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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762 : 임오화변 (사도세자를 뒤주 가둬, 아사시킴)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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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 (壬午禍變)"은 "영조 (英祖ㆍ1694~1776 (82세)ㆍ21대 왕(1724~1776))"가 아들인 "사도세자 (思悼世子ㆍ1735~1762ㆍ26세궁녀ㆍ환관 100여명 살해)"를, "창경궁 문정전 (휘령전(徽寧殿))"에서 뒤주에 가두고, 굶겨 죽인 사건이다.

 

1. 임오화변 (壬午禍變변괴비상식적인 재난)

발 생 : 1762.05.21 (영조 38)       위 치 : 조선 한성부 창경궁 문정전 (휘령전(徽寧殿))

사 유 : 부자 갈등당쟁의 희생양ㆍ정조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ㆍ 청나라의 사례를 참고

당사자 : 영조(이금)폐세자 사도세자(이선)세손 정조(이산)영빈 이씨혜경궁 홍씨

 인원왕후 : 영조의 적모사도세자의 의붓할머니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인 사도세자의 범죄가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정성왕후 : 영조의 정비사도세자의 적모살아있었으면 임오화변을 막을 수도 있었던 인물. 영조 계비인 정순왕후는 정성왕후와 달리 사도세자와 인연이 깊지 않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임오화변 당시, 정순왕후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입궁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터라, 권위가 약해서 영조를 막을 명분과 힘이 없었다.

영조

2. 개요

1762.05.21(영조 38),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쌀 담는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세손이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달라" 하자, 영조는 내관을 시켜 세손을 내보냈다"세자시강원"의 사부였던 "윤숙임덕제"가 현장에 달려왔고, "윤숙"은 세자의 처벌은 안된다고 거듭 주장하다가 내쳐졌다. "윤숙"은 당시 정승이던 "홍봉한(홍봉한영의정혜경궁 홍씨 아버지사도세자 장인)신만"이 세자사(世子師)라는 직책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며 "홍봉한신만"을 현장에서 탄핵하기도 했다한편 "홍봉한신만김성응" 등은 상소를 올려, 세자의 스승인 "윤숙임덕제"를 유배했다

"영조"는 곧 "여승 가선환자 박필수평양 기생(5)"을 체포하여 추국한 뒤 "세자를 타락시킨 죄" 사형에 처했다그 뒤 동궁의 관료들이 그에게 "미음()"을 넣어주자 영조는 이들의 출입을 금기하였다누군가가 세자가 갇힌 "뒤주"의 틈으로 "미음()"을 넣어준다는 것을 안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는다.

세자는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이미 소지하고 있던 부채를 반으로 쪼개 그것으로 오줌을 받아 마셨다. 그로부터 3~4일 만에 세자는 뒤주에서 굶어죽고 만다. 8일 뒤에 아사한 세자의 죽음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당시 세자의 나이 향년 27세였다이후 "정조"1777(정조1)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와 원호 영우원을 상시하였다.

3. 전개 :  영조실록영조 38년 윤 05.13일

"영조""창덕궁"에서 갑자기 "사도세자"를 불러내었다.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원들과 세자와 동궁을 호위하는 익위사 관원들 또한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사도세자도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곁에 있던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학질(말라리아)에 걸렸으니 세손(정조)의 휘항을 달라"했다

