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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ㆍ악녀 (10인)ㆍ부덕 (6인)

북학파 : 강위 (고종ㆍ1820~1884)ㆍ김정희 유배수발ㆍ황현의 스승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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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 (姜瑋ㆍ1820~1884ㆍ향년 64세)"는  한학자ㆍ개화 사상가ㆍ시인ㆍ금석학자(김정희ㆍ오경석과 함께 금석문 연구)로,  "김삿갓" 등과 함께, "조선 방랑시인"의 한 사람으로도 꼽힌다. 조선 말의 "3대 시인(김택영ㆍ황현)"이나, "4대 시인(김택영ㆍ황현ㆍ이건창)"으로 부른다. 또한 "매천 황현" 역시 그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공자ㆍ맹자" 외에도 "노장사상ㆍ역술" 등에도 학식이 있었고, "선불교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1. 강위 (姜瑋1820~1884향년 64)

1883(고종20), 언론기관인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했다"황성신문"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며, "국문 연구"에도 전력하였다"박규수오경석이동인최한기유대치김정호" 등과 가깝게 지냈다"김홍집유길준윤웅렬윤영렬어윤중변수이건창김윤식" 등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출 생 :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 성남시 중원구 복정동)       가 족 : - 강진화(姜鎭華공주영장(營將)군수), - 박씨(박희혁의 딸)  /  - 강문근(무과 급제선전관, 중군, 경력)

저 서 : 고환당수초(古歡堂收艸)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국문자모분해(國文字母分解)ㆍ손무자주평(孫武子注評)경위합벽(經緯合璧)용학해(庸學解)북유일기(北游日記)ㆍ북유담초(北游談草)북유속담초(北游續談草)충효경예주합벽(忠孝經集註合璧)ㆍ동문자모분해(東文子母分解)의정국문자모문해(擬定國文字母文解)간독정요(簡牘精要)  /   시 집 : 고환당시초(古歡堂詩草)청추각수초(聽秋閣收草)한사객시선(韓四客詩選)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  /  작 품 : 담초여황효후시랑(談艸與黃孝侯侍郞)

강위

"실학"에서 "개화파"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가된다"강위이기" 등은 "실학사상과 근대변혁사상의 연결고리"로 주목받기도 했다, "실학파"가 사실상 해체된 후, "박제가"에서 "김정희"로 이어지는 "북학사상""근대 개화파" 연계해준 "선각자" 가운데의 한 사람이라는 평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체제의 변혁을 도모한 "혁명가"는 아니었다그가 "난민"이 요구하는 "격문"을 써주지 않은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는 한계를 보인다는 평도 있다12대조 "강희신(姜熙臣)""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에서 쫓겨난 뒤 몰락, "무과"에 응시하여 대대로 "무관 가문"이 되었다"문벌상의 제약곤궁한 가정형편부정행위"로 이루어지는 "과거시험과거대리시험관매직" 등으로 환멸감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그는 전국을 방랑하다가, "정건조"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 성리학적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의 문하를 다시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시험"을 단념하지 못하고, 계속 응시했고, 1844(헌종10) 결국 "과거"를 단념하게 된다"민노행"이 사망하기 전, "김정희"를 찾아가 보라고 권고하였다"제주도 대정현"에 귀양 가 있던 "김정희"를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5년간 "서예그림"을 배웠다"민노행(閔魯行)"에게서는 경사학문을,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서는 시문서화를 배웠다"김정희""제주도북청" 유배지까지 따라가면서, 스승으로 섬겼다"민노행김정희"는 공통적으로 "고증학"에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므로, 그들에게서 학문을 익힌 "강위" 역시 "고증학" 학문의 바탕을 두고 있었다1876(고종13) "강화도 조약"에 참석하였으며, 이후 "일본" 왕래하면서, 해외의 실태를 파악하여 국운 회복에 힘썼다.

2. 인 물 : "이언(易言) 한글번역본" 저자 논란

곤궁했던 "하급 무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에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다 한다그는 어려서부터 병이 많아 빼빼 말랐다고 하며, 그리하여 옷조차 주체하지 못했다고 한다"개항기" 내내 문제시됐고,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던 근대정치서 "이언(易言)"의 한글 번역본의 저자로 "강위"가 지목되고 있다"이언"은 국내 수요의 급증으로 1883.03월 복각본까지 간행되었을 정도로 많이 읽힌 저작이었고, 1883.12.22., "윤선학(尹善學)의 개화소" 등도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한글 번역본은 "4"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한글 연활자""한성주보"에 사용된 한글 자모와 동일하고, 출판이 "광인사"에서 이루어졌으므로, 1884.03월 이후 "한글번역본"이 나온 것이고 "강위"1884.04.05.일에 사망했으므로, 그 이전에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들이 있다일설에는 1894년까지 살아있었다는 설도 있으므로, "이언(易言)"의 한글 번역본의 유력한 저자로 지목되고 있다.

