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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 박제가 (정조ㆍ1750~1805)ㆍ박지원의 제자ㆍ박규수의 스승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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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朴齊家ㆍ1750~1805ㆍ55세)"는 서자 출신ㆍ북학파의 거두로, 박지원의 제자ㆍ박규수의 스승이다. "북학파 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ㆍ중상주의 경제 정책 주장,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었다. 그의 학통은 "김정희"를 거쳐서, "흥선대원군"으로 이어진다. 사후 "북학파"는 "박규수ㆍ오경석ㆍ유대치" 등으로 이어지며, "중상주의ㆍ통상론"을 계속 건의하였고, 이는 "김옥균ㆍ서재필ㆍ윤치호" 등의 "노론 출신 개화파"로 이어지게 된다.

 

1.  박제가 (朴齊家1750~1805향년 55)

정치가외교관통역관실학자ㆍ4차례에 걸친, "청나라 사행(使行)"을 통해 100명이 넘는 "중국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 안목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한때 "추사 김정희"는 그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정희"의 어머니가 "은신군 부인"과 자매인 인연으로, "흥선대원군""김정희"의 문하에 들며, "그림"을 배웠다"김정희"의 부인은 "김정희"와 교류하던 "홍대용"의 사촌 "홍담용의 딸"이다.

출 생 : 한성         : 초정(楚亭)정유(貞否, 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 덕수 이씨 (이관상(이순신 5대손)2째 서녀)          부 모 : 부- 박평(朴玶, 승정원 우부승지)/ - 전주 이씨(서녀ㆍ첩)

자 녀 : 3- 박장엄(순조 때, "벽파"가 몰락하면서, "검서관"에 등용)          가 족 : 3- 박장엄(순조 때, "벽파"가 몰락하면서, "검서관"에 등용)          스 승 : 박지원이관상          경 력 : 1794(정조27)-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 급제

저 서 : 북학의(北學議)정유집(貞否集)정유각집명농초고(明農草稿)정유시고(貞否詩稿)ㆍ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백동수이덕무와 공저)   / 그 림 : 목우도(牧牛圖)의암 관수도(倚巖 觀水圖)어락도(魚樂圖)야치도(野稚圖)

제 자 : 박규수오경석유대치김옥균서재필윤치호 (박지원박제가김정희박규수)         학 풍 : 추사 김정희ㆍ흥선대원군  친 구 : 정약용ㆍ홍대용

박제가

1778, "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779.03,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후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사신의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1794(정조27)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 "오위장양평현감영평현령부여현감" 등을 역임하였다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밀무역에 대한 제재를 줄이며, 화폐를 유통할 것, 서양인들을 조선으로 초빙하여, 화포 제작성곽 축조선박 건조양잠 등의 신기술을 적극 도입, 유치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맹목적인 근검절약은 병폐이며,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이라는 현실을 인정한 기반을 쌓고,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를 일으킬 것을 역설하였다그러나 상업무역을 천시 여기던 당대의 사대부들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정조윤행임" 등의 배려로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여러 번 다녀왔다.

"정조""서얼 중용정책"에 의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조" 사후 1801(순조 1) 그와 친분이 있던 "윤행임""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고, 몰락하면서 유배되었다원래 당색은 "소북(小北)"이었으나, "노론 북학파"로 전향하였다.

2. 평가비판

그는 어릴 때부터, "통찰력판단력방대한 학식예술적 재능"을 타고 났다기억력이 좋고, 암기에 능했으며, 어릴 적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3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면 그 옆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었고, 그는 "서자"였다.

"서자"라는 천대를 받았음에도, 글재주를 알아본 "아버지 박평""그가 서자임"을 상당히 애석해했다 한다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차별"과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주류 사회에서 따돌림무시를 당했다그는 "서자"라는 이유로 멸시 당했고, 그가 속했던 "북학파""노론" 내에서도 비주류로 취급당했다허울만 가득한 조선의 양반학자선비지식인 등 편협하고 답답한 집단을 비웃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벽을 부수지는 못했다.

"학문"이 실제 "생활국방" 등 국가경영에 도움을 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 발달한 외국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북학파 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로 꼽힌다변화의 싹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며, 치열하게 살다간 "선구자"라는 시각도 있으며, "명분에 매이지 않고, 욕망에 솔직했던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박제가는 죽고 죽이는 당쟁이 지배했던 정계 진출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나라를 고민하고 꿈꿨다. 비록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선각자다."는 평도 있다"청나라" 문인 "이조원(李調元)""박제가 문집"에 쓴 서문을 통해 그의 인물 됨됨이를 평했다"그 사람은 왜소하지만 굳세고, 날카로우며, 재치 있는 생각이 풍부하다. 그의 문장에는 찬란하기가 별빛 같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고, 용궁의 물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화폐 유통론국가의 무역장려론""상거래"를 천시 여기든 "조선 성리학자"들에 의해 불순한 사상 내지는 이문을 남기기 위한 협잡 정도로 취급되었다또한 집안이 원래 "소북"이었다가, "박제가"의 대에 "노론"으로 전향한 것을 두고도 문제가 되었다심한 천대멸시냉대에 실망했고, 그는 뜻을 펴볼 기회를 잃었다"정조"에 의해 발탁되었으나,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가로 막혔고, "정조"의 죽음 이후에는 "유배 생활"로 생을 마감했다.