그것을 쓰고 "영조"에게 자신이 병이 있음을 어필하려 했지만, "혜경궁" "작은 세손의 것을 어찌 쓰겠냐" 세자의 것을 가져왔다"사도세자""영조"가 그토록 아끼는 세손의 휘항을 쓰고 나가, "내가 바로 당신이 그리 아끼는 손자의 아버지요!"라는 것을 내세워 살아보려 한 것이었겠지만, "혜경궁"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영조"는 급히 온 세자를 데리고, "경화문"을 지나 "숙종"의 위패를 모신 "선원전"으로 갔다당시 "영조"는 평소에 "만안문"으로 자주 다녔고, 흉한 일을 할 때만 "경화문"을 사용했다세자를 데리고 굳이 "경화문"을 통과했음은 흉한 일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이후 "영조""창덕궁 선원전"에서 절을 올린 뒤, 다시 세자와 "창경궁 휘령전"으로 간 뒤 "휘령전" 있던 "정성왕후 서씨 신위""영조"가 행례를 하고 사도세자가 사배례를 한다그 직후 "영조"는 갑자기 손뼉을 치고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다음 순식간에 군사들을 시켜서 4, 5겹으로 전문을 막고, 총관을 시켜 군사들을 배열하여 칼을 뽑고 궁의 담을 겨누게 했다"영조"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 "영의정 신만" 만이 겨우 들어왔을 뿐이었다분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사도세자는 "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 죄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했다고 하고, 한중록에 따르면 "아버님,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라고 애걸했지만, 영조는 요지부동으로 세자에게 칼을 주며, 자결하라고 강요했다놀란 세자는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나 영조는 차갑게 거절하면서, 자결하라고 화를 내며 매섭게 하자 견디다 못한 세자는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세자의 스승 "임덕제"와 춘방의 신하들이 달려와서 칼을 치우며 이를 막은 다음, 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영조한테 간언했다영조는 세자의 자결 시도가 "임덕제"와 춘방의 신하들 때문에 실패하자 그들에게 크게 화를 내며,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바로 내렸다그리고 군병들을 시켜서 세자 폐위에 반대하며 세자를 변호하는 춘방의 신하들을 내쫓았고 임덕제에게 "세자가 폐해졌는데 사관이 왜 있는가?"라며, 역시 붙들어 내보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대마저 나가면 난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하고 울부짖었고 "임덕제"도 나갈 수 없다고 버티면서 끝까지 세자를 변호했으나 소용없었고, 그를 끌어내라는 영조의 명이 서슬퍼런지라 결국 근위병들한테 끌려나갔기에 이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임덕제"는 끌려나간 뒤에도 세자를 구하려고 직접 세손(정조)을 업고 와서 세손과 함께, 영조한테 세자를 용서해달라고 간언했다하지만 이는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조한테 밉보이게 되어, "임덕제"는 파면되고 유배된다물론 나중에 유배가 풀리고 함평 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재직 중에 사망했다사후 "정조"가 예조판서로 추증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임덕제" 외에도 몇몇 관료들이 영조의 화를 풀기 위해 세손을 데려왔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쫒겨났다.

세자가 춘방의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물으니, 사서 임성이 "처분을 기다리시라"라고 대답했다. 세자는 곡하면서 엎드려서 개과천선하겠노라 호소했지만, 영조는 이번에도 차갑게 거절하며 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영빈 이씨의 말을 옮기면서 세자를 죽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도승지 "이이장""어찌 여인의 말을 듣고 국본을 해치려 하십니까?"라고 항의하자 영조는 격노하여 도승지를 방형하라 했다가 곧 취소했다. 그외에도 한림 윤숙(尹塾)이 홍봉한을 면전에서 비난하고 울부짖은 일로 다음날 해남으로 귀양을 떠났다.

이어서 "영조""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다세자를 가둘 뒤주는 밧소주방에서 가져왔고, 뒤주에 가두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혜경궁의 기록으로 보아 세자는 큰 저항없이 들어간 것 같다. 혜경궁은 세자가 "대 처분"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절부절못했다오후 3시에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칼로 2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혜경궁"은 세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으나 근위병들의 제지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 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단 말인가?"하고 울었다. 이후 혜경궁은 "죄인의 아내로서 궁에 있을 수 없으니 친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내시에게 시켜 영조에게 보내었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잠시 후, "홍낙인(혜경궁 오빠)" 찾아와서 동생 혜경궁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동궁을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도 더 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위에서 본집으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혜경궁도 통곡했다영조는 세손과 혜경궁을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도록 조치한 다음에 밤이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사도세자의 폐위를 선포하는 전교를 내렸으나 사관들이 감히 아무도 그 내용을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들 세자를 며칠 있으면 풀어주리라 생각했는지 근위병들은 그리 엄격히 감시하지 않았다특히 세자는 갇힌 지 얼마 안 되어 근위병들이 뒤주를 열어주었기에 뒤주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다가 영조가 꾸짖을 것을 두려워하여 뒤주로 돌아갔고, 궁인들이 찾아와 세자에게 제호탕과 음식, 부채를 주었고 이를 먹었다하지만 영조가 이를 알게되자 오히려 격노하여 뒤주를 꽁꽁 묶어버리라고 명령했고, 이때부터 세자는 정말로 갇혔는데, 뒤주 위에는 풀을 덮었다고 한다. "대천록"에선 이를 홍인한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임오일기"에선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렸다고 서술했다.

다음엔 영조는 "포도대장 구선복"을 시켜서 뒤주를 지키게 했고 세자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서 말을 걸게 했다. 세자가 누군지 묻자 "구선복"이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고 세자는 어찌 직함은 말하지 않느냐고 꾸짖어 "구선복"은 그제서야 자신의 직함까지 말했다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뒤주를 둔 "창덕궁"에서 머무르며 하루에 1번 뒤주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는데 7일째 되는 날부터 세자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궁인들이 세게 흔들자 세자는 희미하게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그런데 말이 8일 만에 죽었다는 것이지 실제론 세자는 전날에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뒤주를 열고 시체를 확인한 때가 8일째였을 공산이 크다죽기 전에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사후 뒤주를 열어보니 사도세자가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받은 부채를 반으로 쪼개 그것으로 오줌을 받아 마신 흔적이 있었다

이때 영조는 세자의 측근들까지 처벌했다그 후 "선인문" 앞에서 세자의 개인물건들을 태우라고 지시했는데 여기서 "유희하는 기괴한 물건" 등이 나와 영조가 분노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결국 윤 05.21일에 세자가 숨을 거두자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자의 위호를 회복시켜 주었다흔히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잘못 알려졌는데, 사실 시호 자체는 "영조"의 심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이 시호를 정하는 시법(諡法)을 따른 것이다.