3. "김정희""제주도북청" 유배 수발 방랑 생활방랑시인

일찍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사사 받고, "박규수" 등과의 친분관계에도 불구하고, 문인 "이건창"의 주선으로 "황현"도 그의 문하에 찾아와, 시와 글을 배웠다그는 전국을 방랑하며,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다가, 1860(철종10) 무렵, "첨정"을 지낸 "정문용(鄭文容) "의 식객이 되어, 우거하였다1860년대 이후, "민란"이 계속 발생하게 되자, 현실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1848, "김정희""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를 따라 "한성부"로 상경하였다.1851(철종2), "김정희""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남 북청"으로 유배되자, 따라가 시중 수발을 들었고, 1854(철종5), "김정희"가 유배에서 석방, "북청" 귀양지에서 풀려나자, "김정희" 하직하고, "방랑생활" 들어갔다.

"강위"가 이름을 떨친 것은 "시인"으로서가 먼저였다"김정희"를 떠난 이후, "방랑생활"을 하며, 많은 ""를 남겼고, 그의 문집은 대부분 "시문"이었을 정도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다이후 "고종" 초기의 "무신 신헌(申櫶)"의 식객이 되었으며, "신헌"의 식객생활 외에 전국을 유랑하였다"강화도 방문" , 만난 "이건창"은 한때,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서화"를 배웠다그밖에 "정만조" 등도 그의 문하에 출입했다.

강위는 평생 한 개의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시인"이지만, 가을 소리를 듣기 위해, 상상 속에 집 하나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청추각"이라 할 정도로 마음은 언제나 넉넉하였다그러나 한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에 고뇌하기도 했다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이건창"의 사랑채에는 "강위여규형정만조김택영" 등이 출입하면서, "시회"를 열던 곳이었고, 자연스럽게 "강위"에 대한 명성이 퍼져 나갔다.

4.  "김옥균"과 관계

1882.03(고종19), "김옥균서광범"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선공감가감역관" 임명되어, "신사유람단 서기"의 직함을 받고, 제자인 "변수"와 함께 이들을 수행, 일본을 다녀왔다그는 "김옥균서광범"의 일본 사행과 서양 여행계획을 접하고, 당시 60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각서를 쓰고, 따라나섰다"김옥균""노옹(老翁)이 함께 가기를 빌었으나, 혹 어려움을 만나 후회할까 두려워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시를 지어 맹세하면서 진심으로 토로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특히 그를 예우해고, 그 역시 "김옥균"의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왔다그는 "고환당수초"의 첫 머리에 "아아! 나는 문지도 비천하고, 지질도 용렬하건만, 젊어서의 독서로 약간 이름이 났었기에,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릇 알려지게 되었도다. 그 가운데서도 시독 김옥균 대인은 나를 특별히 예대해 주었기 때문에, 항상 감격스러운 마음 품고, 그 분을 위하여 힘 자라는 데까지 봉사하기를 원했다."고 썼다.

5.  "한성순보" 발간

"한성순보" 발행 당시, 그는 "언문"을 함께 병용하는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여, 성사시켰다"강위김윤식이노우에 가쿠고로" 등의 노력과 "고종"의 재가로 차후의 "한성주보""항설(港設)과 조보(朝報)"의 교환이 가능한 "언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1882.03(고종19), "김옥균서광범"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선공감가감역관" 임명되어, "신사유람단 서기"의 직함을 받고, 제자인 "변수"와 함께 이들을 수행, 일본을 다녀왔다.

1882.09, "일본"을 다녀온 직후, 그는 "고종"에게 "언로의 확대"를 위해, "신문의 발행보급"을 누차 상주, 건의하였다"언론의 보급"을 통해, "사서"들에게도 "정사의 운영권간들의 농간"을 알게 하여, "진충보국의 길"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3(고종20), 문하생인 "김옥균유길준" 등의 부탁으로 "박문국(博文局)" 설치를 지원, 그해 "박영선"함께 "박문국"의 신설에 참여하고, "일본청나라"의 언론인들의 자문을 얻었으며,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초청하여,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 간행하였다"박영효""사행 길"에 동반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박문국"에서 "번역인쇄" 사무에 임했으며, "이언"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그가 그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상해신문지지신보"를 함께 번역했다.

