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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 오경석 (고종ㆍ1831~1879)ㆍ최초의 개화사상가ㆍ오세창 부친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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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 (吳慶錫ㆍ1831~1879ㆍ48세)"은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 또는 "한국 개화사상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세창 (吳世昌ㆍ1864~1953ㆍ89세ㆍ1919년 "3ㆍ1만세운동"에 참여,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의 아버지이다. "박규수ㆍ유대치ㆍ강위" 등과 더불어 초기 "개화 인사"이자, "북학파"에서 "개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형 인물로 평가된다. "오경석"이 가지고 온 "신서"는 친구인 "유대치"에게 영향을 끼쳤다. 금석학자ㆍ서예가(특히 전서체를 잘 썼다)ㆍ서화가ㆍ고미술품 감정에 조예가 깊었다.

 

1. 오경석 (吳慶錫ㆍ1831~1879ㆍ향년 48세)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조선후기 역관외교관정치인사상가작가시인ㆍ"유대치""오경석"과 동갑으로 "불심"이 깊고, 다방면에 유능한 "한의사"였으며, "유대치"를 따르는 이들로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었다결국 "오경석"의 영향을 받아, 초기 "개화사상"이 일어난 셈이다이런 까닭에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 또는 "한국 개화사상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출 생 : 서울        부 모 : - 오응현(吳膺賢중국어 역관지중추부사), - 전주 이씨(지중추부사 이의무의 )        자 녀 : 오세창(역관독립운동가)        가 족 : 손자- 오일육(吳一六장면 비서관경무대기붕 비서관 역임)

스 승 :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인 "이상적(李尙迪)"의 문인, "박제가"를 사숙(私淑)하였다.     저 서 :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삼한금석록삼한방비록(三韓訪碑錄)양요기록(洋擾記錄)

오경석

골동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수집한 골동품에 대한 소장입수과정을 적은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을 간행하여 남겼다 각종 서한 외에도 "범유경(范維卿)" 같은 골동품상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류한 것도 수록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유실되었다 "천죽재차록"에 나온 일부 골동품에 대한 것은 "아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일부 인용되었다 그는 "골동서화"를 구입해 감상만 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글씨그림을 보고 연습하여 작품을 남겨, "서화가"로도 명성을 남기게 되었다.

2. "북촌" 청년들"로,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 형성

그는 대대로 "8대" "역관"을 하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글씨ㆍ그림을 즐겼다. 어려서 "박제가의 북학"을 공부하고, "김정희의 금석학"을 공부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인 "이상적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ㆍ중국어ㆍ서화" 등을 배웠다. 

16살 때, 1번으로 "역과""한학"으로 합격했는데, 그때 누구나 당연하게 여겼다고 한다1846, "역과"에 합격하여, "중국어 역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853"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개항론"을 주장하였다"병인양요"의 해결과 "강화도 조약" 체결에 참여하여 전란 방지에 공헌하였고, 관직은 "숭록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으나, 1879"콜레라"에 전염되어, 죽은 "후처"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길에, "과로풍증콜레라 감염" 겹쳐, 병석에 누웠다가, 바로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북경"에 왕래하면서, 세계정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흡수하여 조선의 국제무대 등장을 주장했으며, 그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誌)"와 같은 책은 세계정세를 국내에 소개하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

그가 베이징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역사과학정치 서적들""이동인"이 구해온 "박물서양어 서적태엽기계망원경돋보기" 등과 함께, "유대치강위박규수" 등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들을 통해 "김윤식김홍집유길준김옥균박영효서재필"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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