다음은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영조"가 한 말이다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포()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1달에 마치라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4. 갈등 원인 : 영조사도세자

갈등이 벌어진 원인을 찾자면하나는 "선천적 기질의 차이", 하나는 두 사람이 처했던 "성장 환경정치적 환경의 차이" 부자 간 성격의 차이와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의 결과는 결국 "임오년"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도세자""현종(증조)숙종(조부)영조()"와 다르게 "무골"이었다"영조"부터 "세자가 비대하다"고 언급하고 대신들에서 사도세자의 체격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고, "영조실록"에서 "효종(고조) 닮았다"는 기록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못 들던 "효종"의 무기를 15세에 들기도 했다. 본인의 신체도 건강했고 무예를 좋아하고 사냥도 나갔던 점을 보면 "세종경종"처럼 운동 부족으로 비만인 경우가 아니라, "태조 이성계정종태종"처럼 다부진 몸이었을 것이었다따라서 그 체격에 걸맞게 운동무예를 좋아하고, 보다 활달하고 과감한 성격을 타고났다.

"영조"는 반대로 어진만 봐도 왕이 되기 전이나 왕이 된 후, 둘 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보여주었다일단 조상 핏줄 덕분인지 본인이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고 운동도 싫어하진 않았고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서 승마달리기국궁 같은 격한 운동을 했고 이런 점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하지만 근본적으로 영조에게 이것은 운동이었지, 그걸 넘어서 무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았다영조의 주요 관심사는 "글 공부"였으며, 무예는 부가적인 것이었다.

성격도 "영조사도세자"는 확연히 달라 활달하고 과감한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는 조심스럽고 신중하지만 기민하고 민첩한 성격이었다실제로 실록을 보면, "영조"가 대리 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너무 과감하고 조심성 없이 일을 처리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영조는 당쟁 속에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세력의 균형을 맞추는데 집중하고 렇기에 사안 하나하나에도 당파들의 이해관계를 따져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반면, 세자는 "탕평" 영조만큼 신경을 기울이진 않았다.

어린 세자에게는 눈앞의 개혁해야 할 문제가 보였을 뿐, 힘의 균형이나 이해 관계 같은 것은 겪어본 적이 없기에 느끼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영조에게 자라면서 자신을 닮기는커녕, 외양부터 자신과 다르고 거기다 글 공부보다 무예를 더 즐기는 모습에 못마땅했을 터였다그냥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자신과 안 닮거나 마음에 안 들면 관계가 불편해지는데 영조 입장에서는 자신을 계승해야 할 아들이 생긴 것부터해서 하는 행동까지 마음에 안드니 싫어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타고난 기질 차이가 큰 데가 이런 점을 관대하게 넘어가기엔 영조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았다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고집이 강하고 자기 방식에 자부심을 느끼는 특성도 있었지만, "숙종" 때부터 이어져 온 이 고집 세고 기가 센 성격은 심지어 "정조" 때까지도 이어진다.

여기에 두 사람이 처해있던 환경도 너무 달랐다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어머니가 "인현왕후" 복위에 힘을 보태면서 태생적으로 "노론"에 속했다"숙종노론""경종(장희빈 소생)"을 대신해서 자신을 차기 왕으로 밀기 시작하자, 왕위 경쟁자로 "경종"이 세자 시절부터 줄곧 경쟁 관계였다거기다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기록도 빈약한, 격이 낮은 집안이었다. 이러다보니 흔히 받을 수 있는 외가 쪽 정치적 지원이 하나도 없는 고립무원의 신세였다.

"노론""연잉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노론" 쪽 어머니를 가졌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었다. "경종""숙종노론"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영조 역시 "연잉군" 시절 "경종"이 세자로 대리 청정하던 10년의 기간과 "경종"에게 세제로 책봉받은 뒤 왕이 되기까지 5년간 불안한 환경에 있었다더군다나 즉위 후에는 전국적인 반란까지 겪고,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반역"에 시달렸다.

