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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ㆍ악녀 (10인)ㆍ부덕 (6인)

북학파 : 박규수 (고종ㆍ1807~1877)ㆍ양무운동ㆍ박지원의 손자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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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朴珪壽ㆍ1807~1877ㆍ70세)"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의정부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종묘 고종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박지원"의 학문ㆍ사상의 계승자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후, "양무운동"처럼 서양기술의 선택적 도입ㆍ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정희"와 교류가 깊었고, "김옥균ㆍ홍영식ㆍ박영효ㆍ서재필ㆍ박정양ㆍ윤치호"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다. 1872년(고종9), "철종"에게 "박영효(제자ㆍ일족)"을 "부마"로 추천했다.

 

1. 박규수 (朴珪壽1807~1877향년 70)

문인(홍문관 대제학 겸 우의정)ㆍ외교관ㆍ개화사상가ㆍ철학자ㆍ화가ㆍ지도 제작자ㆍ1863.12월(고종즉위년)," 조대비(趙大妃ㆍ효명세자(익종)의 정비ㆍ고종 양어머니)"가 "흥선대원군"에게 천거하여,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돼,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1865년(고종2),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해, "흥선대원군"이 착수한 "경복궁 중건작업" 실무를 총괄했으며, "흥선대원군"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경복궁"이 완성될 때까지, "영건도감제조" 직은 계속 겸임했으며, 1866년(고종3),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터졌을 때, 이를 격퇴하였다.

1875년(고종13),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박규수ㆍ제자 김홍집ㆍ역관 오경석"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최익현ㆍ김평묵" 등의 강력한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ㆍ물리치고, 막후에서 조정대신들을 움직여,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고, 그 뒤 그는 "척사파"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그림도 좋아해서, 수백 여 편의 "그림ㆍ글씨"를 남겼다고 하나, "6ㆍ25전쟁" 때, 작품들이 대부분 소실됐다. 그의 글씨는 "청나라 고관대작"들의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문인화ㆍ수묵화" 외에도,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東津方略)"을 그렸고, "평안도 전도"를 그리기도 했으며, "청나라"의 "세계지도ㆍ천문도"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해, 세계 지도인 "혼평의(渾平義)"와 "천문도ㆍ간평의(簡平義)" 등 천문지도를 제작했다. 

• 출 생 : 조선 한성부 종로방 계동        • 사 망 : 조선 경기도 수원군        • : 환재(桓齋瓛齋)헌재(獻齋)환재거사(瓛齋居士)

• 가 족 : 부- 박종채(朴宗采, 현감) / 전주 류씨(정5품 통덕랑 류영(柳詠)의 딸)  / 조부- 연암 박지원 (실학자ㆍ외교관ㆍ사상가ㆍ소설가ㆍ문인)        • 스 승 : 이정리이정관류화김정희의 문인

• 경 력 : 1848(헌종14, 42세)- 무신 증광시(戊申 增廣試) 병과(丙科) 25위 /  "헌종"은 "일찍이 부왕의 사랑을 받던 너를 내가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앞으로 크게 쓸 것이니, 진력하라"고 했다.

• 저 서 : 환재문집ㆍ환재집(瓛齋集)ㆍ환재직계(瓛齋織啓)ㆍ환재수계(瓛齋繡啓)ㆍ장암문고(莊菴文稿)ㆍ편저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ㆍ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儀例)ㆍ금유시초(錦㽔詩鈔)ㆍ환재유고(瓛齋遺稿)ㆍ"고전 읽기ㆍ공부 방법"을 흥미롭게 엮은 "상고도회문의례(16권)"을 지었다.  /  시 집 : 금유시집(錦㽔詩集)ㆍ장암시집(莊菴詩集)ㆍ금유지림(錦㽔志林)

• 작 품 : 천문도ㆍ혼평의(渾平義, 세계지도)ㆍ간평의(簡平義, 천문지도)ㆍ동진방략(東津方略, 경기도 지도)ㆍ직접 제작한 "지구본 설계도 평혼의(平渾儀)"와 "천문지도 간평의(簡平儀, 해시계이자 천문도)"의 "종이제작본" 등이 현재 전하는데, 2006.05월 "실학박물관" 기공식 때, 공개됐다.

