행은 죽음에 임하여 일시적인 감정으로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역성혁명론"을 주장하고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다면 그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다고 했다당시 "유자혜""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사람이고, 맹자는 제 선왕과 양 혜왕에게 왕도를 행하도록 권하였던 이였지만, 유자혜와 맹자 모두가 지금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왕위세습론 비판위나라 정통론

왕위의 세습을 부정하였다창업주와 어떤 군주를 제외하고는 일가를 통솔할 능력도 되지 않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왕위는 능력에 따라 왕으로서 재목감이 되는 인물을 골라 앉히는 것이지, 혈통에 맞추어 억지로 무능한 군주를 내세워 대를 이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중국 사마온공의 '자치통감'에서는 삼국중 조위(조조의 위나라)를 후한 다음 왕조의 정통으로 인정하여 위나라의 기년으로 삼았으나, 주자는 소열제 유비를 후한 헌제의 뒤를 이은 유통(遺通)으로 기술하였다"면서, 사마온공의 주장을 직필(直筆)이라 하고 주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늘의 뜻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주나라 왕실을 떠났는데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는 것(尊周)무슨 의미가 있으며, 민중과 토지가 조조와 사마 의에게 돌아갔는데, 구구일우(區區一隅)한 유현덕의 정통이 다 무엇이냐?"라고 하면서 주자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이어서 그는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은 서로 자손이 아닌 자에게 왕위를 전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성인이 아니었던가?" 하면서, 중국 정치의 이상적 모델이 혈통이 아닌 능력에 의한 왕위 계승이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정여립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문도들의 표현을 따른다면 진정 앞선 성현들이 생각지 못했던 선구적인 발상이었다.

공화주의 이론

그는 "천하의 만물은 공물(공공의 것)이며, 임금과 귀족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이를 두고 "신채호""정여립은 천하가 공물이라는 혁명적 사상을 내놓았다."고 하였다당시 조정에서 사용하고 있던 "종묘사직"이란 말 대신에, 천하(국가 사회 전체)가 왕공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공물", "백성 모두의 공유물"이라는 공동체 사상을 바탕으로 침체한 왕조 사회의 혁명적 개조를 꿈꾸었던 것이다그가 내놓은 이 같은 "제한 군주주의 사상" 또는 "공화주의적 이론"은 그 뒤의 "실학자개화 사상가"들도 감히 언급하기 힘든,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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