"한성순보"를 편찬하며, 신문을 보급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후일 "강위를 한글어학 스승으로 삼았다" 회고한다"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조선의 가나(가명)" 사용하라는 권유도 있었고, 조선에 살며 외보를 역해야 하는 처지에서 한글 연구가 필요했는데, "유대치"와 그 외 2~3인에게 상담한 끝에,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어학에 밝은 "강위"를 선생으로 모셨다고 한다.

"한언혼합문에 관하여, 강위의 의견을 보자면, "옛날 궁중에서 어떤 왕비가 한문에 정음(正音)어서 문서를 만든 일이 있으나, 그 외에는 실제로 행해진 일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실행이 된다면 편하다할 것이다"라는 것으로, 선생(이노우에 가쿠고로)은 그(강위)를 상대로 착착 연구를 추진했다.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졌을 때, "김윤식" 씨에게도 말하고 "박문국원" 등에게도 보이니, 누구나 마찬가지로 "이것은 편리하다"라는 것에 동의했다 그 후에는 필담에도 이를 사용하고 또한 일본어의 가나(假名)만을 언문으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읽혀 보았는데 누구라도 즐겨 읽고, 그 가운데 "일본과 조선과는 참으로 동문동어(同文同語)의 나라이다."라고 기뻐하였다." < 이노우에 가쿠고로 전기에서 >

6. 친구 "정건조(이조판서)"와 인연

소년시절, 과거시험에 뜻을 두고 공부할 때,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시험을 준비하였으며, 이때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이때 인연으로 훗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평생의 친구로 왕래하였다.

그는 낙방 이후 불우한 나날을 보냈지만, "정건조"는 그를 계속 찾았고, 인연은 계속되었다그의 저서 중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1862"정건조"의 요청에 의해 지었으나, "정건조" 여러 번 읽고 난 뒤, 과격한 용어가 많다며, 용납되기 어려우니 어구를 수정해 달라고 청하자,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으나, 그러나 "정건조""초고"를 주워서 "정창(鄭昌)"에게 간행하도록 하여, 수년 뒤에 저자에게 보여주고, "서문"을 받은 것이다.

7. 논 란 : 친구 "정건조(이조판서)" , "여종 통정" 사건

그가 18세 무렵, "정건조" 집에 함께 글공부를 할 때였다당시 "정건조" 집에는 갓 결혼한 19살 계집종이 하나 있었는데, 아름다운 얼굴과 총명함이 "조선 선조 때 기생 "홍랑(洪娘, ? ~ ?)"에 견줄 만 했다는 이를 마음에 두고 있던 중이었는데, 마침 둘이 눈이 맞아, 그녀의 남편이 외출한 밤에 만나기로 서로 약속을 했고, 는 본래 "정건조"와 같은 방에서 함께 잤었는데, 이날 밤에는 "홍랑"과 운우의 정을 나누고 슬며시 "사랑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른 아침, 변소에 갔는데, 그 집 바깥 변소가 "홍랑"의 방과 붙어 있었다이때 "홍랑"의 방 안에서는 "홍랑"의 어머니가 매섭게 매질해 대는데, "홍랑"은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그는 "변소"에 앉아, 까닭을 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으로 귀를 바짝 세우고, 방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홍랑"의 어미는 언성을 높이지 못하고, 거친 매질을 계속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딸을 꾸짖었다.

"내가 3대를 이 댁의 종으로 살아왔는데, 어쩌다 너 같은 자식을 낳아, 상전댁을 망하게 할 터이면 너를 먼저 죽이고, 내가 따라 죽는 것이 옳다 속담에 이르기를, 양반 댁의 예쁜 종년은 문 밖에 정을 통하는 남자가 열둘이요, 문 안에 정을 통하는 남자가 열둘이라 하니, 정히 서방 생각이 나면, 문 밖문 안의 그 많은 불알 달린 놈과 정을 통하면 일이지, 그 놈들 다 버리고 하필이면, 상중에 계신 상전을 유혹하여, 상전댁을 망하게 하는 뜻이 무엇이냐? , 무지한 년아! 이 댁이 어떤 가문이더냐 상제님이 건을 쓰고, 행랑채 계집종 방에 외입했다는 일을 남이 알기라도 하면, 이 댁은 여지없이 망하는 게 아니냐?