• 스 승 : 박제가ㆍ김정희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박규수)  /  사 숙 : 박지원(조부)ㆍ유형원ㆍ박제가ㆍ이익ㆍ정약용ㆍ서유구ㆍ김매순ㆍ조종영ㆍ홍석주ㆍ윤정현   /   문 우 : 남병철ㆍ김영작ㆍ김상현ㆍ신응조ㆍ윤종의ㆍ신석우

• 친 구 : 김정희(추사)ㆍ유대치(중인, 한의사)오경석(중인, 역관)이동인(승려)등은 신분사상을 초월하여, 사귀었다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해야 된다고 했다.

• 제 자 : 김옥균ㆍ김홍집ㆍ유길준ㆍ박영효ㆍ서재필ㆍ박정양ㆍ김윤식ㆍ어윤중ㆍ윤웅렬

박규수

1848년(헌종14), 42세 때, "증광시"에 합격해 출사했다. 당시 "세도정치" 하에서, 비주류였던 "북학파 출신"으로 요직과 거리가 멀었지만, 1862년(철종13) "진주 민란"을 수습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승리하는 등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크게 승진했다. "사헌부 대사헌ㆍ홍문관 제학"을 거쳐,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중 하나인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조참판ㆍ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다.

1861년(철종12)~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승문원"에서 각종 외교 문서들을 작성했다. 영어를 몰랐던 당시 "조선 정부"였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해석한 "중국" 문헌들에 기초해서, 서양과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 2번에 걸친 "양요(洋擾)" 때, "청나라로 보낸 자문(咨文)ㆍ미국에 대한 힐문장(詰問)ㆍ통상 요구에 대한 거절 문건"을 대부분 그가 만들었고, "강화도 조약" 때도 조정 중론을 모으는 것을 넘어, "일본"을 상대로 한 외교문서 다수의 자문ㆍ감수ㆍ교열에 참여했다.

1863.12월(고종즉위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돼,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막 즉위한 "고종"은 "효명세자(익종)의 양자"로, 입승 대통돼 보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효명세자(익종)의 정비이자,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趙大妃)"가 남편의 생전 절친했던 그를 "흥선대원군"에게 천거했다.  "박규수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익종께서 크게 쓰려던 인물이다.  그가 벼슬한 뒤, 이제까지 그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한 번 써보는 것이 좋겠다."며,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1866년(고종3), "제너럴 셔먼 (The General Sherman) 호" 사건이 터졌다. 선교사 "토마스(한국명, 최난헌)" 등을 태운 "미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 정부의 분명한 통상요구 거절에도,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대부분이 사살되고, "선장ㆍ선교사 토마스"는 "평양 부민들"에게 맞아죽었다. 외세에 대해 민심이 흉흉했던 차에 "박규수"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아울러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도 얻게 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때까지 줄기차게 "개화"를 주장하면서, "대원군ㆍ척사파"들과 계속 갈등을 빚고 실각했으며, 1877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 중, 사망했다.

1875.9월(고종12), "일본"은 "운요 호(운양호)"로 "강화도"를 포격했다. "박규수ㆍ제자 김홍집ㆍ역관 오경석" 등은 다시 한 번 수교를 강력히 촉구하고 설득해, 1876.02월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됐다. 이후 다수에 의해, "매국노"로 규탄 받고, 모함에 시달린 그는 병석에 누웠다. 1877.02월(고종14), 임지인 "수원부 청사"에서 사망했다. "고종"은 슬퍼하며, "도량과 식견이 고명하고, 문학이 박식해서 내가 의지하고 온 조야(朝野)가 기대하던 사람이다.  근래에 우의정의 벼슬을 벗은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거기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바로 평시에 정력이 강직하여, 잠시 휴식하게 해주면, 다시 등용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까닭모를 병으로 갑자기 영영 가버릴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 슬픔과 한탄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라며,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3년 치 녹봉(祿俸)"을 "부의"로 지급했다.