이처럼 영조의 생애는 태어나면서부터 궁정 암투 한복판에 있었고 신분과 목숨을 신하들에게 위협받는 판이었다이래서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세제 시절까지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정치적인 행동이나 튀는 걸 자제하고 공부에 매진하면서 모범적인 세제로 행동해야 했다만약에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무기를 모으거나 무사를 만난 정황이 보이면 역모로 몰리기에 딱 좋았다여기에 "숙종"에게 물려받은 온화하지 못하고 극도로 불같은 면이 맞물려서 상당히 편협하고 마음에 안 들면 꼬장 피우면서 끝까지 싫어하고 의심하는 성격으로 뒤틀린다.

"사도세자""영조"와는 딴판이었다. 우선, 잠재적인 경쟁자인 남자 형제가 하나도 없었다이복형 "효장세자"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그 이외에는 전부 여자 형제 뿐이었다"서자"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라지만 "효장세자"도 후궁 태생의 "서자"였고, 적자가 없는 이상 어차피 법적으로 문제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세자가 될 왕자가 1명 뿐이니, "노론소론"이 각자 왕자를 밀어주려야 밀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당파를 초월해서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 영조는 "숙종"이 불 지른 "환국 정치의 후유증"으로,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으로 엉망이 된 정치적 혼란에서 성장했지만, "사도세자"는 영조가 "반역 진압탕평책"으로 "신권당파 싸움" 약화시켰고, "사대부"가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그래서 "임오화변" 때까지 사도세자의 비행을 대신들이 감추거나, 일단은 영조를 말리려고 하는 등 유일한 "왕위계승자"라는 신분 덕에, 죽는 순간까지 신하들에게 보호를 받았다

반대 상황인 사도세자는 훨씬 행동거지에 자유가 많았고, 대신들도 사도세자가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걸 가지고 딱히 물고 늘어지지 않았고, 정통 왕자에 경쟁자도 없는 사도세자는 공부 좀 덜하더라도 문제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영조처럼 목숨마저 위험한 절실한 환경이 아니였다사도세자가 영조가 보기에는 공부를 안했지만, 총명했던 건 사실이고, 국방이나 무예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분명히 왕의 덕목 중 하나였다. 단지 두 사람의 방향성이나 관심사가 달랐다이러한 신하들의 비호에는 이처럼 "유일한 왕위계승자"라는 점도 있었지만, 또 하나의 이유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나이였다. 사도세자가 변을 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영조는 역대 왕 중에 최고령이었던 것신하들 입장에서는 당장 내일 왕이 승하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인데, 미래의 왕이 될 세자의 비행을 고자질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문제는, 피비린내 나는 "환국 정치" 끝자락을 경험했고, 본인이 그 영향으로 당파 싸움에 말려서 죽을 뻔했던 영조는, 세자의 이런 행동을 결단코 용납되지 않았다부실한 정통성과 보복이 이어지는 정치 환경을 타파하고자 영조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론의 끊임없는 토적(=소론 처벌) 요구를 거부했다이런 영조에게 자신의 "탕평책"을 이어가고 정치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서는, 복잡한 당파 관계를 조율할 정치적 안목과 유학자인 사대부를 찍어누르고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학문적 기량을 갖춘 후계자가 필요했다. 만약에 자칫 잘못하면 탕평책은 무산되고 보복 정치와 환국이 재현될 터였다.

사도세자의 자질이나 관심사는 만약에 조선 초였다면 가산점이 되었으면 되었지, 감점 요인은 아니었다하다못해 "효종"만 해도 전후 왕으로써, 국방 강화와 함께 무예에 관심을 보였지만, 딱히 왕으로서 부족함은 없었다. 하지만 "효종"같이 무예 못지않게 공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모를까, 사도세자의 행동은 극도의 위기감을 가진 영조가 보기에는 너무나 수준 미달이었다또한 영조의 고령은 영조에게도 압박이었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을 제외하더라도 40~50대에 죽는 게 흔했고 왕들은 평균적으로 40대에 사망했다. 그런데 영조가 사도세자를 얻었을 때 영조 나이가 42

영조도 조바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2살 때 동궁으로 책봉되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반대로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 영조의 압박은 지나쳤고,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사도세자도 대리 청정을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낸다고 자부했지만, 영조의 타박은 끝이 없었다만약에 사도세자가 그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 안 놓이고 안정적인 환경이었다면 영조의 기대치도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아무래도 훨씬 수월하게 세자를 보내고 왕위에 오르거나, 아니면 영조가 진짜 성격이 좋아서 사도세자를 이해하고 그 자질을 좋은 쪽으로 가져가게 해주려는 좋은 아버지였다면 부자 관계도 좋고 계승도 안정적이었을 터였다하지만 하필이면 당대의 정치 환경은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상태에 아버지 영조는 엄격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조바심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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