그러자 "홍랑"이 울면서 대답했다. "죽어도 그런 일 없습니다."  이 말에 더욱 세차게 매질을 하며, 그 어미가 말했다"이년아! 무슨 거짓말로 이 어미를 속이려 드느냐?", 대노하였다이 말을 듣고, "강위"가 변소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야밤에 "홍랑"을 만나러 갈 때에 "토시" 끼고 갔다가, 더워서 이를 벗어 놓고, 빠져나온 것이 떠올랐다

"강위"는 급히 변소에서 나와, "행랑채 홍랑"의 방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꿇어 엎드렸다그리고 "홍랑"의 어미에게 넙죽 절한 다음, 어제 밤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빌었다"홍랑"의 어미는 짐짓 성내는 것처럼 하면서도,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그러면 그렇지, 내 딸이 설마 하니 에이, 여보시오! 글 읽는 선비가 외입하는 수단이 변변치 않소 그려 어서 이 토시나 가지고 가시오. "토시"를 가지고, 슬며시 방으로 들어와, 본래 놓였던 자리에 놓으니, "정건조"는 그제서야 일어났다.

"정강성(鄭康成)의 계집종이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음은 시경 구절을 주고받는 것에 불과하지만, 정씨의 계집종에 이르러서는 상전에 대한 충성심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사사로운 정을 끊어 없애게 하니, 가히 이 가문의 예의 법도를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이 날 이후로 혼외의 여색을 탐하는 일을 단칼에 베어 내고, 평생 내 스스로를 지켰노라!이후, "강위"는 술담배는 가까이해도, 평생 "축첩이나 외도를 하지 않았다" 한다.

8. 사상과 신념

① 사회적 구속에 대한 반발

그는 스스로 "진정한 벗을 4명"이라 하였는데, 그 중 "3명이 역관"이었다. 사실 "벗"이라 칭하였지만, 이들은 강위보다 나이가 20~ 30년 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벗"이라 말하는 모습에서 그는 연령이나 신분을 구속하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신분상으로는 "양반"이었지만, "역관ㆍ의관ㆍ중인ㆍ서자"들과도 어울렸고, 그의 지우들 중에는 "승려 이동인"도 있었다.

그의 신념은 한걸음 나아가 "양반"의 특권을 없애고, "귀천의 차별을 타파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신보다 연하이고, 자신의 문인들의 동료였는데도 "김옥균"의 인품에 탄복하여, 그를 부를 때는 "김옥균 대인"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는 늙은 유생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을 꺼려하였고, 주로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좋아하였다. 일부 예외가 있었다면, 자신의 문인인 "김홍집ㆍ김윤식"과 개화파 동지인 "박규수" 등 소수였다.

② 국가 위기론

그는 당대의 사회 부패를 국가적 위기로 규정했다. "오늘날 군정(軍政)과 농정(農政)이 문드러져서, 위아래가 모두 곤궁하다.  백성은 아침저녁의 끼니를 이을 수가 없고, 나라에는 1년의 저축이 없어, 갑작스런 흉년이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무엇으로 막겠는가?" 이렇게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근본적인 부정에 두고 있다.

그 부정은 크게 "제도ㆍ권력자", 두 부류로 나누어 보았다. "제도"의 부정은 "법의 폐단ㆍ토지겸병" 따위를 들었는데, "토지 겸병"을 한없이 허락하면, "부의 편중"은 물론 국가재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③ 시인론

그에 의하면, "시"는 "얇은 글재주로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시"를 지을 때는, 자신이 그 "화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가장 훌륭한 시는 재주 부리지 않고 얻은 것이다. 재주를 부려 얻은 것은 훌륭하지 않다.  난새와 봉황의 맑은 소리와 주옥의 빛나는 기운, 병든 이의 앓는 소리, 슬피 울며 흘리는 눈물이 어찌 모두 재주를 부려 얻어진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시 삼백 편은 모두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바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발분하지 않고는 지을 수가 없다."