2. "효명세자 (孝明世子)"와 친분은둔 생활 (20년 간)

1828, 20"박규수""효명세자(孝明世子)"와 친분을 나누며, "개화"를 논했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학문과 미래를 토론했는데, 주로 "주역""나랏일"이었다후일 "익종"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대리청정 2년 째"에 아직 벼슬도 없던 20세의 "박규수"를 불러들여, "박규수의 학문은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큼 출중하다", 그를 곁에 뒀다"주역"을 신하들 앞에서 진강케 하는 한편, "조부 박지원"의 저작을 모두 모으라 명하고, "박규수" 자신의 저술도 있으면, 같이 올리라 했다이때 직접 "상고도설(尙古圖說) 80"을 지어, "효명세자"에게 바쳤고, "효명세자"는 그를 몹시 아꼈다.

"효명세자""대리청정" 중에 "안동 김씨 세도문벌들"을 배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노론" 비주류 및 "남인"을 중용하는 한편,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까지 과감히 등용하는 등 "개혁군주"로서의 싹을 보였다"박규수"는 이런 "효명세자"의 개혁 가능성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그러나 "효명세자"1832년 갑자기 훙거하면서, 그의 꿈은 꺾였다슬픔과 실망이 너무 컸던 나머지, 원래 자신의 자와 호의 "(: 굳셀 환)"이라는 글자를 "(: 옥홀 환, 재갈 얼)"으로 바꿀 정도였다"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됐던 데다가, "효명세자어머니 유씨아버지 박종채"의 연이은 죽음으로 상심한 그는 20"칩거"에 들어간다.

3. 학 풍

학풍은 "김윤식(제자)" 의하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고고(考古)의기(儀器)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했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그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박지원박제가" "노론북학파" 외에도 남인인 "정약용서유구", 북인인 "유형원윤휴"등의 학문도 폭넓게 사숙했다다양한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사숙하였던 탓에, "어떤 특정한 사상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고, 또한 "소론""유수원"의 학문에도 관심을 갖기도 했다.

4. 대원군과 갈등실각

1873.12(고종10), "일본"이 자신들의 "왕정복고"와 이에 대한 "정식수교 요청"을 통고해 왔다"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은 종전의 격식을 버리고, "고종"에게 "()칙령(勅令)대일본(大日本)" 등의 표현을 써 보냈다이른바 "서계문제(書契問題)"로서, "조선 정부"로서는 적어도 대등한 위치도 아니고, "일본""상국의 위치"에서 써 보낸 외교 전문에 대해, 수리를 거부했다.

"조선 정부"에서 충격 속에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그는"직함(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優賞)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관작(官爵)을 승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 이를 교계(較計)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붙일 일이다. 라며, 그냥 형식적인 것이니, 연연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흥선대원군"을 직접 찾아가, "일본"이 평화적인 뜻으로 수교하려는 한 "대국적 견지"에서, "서계" 받아들이자고 설득하였으나, 역시 거부됐다. 1874.09(고종11), "영의정 이유원"과도 계속 충돌하고, 더 이상 자신의 뜻이 통하지 않는 걸 납득하게 된 그는 사퇴했다1875.05(고종12), "조선 정계"에서 은퇴한 몸 임에도,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만약 저들(일본)이 포성을 한 번 발사하기에 이르면, 이후 받으려 해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라며, 재차 설득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5. 인물일화

그의 집안은 "고조부 대"까지는 "한성부의 벌열가문"이었지만, "조부 박지원" 때부터는 재산이 없었다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문하생인 "생원 주씨(周氏)""박규수" 모르게 "80"을 사뒀다그런데 "신씨(申氏) "을 가진 시골노인이 찾아와, "연전에 사기를 당해, 대감댁 땅을 모르고 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했다.

