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홍경래 (洪景來ㆍ1780~1812.04.19ㆍ향년 32세)"는 조선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매우 잘 방어되는 "정주"를 비롯하여, "서북지방" 상당수를 지배하였는데,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1. 홍경래의 난 (1811년)
1811년, "홍경래"는 조선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매우 잘 방어되는 "정주"를 비롯하여, "서북지방" 상당수를 지배하였는데,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청천강 이북"을 거의 지배했다. 1812.05.29일(음 04.19),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심복들인 "우군칙(禹君則ㆍ1776~1812ㆍ36세)ㆍ홍총각(洪總角ㆍ1785~1812ㆍ27세)"은 관군에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홍경래ㆍ농민군"은 "지역차별이 없는 사회ㆍ부패한 정권타도"를 꿈꾸었다. "부패한 정권 타도" 뒤에는 새로운 구세주인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다. "진인출현설"로, 지배세력의 부정을 넘어 "이씨 왕조"의 타도까지 꿈꾸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는데, 신분제 폐지ㆍ토지개혁ㆍ당시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삼정(三政: 전정ㆍ군정ㆍ환정)에 대한 개혁 조치 등이 없었다는 점 등이다.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죽었으나, 당시 핍박받던 농민들은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곳곳에서 저항하였다. 1826년, "청주 괘서사건"의 죄인으로 국문을 받던 "김치규"는 "홍경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죽지 않았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농민이나 변혁을 바라는 대중들에게 "홍경래의 실제 생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이돈화"는 "백두산인"이라는 필명으로 천도교 기관지인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 홍경래를 "장군"이라 호칭하며, "시세(時勢)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다시 시세를 만드는 것이 이치인데, 홍경래와 같은 인물은 한 몸으로써, 시세를 만든 자"라 일컬었다. 또 이윤재는 1931년 "동광"에 기고한 글에서, "홍경래"와 "봉기군"을 "혁명군"이라 명명하면서, 그들의 최후를 기술한 뒤,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 한다고 하며, 실패를 아쉬워하였다. 일제시대 "홍경래"에 대한 이런 관심은 암울한 현실에 대한 돌파구의 차원에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2. 홍경래 (洪景來ㆍ1780~1812.04.19ㆍ향년 32세)
조선 순조 때, "평안도(조선 300년 동안 소외된 지역)"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로 "평서대원수"이다. 1811년(순조11), "평안도" 일대에서 "정권 타도ㆍ지역차별 철폐"를 내세우며, 저항의 기치를 올렸다. 출신 성분에 대해 아직 정설은 없다. 일부에서는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는 "평민 출신"이라고도 한다. "몰락 양반"출신이라고 전해지지만, 거의 "평민" 수준으로 곤궁하게 살았다.
그러나 글에 대해서 조예가 있었고, 아이들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봐서는 최소한 평민 이상의 신분 소유자였음은 분명하다. 유교ㆍ병법ㆍ풍수지리 등을 익히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1797년 "평양 향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1798년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방랑하면서 거사를 꿈꾸었다.
• 출 생 : 평안도 용강군 다미면 (평남 룡강군 대안구역 다미리) • 사 망 : 평안도 정주군 (평북 정주시)
• 종 교 : 유교(성리학)→ 도교 • 자 녀 : 1남 • 복 무 : 조선 농민군 (1811~1812) 평서대원수 • 참 전 : 양서대란
3. 정권 타도ㆍ지역차별 철폐
8도 가운데 지배층의 상당수는 이른바 "삼남지역"이라고 불리던 "영남ㆍ호남ㆍ호서"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북부지역에 위치한 "함경도ㆍ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함경도"의 경우 조선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지역으로 "왕가 발상지"로 인식되며, 이른바 "풍패지향 (豊沛之鄕ㆍ패주 풍읍 출신으로 황제가 된 한나라 고조의 유사에서 유래)"으로 불리며, 그나마 중앙정부의 관심이 쏠리기는 하였으나, "평안도"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 때문인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평안도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 사대부는 이들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는다."라고 실정을 토로한 바 있다. 오랜 기간 소외되었던 "평안도"는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유상(柳商ㆍ평양 상인)ㆍ만상(灣商ㆍ의주 상인)"을 중심으로 "대청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C 후반 이후에는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일부 광산은 이른바 "잠채(潛採)"라 하여 불법적인 형태로 채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가 축적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수탈은 점차 더욱 가중되며 사회적 모순이 확대되어 갔다.
1811.12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가산"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졌다. 거사를 도모하기에 앞서 치밀한 준비를 하였는데, 먼저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가산지역에서 "우군칙ㆍ이희저"를, 곽산지역에서 "홍총각ㆍ김창시"를, 개천지역에서 "이제초"를, 황주지역에서 "김사용"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양반 출신인 "진사 김창시"가 있었는가 하면, 상업ㆍ광업에 종사하였던 "우군칙"이 있었고, 대상인인 "이희저" 등이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지도부는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였는데, 당시 평안도가 안고 있던 정치, 사회적 모순에 지역민들이 상당히 공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다복동"을 근거지로, 봉기준비
지도부를 구성한 "홍경래"는 "다복동(평안도 가산)"을 근거지로 삼아, 봉기를 위한 재원을 마련함과 동시에 "광산개발"을 명분으로 내걸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이에 응했던 사람들은 대개 생활이 어려운 "농민층"으로, 이들을 "봉기군"으로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준비가 진행되던 중인 1811년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고, 특히 "평안도"는 가장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는 이때를 봉기에 적당한 시기로 판단하고, "다복동"을 중심으로 봉기의 기치를 올렸다.
"홍경래(대원수)"를 중심으로, "김사용(부원수)ㆍ홍총각(선봉장)ㆍ이제초(후군장)"를 배치하고 "우군칙ㆍ김창시"는 모사(謀士)로 활동하였다. 홍경래 등은 봉기와 함께, 봉기에 대한 명분을 "격문"으로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서토(西土: 평안도)를 버림이 더러운 땅과 다름이 없다. 심지어 권세 가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반드시 평민 놈(平漢)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지하고 또한 과거를 볼 때는 반드시 서토의 문장을 빌었으니, 400년 이래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5. "정주성"에서의 결사항전ㆍ홍경래의 전사
봉기 초반, 농민군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고, 서울로 진격하면서, "가산ㆍ곽산 관아"를 접수하였다. 봉기군은 곧장 창고를 열어, 저장된 곡식으로 빈민들을 구휼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초반 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하여, "정주ㆍ선천ㆍ태천ㆍ철산ㆍ용천ㆍ박천" 등지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초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여기 저기에서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정주성"에서 이루어진 봉기군의 저항은 처절하였다. 계속되는 진압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이면서 조직적으로 대응하였다. "정주성" 밖에서는 관권에서 이탈된 민심이 성에서 농성하는 봉기군을 도왔다. 대치가 계속되면서 진압군 측에서는 "정주성" 함락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 1812년(순조12)3월부터 성 자체를 폭파시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마침내 04.18일 폭발물 매설을 위한 굴착이 마무리되고, 다음 날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발시킨 뒤, 관군이 성내로 진입, 봉기군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전사하고, 지도부 대부분이 검거되었으며, 약 3,000여 명의 봉기군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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