④ 양반 특권 철폐론ㆍ양반 병역 부과론

그에 의하면, 법의 폐단으로 보면, 갈래가 여러 가지이지만, 무엇보다 "귀천(貴賤)"을 나누는 것이다. 도대체 양반들은 "군역"을 지지 않고, "전세(田稅)"에도 온갖 특권을 누린다. 이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조세"를 매기고, "군대의 의무"를 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군정"에 대해서는 왕조 초기처럼 왕족ㆍ양반의 자제에게도 군역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반들이 군역을 지지 않는 점"을 문제 제기하였다. 실제 양반들은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군대"에 나가지 않았고, 게다가 "군"의 경비로 내는 "군포"도 물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조세"를 매기고, "군대의 의무"를 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정"은 법에 규정된 대로 20년마다, 토지측량을 철저히 하여, 양반부호들이 소유 토지를 토지대장에 올리지 않는 폐단을 엄격히 적발해, "전세(田稅)"를 부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균전소(均田所)"를 두어 이를 관리케 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관리는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특정 부호가 땅ㆍ재물을 독점하는 것도 정부 차원에서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⑤ 환곡제도 개혁론

그는 조정에서 "농민의 빚"을 탕감해줄 것을 주장했다. 풍년에 거두어 들였다가, 흉년에 양곡을 나누어주는 "환곡제도"를 악용해, 농민을 착취하는 지주ㆍ 관리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농민들의 이자 빚은 "전액 탕감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서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에서 "민중의 마음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⑥ 삼정 문란에 대한 대책

1862년, "제주도"로 가던 길에 친구인 "판서 정건조"에게 초빙되어, "삼정(三政)의 폐단"에 대해 "직납 방법ㆍ감독 규찰" 등에 대한 장문의 "시정책"을 적어주었다. "정건조"의 강권에 의하여, 지은 것이 3만 어에 달하는 시무책인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인데, 그 내용이 너무 혁신적이라 "정건조"가 이를 탐독하고는 조정에 제출하는데 난색을 표하자, 그는 즉석에서 이를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백성들은 아침 저녁거리도 없으며, 나라에서는 1년 저축도 없다.  임금은 마음을 졸이고, 모든 신하들은 오로지 탄식만 하고 있지, 아무 대책이 없다.  관아의 관리들은 농간을 부리고, 서울의 관료들은 세력을 믿고 날뛰고, 시골양반들은 말을 둘러대고 토호들은 위엄을 부린다." 그러나 "정건조"는 보관하고 있던 "초안"을 수습하여, 몇 년 후 "강위"에게 가져와, 다시 "서문"을 받아와, 후일 "의삼정규폐책"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1862년(철종13), "삼남지방(충청ㆍ경상ㆍ전라)"를 떠돌다가, "민란"을 목격하였다. "민란"의 와중에서 "난군"들에게 납치ㆍ감금당하여, 격문을 기초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고, 갇혔으나, 탈출에 성공, 한양으로 올라왔다. 1862년(철종13년), "정건조"의 주선으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에 참여하였다.

⑦ "흥선대원군"의 "위정척사론쇄국정책론" 비판

그는 "외국의 정형도 모르고, 떠드는 소리"라고,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 참여하였던 "강위"는 아무런 준비도 없는 조선이 일본과 싸워, 조금도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무조건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척화론자"들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오경석ㆍ박규수ㆍ강위"는 안으로는 "대원군" 등 "위정척사" 세력과 맞서고, 밖으로는 "일본군"의 무력을 견제하며, 자주적 개항을 이룩하기 위해,. 고분군투하였다. 1866년(고종3) "병인양요"가 끝나자, "신헌"을 찾아가 "강화도 방위대책ㆍ병력추가 양성"을 건의하였다.

⑧ 국한문 혼용체

"국한문 섞어 쓰기 기사체(記事體)"를 연구하였다. 1883년, "신문 한성순보"를 발행하면서, "국한문 혼용체(한언혼합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는 한글을 "언문"이라 부르지 않고, "훈민정음"의 약칭인 "정음"이라 불렀으며, "훈민정음"과 한자를 병용하면 읽기도 편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문발간 시 "옛날 궁중에서 어떤 왕비가 한문에 정음(正音)을 섞어서, 문서를 만든 일이 있으나, 그 외에는 실제로 행해진 일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실행이 된다면 편리할 것이다"라고, "이노우에 가쿠고로" 등을 설득시켰다. 그는 "한자가 아니면 읽지 않겠다"는 사대부들을 설득, "중궁전"과 "언문" 서신을 썼던 "인목왕후ㆍ인현왕후"의 사례, "정조"의 친필서한 등을 언급하며 반박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어"와는 다르게, 단어와 단어사이를 연결하는 조사ㆍ접속사의 존재를 알아내, 일본어ㆍ조선어의 유사성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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