"박규수""() 생원" 불러, "땅 문서""신씨(申氏) 노인"에게 주라 했다"() 생원"이 후생들을 위해, 그러지 말라고 애걸하였으나, "박규수""백성이 있고, 사대부가 있는 법"이라며, 끝내 "신씨(申氏) 노인"에게 주게 했다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폭넓은 견해를 갖게 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조종영(趙鍾永)" 등 명망 높은 성리학자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만큼(망년지교, 忘年之交) 학문적으로 성장했다어린 시절부터 풍채가 컸고, "논어"를 즐겨 읽어, 연습장에 반복했다특히 다음 구절을 좋아했다고 한다 "孝民可以爲臣 (효민가이위신) 효도하는 사람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君子可敬而不可侮 (군자가경이불가모) 군자란 남을 공경 할망정, 멸시하지는 않는다 小人可侮以不可敬 (소인가모이불가경) 반면 소인배들은 남을 멸시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

두 부부는 결혼 후,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었다어느 날 어머니 "류씨"가 혼수품으로 데려온 ""이 앞길을 인도하는 태몽을 꿨고, 아버지는 "박지원"에게 "옥판(玉版)을 선물 받는 꿈"을 꾸고, 임신 사실을 알았다정말 어렵게 가진 자식이었고, 태몽 때문에 이름을 "규학(珪鶴)"이라 했다가, 30세에 "규수"로 개명했다.

7살 무렵, "박규수"가 외가에 놀러 갔을 때, 일화다항상 무언가 그리길 좋아했던 그는 땅바닥에 "불탑"을 그리며, 놀았다그런 모습을 외종조이자, 스승인 "류화"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류화는 고명한 "성리학자"였음에도 "선비가 될 놈이 왠 불탑이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진 않았다.대신 그에게 시 한 수를 지어줬다.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이, 성인군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 시작한다 네게 가르치나니, 독서법은 이것이다." (단계적으로 학문을 이루라는 충고였다.) 단순히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7살짜리 외조카 손자가 혹시라도 가르침을 잊을까, "" 한 수를 주었다학문의 길을 자연스럽게 가르치고자 했던 셈이다이렇게 그는 깎아내고,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교육보다는,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청렴했던 가풍 탓에 어려서는 넉넉지 못 해,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가끔 "진외종조부 이정리(李正履)이정관(李正觀)", "외종조부 류화(柳訸)"등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배워 알고 있었다16살 때, "도봉산" 정상에서 하늘을 두고, 읊은 "" 1수가 남아있다. ("금유시집"에 실린 일부다"3개의 커다란 환약이 허공에 떠 있구나. 하나(A)는 스스로 빛나서 밝구나 하나(B)는 덕성이 고요하여, 그저 생명을 자라게 할 뿐이구나 하나(C)는 컴컴하기가 거울과 같아서, 빛을 빌려 비추어주네."

"A(태양)B(지구)C()"에 대한, "천문학적 통찰"""로써 정리한 것이다요즘으로 말하면, "과학탐구 영역"을 공부한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시로 정리하는 것과 유사하다"" 쓰기를 통해, 복습한 셈이다다른 문집인 "장암시집"에는 지구과학적 지식을 정리한 것도 보인다"아아! 큰 안목으로 볼 때, 지구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

6. "유한준" 가문과의 인연 : 박규수ㆍ유길준

"박지원유한준"은 본래 문우이자, 친구였다가, 원수로 변하였다"기계 유씨 가문"이자, "박지원"과 같은 "노론"계에 속하였던 "유한준" "박지원"의 가문과 사돈 관계이기도 하였다젊어서 친분을 쌓았으나, "박지원 선친 묘소 문제"로 다투게 되었고, 문학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박지원" "유한준의 문장"을 비판한 후, 원수지간이 되었다.

