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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ㆍ논쟁-개화파ㆍ북학파

사건- 1800~1863 : 세도 정치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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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 (世道) 정치"란, 보통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ㆍ여흥 민씨"를 말한다. 조선 후기, 특히 19C에 1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 형태로, "세도 정치"의 본래 의미는 "조광조(1482~1520)"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 데에서 주창된 것으로, "세상 가운데의 도리"인 "세도(世道)"를 실현하는 정치를 말한다. "조광조"는 이를 위해, "세도의 책임자가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1. 세도(世道) 정치

"세도(世道)"란 "세상 가운데의 도리"란 뜻으로서, "그 도리를 이끌어나갈 책임"을 함께 뜻하기도 했다. "세도의 책임"은 원래 "국왕"에게 있어야 하지만, 조선 후기에 "신료의 발언권"이 강해짐에 따라, "유학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산림(山林)"이 "세도의 담당자"로 지목되곤 했다. 그러나, "조선 순조ㆍ헌종ㆍ철종" 대에 실제로 전개되었던 정치 형태를 칭할 때는 "세도의 책임을 맡은 자가 세도를 빙자해 세력을 휘둘렀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세도 정치"라고 불렀다.

36년간 : 안동 김씨ㆍ장동 김씨 (경북 안동) : 순조(1800~1834)ㆍ순원왕후 (김조순 딸ㆍ순조 정비ㆍ헌종 조모)

15년간 : 풍양 조씨 (경기 남양주) : 헌종(1834~1849)ㆍ신정왕후 (조만영 딸ㆍ헌종 모)

 14년간 : 안동 김씨ㆍ장동 김씨 (경북 안동) : 철종(1849~1863)ㆍ철인왕후 (김문근 딸ㆍ철종 비(妃))

29년간 : 여흥 민씨 (경기 여주) : 고종(1864~1919)ㆍ명성황후 (민치록 딸ㆍ고종 비(妃))

2. 안동 (安東) 김씨 : 순조~ 철종60년간 세도 정치

시조 김선평 (신라 말 성주ㆍ왕건의 공신)ㆍ"순원왕후(순조 비)ㆍ효헌왕후(헌종 비)ㆍ철인왕후(철종 비)"가 배출되었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 즉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면서 세도정치로 이름을 날리는데,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약 60년간 세도정치로 이름을 날린다. 조선 중기 이후, 300년 동안 "종묘배향공신"을 6명이나 배출했고, 정승(15명)ㆍ대제학(6명)ㆍ왕비 (3명)ㆍ호당(1명)ㆍ청백리(1명) 등 조선조 말까지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가 어찌나 드셌던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못하는 일이 없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러한 "세도 정권"의 정치적 폐해는 "삼정(三政)-전정(田政)ㆍ군정(軍政)ㆍ환정(還政)"의 문란을 가져왔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이거니와,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이 백성들을 착취해 그것을 벌충하자,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순조"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19C는 굶주림과 학정에 성난 백성들이 끊임없이 민중 봉기를 일으킨 시대였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수백 차례의 농민봉기는 정권 교체나 기득권 획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민중의 항거였다. 60년간 계속된 "세도 정치"는 "농민항쟁"으로 조성된 정치적 위기 속에서 1863년 "고종"의 왕위 계승을 계기로 막을 내렸다.

김조순

※ 김조순(金祖淳ㆍ1765~1832): 문신ㆍ종묘의 정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어린 "순조"를 도와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 사후,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조"의 즉위를 추진하다가 사형당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의 현손으로 태어났다."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조(正祖)"의 깊이 알아줌을 받았다.

3. 풍양 (豊壤) 조씨 : 헌종시조 조맹 (고려 개국공신) 

"귀인 조씨(영조 후궁)ㆍ신정왕후(익종 (순조의 자) 비)ㆍ효순왕후(진종 (영조의 자) 비)"가 배출되었다.

종묘배향공신(5명), 영의정 2명(조현명ㆍ조인영)을 배출하였다. 19C "순조" 때, 왕실의 외척 세력으로 위세를 떨쳤다.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18C "조도보(한평군파)"의 손자 대 이후이다. 19C "순조" 대에 들어서면서, "조진관ㆍ조득영"이 "안동 김씨" 세력과 결탁하면서, 중앙 권력에 더욱 가까워졌다.

1819년(순조19), "풍양 조씨 조만영(이조판서 조진관 아들)"의 딸이 "효명세자 빈(신정왕후ㆍ헌종 모)"으로 책봉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27년, "이조판서 김교근"이 병으로 눕자, 그 자리에 교체되어 인사권을 거머쥐었다. 이에 "순조"는 건강상 이유를 들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는데, 이는 "안동 김씨" 세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조만영"은 "어영대장(왕을 호위하던 군영)"을 겸직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해, "풍양 조씨" 세도의 기초를 튼튼히 마련했다. 그는 또한 "훈련대장(휘하 군사력이 중앙군영 가운데 가장 큰 정예병)"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1829년에는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경제권도 관장했다.

1830년(순조30),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자, "풍양 조씨" 세력은 정계에서 잠시 밀려났다. 이후 "헌종"의 친정이 이루어지자, "풍양 조씨" 가문이 정국 운영의 주축이 되어, "안동 김씨" 가문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849년, "헌종"이 갑자기 죽자, "안동 김씨"의 강력한 견제와 대응ㆍ"풍양 조씨" 가문의 내적 분열 등으로 세도는 쇠퇴했다.

4. 여흥 (驪興) 민씨 : 고종시조 민칭도 (공자의 10제자 가운데 1)

원경왕후(태종비)정순왕후(단종비)장순왕후(예종비)공혜왕후(성종비)숙의 민씨(연산군 후궁)정빈 민씨(선조 후궁)인현왕후(숙종비)철인왕후(철종비)명성황후(고종비)순명효황후(순종비)남연군 부인(흥선대원군 어머니)여흥부대부인(흥선대원군 부인)" 배출되었다조선시대 동안, 문과 급제자(242), 상신(相信12), 종묘 배향 공신(6)을 배출하였다.

1차기 : 고려 말~ 조선 초

"민영모(민칭도 증손)" "인종" ,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원외랑"을 거쳐, "명종" "문하시랑평장사태자태사"를 지냈다. "민영모" 아들 "민식민공규"는 각각 "형부상서판병부사"를 지내면서,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민지(민식의 증손)" "원종" ,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첨의정승"을 지냈고, 1321(충숙왕 8)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2차기 : 숙종~ 영조

"민진원(인현왕후 동생)"1691(숙종17) 문과에 급제한 뒤, "영조" 대까지 "병조정랑사복시정전라관찰사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를 지냈다"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고,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3차기 : 구한말 고종

"민치록" (명성황후)"고종"의 비가 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성부원군"에 봉해졌고, "명성황후""흥선대원군"과 대립하면서, "고종"의 친정(親政)을 실현하였다"민겸호""판돈령부사"를 지낸 뒤, 정치제도 개혁을 주도하였고, "선혜청 당상관"에 올라 "영의정 민규호"와 함께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민영환(민겸호 아들)""승정원동부승지성균관대사성예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지냈고, 1905"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하였다.

민겸호 : 흥선대원군 처남여흥부대부인 친동생고종 외삼촌명성황후의 친척 오빠민영환-찬 형 아버지별기군(別技軍) 창설

민규호 : 명성황후의 12촌 오빠순명효황후(순종 비)의 아버지 민태호의 친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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