  유한준 (兪漢雋ㆍ1732~1811ㆍ향년 79세)

조선 후기의 문장가서화가 : 저암(著菴)창애(蒼厓)ㆍ1768(영조4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김포군수" 등을 역임하고, "형조참의"에 이르렀다당대에 뛰어난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저서로 "저암집"이 전해온다그림에 대한 재능도 거론되지만, 그것을 입증할 유작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화우(畫友)들이 많았던 듯,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 "제발문(題跋文)"을 심심하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남유용(南有容조 때 대제학(大提學)"의 제자로, "송시열(宋時烈1607~1689성리학의 대가송자(宋子)라고 존칭 받은 대학자)"을 추모하여, "송자대전 (宋子大全)"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후일 "박종채(박지원 아들)"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심하게 험담하였다"유한준은 아버지가 자신의 글을 평한 편지로 인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중년 이래 비방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사람이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것이었다 당시 경주 김씨가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본디 이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므로, 유한준은 이때를 틈타서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 이 자는 우리 집안 백세(百世)의 원수이다." < 과정록 중에서 >

"박종채(박지원 아들)" "유한준"을 아버지의 원수를 뛰어넘어, 100세 동안 이어질 집안의 원수라고 성토하였다"유한준"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로 집안끼리도 인연이 있고, 연배도 비슷하여,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문학공부를 같이한 문우(文友)이자, 친구로 지냈다그런데 "박지원" "유한준"의 글을 여러 번 비평하다가, "유한준"의 문장을 두고,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 혹평했다.

반면 "유한준" "박지원"의 저작에 대해,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이라며, 몰아붙였다"박지원"이 할아버지 "박필균"과 아버지 "박사유"의 묘를 이장한 곳이 "유한준" 선산 근처였는데, "유한준" "박지원"의 이장을 반대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자신보다 먼저 요절한 15세 된 "손자의 묘" "박필균 묘" 위에 매장했고, "쟁송문제"로 발전했다"박종채(박지원 아들)"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했고, "유만주(유한준 아들)" "박지원"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고 비판하였다.

1871, "박규수(홍문관 대제학)"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보고, 그 시의 주인공을 불러들였다시를 지은 이는 16세의 "유길준"이었다"박규수"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아들이며, "유길준" "유한준"의 아들 "유회주" 4대손이었다"유길준"이 처음으로 "박규수"를 만나러 갈 때, "유진수(유길준 아버지)" "우리 집과 서로 원수같이 지내왔는데, 어떻게 그 자를 찾아간다는 말이냐", 완강히 반대했다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유길준"을 만난 "박규수"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옛날처럼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 게 아니겠냐?", 감개무량해하였다.

"박규수"는 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백세의 원수에 대한 생각은 잊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오히려 집안간의 불화를 잊자며, "유길준"의 뛰어난 재주를 거듭 칭찬하였다또한 힘써 공부할 것을 당부하며, 자주 찾아올 것을 권고했다"박규수"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오히려 "박규수"를 스승으로 받들고, 그로부터 학문을 사사받았다.

7. 사상신념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사상"의 근대 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해 촉발된 것으로, 선대의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2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서구에 보다 우수한 문명이 있음을 인정, 좋은 것은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게 됐다. "중국"의 "개화파"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항"을 역설했다.

① 개항ㆍ개국론 주장

"서양"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ㆍ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개항"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조부 "박지원"의 사상을 후대의 "개화파"에게 전달하여, "북학파의 개혁ㆍ실용주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현실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했다.

그의 "개국론"은 "운양호 사건" 직전에,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척화론"을 "공리공담ㆍ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조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ㆍ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ㆍ비판했다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ㆍ박영효ㆍ서재필ㆍ윤치호ㆍ박정양ㆍ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② 쇄국 정책

"개항파"로 알려진 "박규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김명호 교수(성균관대 한국한문학과)"에 따르면, "그가 척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양이정책에 동조했으며, 다만 교섭 여지를 주어, 서양을 중화문명에 귀의시키려 했을 뿐"이란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던 1866년, 박규수는 "강경한 척화파"처럼 보인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도, 그가 "미국ㆍ중국" 등에 직접 지어 보낸 각종 문서는 어디까지나 정부 측의 강경한 입장의 문장들이었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했다.

"김명호 교수"에 의하면, "박규수가 양이를 주장하는 이항로의 상소를 칭찬했으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불허 등을 담은 대원군의 양이정책을 전폭 지지했다"며, 박규수를 대표적인 "주화론자나 개국을 구상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신미양요 시기에 박규수가 대미수교를 원했다는 종래의 논의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확대해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한편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다가 살해된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을 거슬러온 것이 "박규수의 초청 때문이었다는 설"에 대해서도 김명호 교수는 이를 부정했다. "토마스 목사"가 "베이징"에서 박규수를 만나, 선교활동의 지지ㆍ후원약속을 받았다는 설은 전혀 사실 무근으로, "셔먼호 사건을 전후해 박규수는 베이징에 간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③ 위선적인 도덕관 비판

"북학파"들의 문제인식 속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역시 "사대부들의 도덕과 명분론이 허울이며, 위선임"을 지적했다. 선대 선비들이 현실 정치나 벼슬길을 멀리했던 것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음은 "벼슬길"에 출사한 후, 친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대저 선배들이 벼슬길을 멀리한 것은 그들이 청렴결백한 때문은 아니라 봅니다.  중고 시대의 사대부들은 실은 꿋꿋한 절개를 숭상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해득실에 밝았던 분들일 것이외다.  자기 총명과 기력을 낭비할까봐, 아니면 어차피 견제 때문에 배운 바를 발휘하기 어려우니까, 혹은 염치불구하고 봐도 뜯어먹을만한 것이 없었던 거지요.  선대의 옛사람들도 우리 같은 인간일 뿐, 행장이나 전기문에서 지나치게 그들을 정의롭고 도덕적 존재인 것처럼 미화했을 따름입니다."

공부가 완숙해 질대로 완숙해진 42세 이후의 "출사길"이니까, 젊은 혈기로 한 말은 아니다. 그를 비롯한 "북학파"들의 작품이나 언급에서 나타나는 "조선 사회 모순의 핵심은 양반들"이었고, 그들의 위선ㆍ아집이 역사적 발전을 막았기 때문에, 오늘의 문제가 계속된다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이 있었다.

④ 합리적인 외교론

외교 관계에 있어서, 도의적인 것ㆍ감정보다는 "실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라 주장했다. 이에 따라, "위정척사파"의 맹목적인 "폐쇄론"에 저항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외국의 주장이 합당하다면, 이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수용해야 됨을 역설했다. 외국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편, "타협을 통해서 절충안을 찾자"고 주장했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는 막후에서 반대파를 설득하여, 조약체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호칭 문제가 아니라며, 실질적으로 조선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을 찾아야 함을 역설했다. 1875년(고종13),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고, 그 뒤 그는 "척사파"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⑤ 동도서기론 (東道西器論)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서양의 우수한 군사ㆍ과학기술을 수용함으로써,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 식의 개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도 같은 입장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상 그는 "청나라의 동도서기론"을 주장했다. 어디까지나 "양무운동" 모델을 따른 것이다.

그는 "서양법(西洋法)"에 대한 동양 학문과 도덕성의 우월함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북학파 사상"의 연장선 상에서의 "개국 통상론"이었다. 스승인 "박규수의 사상"을 그의 제자들이 각자, 시대적 상황에 맞게 실천한 것뿐이었다. 서양의 물질문명은 역시 우수하나, "아편 전쟁ㆍ포함 외교" 등을 미뤄봤을 때, "분명 서양의 것을 답습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동양의 정신을 지키면, 서양 역시 배울 점이 있고, 개선될 점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였다.

⑥ 사대부와 백성

그는 "백성이 있은 뒤에야, 사대부가 있다"고 했으며, "사대부가 백성의 윗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 직분"이라 가르쳤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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