3. 저술작품 활동

"그림글씨"에도 두루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며, "청나라""사고전서(四庫全書)"계열 학자들과 만난 이후, 편지서신 등을 통한 꾸준한 교류를 통해, "조선""대련형식(對聯形式)"을 수용하고 이를 조선에 소개하였다"글씨"는 조선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으며,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재주를 "청나라"의 문인들로부터도 인정받아, 생전인 1801년을 전후해서, 그의 시문집인 "정유고략(藁略)""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으며, "해서행서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했다"추사 김정희" 역시 그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서풍추사체"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구양순(歐陽詢)동기창(董其昌) ""행서"도 잘 썼으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강건하였다그림에도 능하여, "서실"을 짓고, 학문 외에 화가 제자들도 다수 배출하였다사실적인 묘사를 한 문인화풍의 산수인물화를 그렸고, 중국의 산수화 보다는 조선 국내의 풍광과 경치를 그렸으며, 생동감이 넘치는 "고기노루" 등을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4. 사상신념

당시의 공리공담을 일삼던 "주자학적 사상과 풍수도참설" 등에 비판적이었다. 또한 "존명(尊明) 사대주의자"들이 제기한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한편, "청나라"에 전래된 서양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고,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는 한편 "봉건적 신분제"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는데,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차라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단단한 습속의 벽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고,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

① 문체반정

틀에 박히고, 고루하고, 진부한 "시ㆍ문장"을 혐오하며, 나만의 글쓰기를 찾아 나섰다. 당시 선비들은 "두보의 시"를 최고로 여겨 배웠고, 다음은 "당나라 시", 그 다음은 "송나라ㆍ금나라ㆍ원나라ㆍ명나라" 시를 배웠다. 박제가가 보기에, 전범에 매달리는 글쓰기는 남이 한 말의 찌꺼기나 줍는 행태에 불과했다. 자기 시대의 현장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요, "문장"이었다. 역설적으로 나만의 글쓰기를 개척하는 것이 진정 고인의 글쓰기에 다가가는 길이었다.

"형암 선생 시집서(炯菴先生 詩集序)"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다."며, 그는 현실에서 보고 듣고 관찰한 것이 좋은 글,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된다고 보았다.

한편, "형식에서 지나치게 벗어났다"는 "노론계" 다른 학파의 비난이 빗발치자, "정조"는 그의 스승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인사들에게 "문체반정"을 하라고 선언하고, 바른 글을 써 내라고 지시한다.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 비옥희음송인(比屋希音頌引)>

스승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동료 문인들은 모두 "반성문"을 지어 올렸다. 결국 "박제가"는 "자송문(自訟文)"이라는 "반성문"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그러나 "당대의 문장을 순정한 문체로 되돌리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에 부응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면서도, "자송문(自訟文)"이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반성은 하지 않고, 항변하였다.

② 인재 등용론

그는 "과거 제도 무용론"을 주장하였다. "과거 제도"가 학문적 소양이 되는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점차 사대부ㆍ고관ㆍ벌열가문이 돈ㆍ재력으로 관직을 세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사회적 생산ㆍ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양반ㆍ문벌ㆍ과거제도의 폐단인 문벌에 의한 관직의 세습에 반대하고, 실제의 쓰임에 맞게, 인재를 등용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조광조의 현량과"를 훌륭한 대안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비천한 집안의 재능 있는 자제를 추천하는 제도 등을 실시하자고 하였다. 그가 반대한 것은 "과거제도" 자체가 아니고, "과거"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관직의 세습"이었다.

③ 상업 진흥론

그는 "국부(國富)"를 창출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공업ㆍ농업" 진흥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장사"를 천하게 여기지만, 실질적으로 돈ㆍ국력ㆍ각종 문물교역을 이루는 방법은 "상거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청나라"에 전래된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상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상업진흥론"을 적극 주장했고, "교역 활성화"를 통해, 외부의 문물이 유입될 길을 열자고 하였다.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그는 "교통기관"을 발달시킬 것(用車論)ㆍ"화폐"의 질을 개선하여 악화주조(惡貨鑄造)를 금지하고 "화폐"의 질을 높일 것ㆍ"밀무역(密貿易)"을 양성화하고 무역을 장려할 것ㆍ국내시장을 확보할 것 등을 제시했다. 동시에 만일의 사변을 대비하여, 금ㆍ은을 정부에서 축적할 것을 건의하여, 미연의 사태를 대비할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상업의 유통으로 농산물 판매가 원활해지고, 수공업의 발달로 낙후된 농기구를 개량한다면 농업의 합리적 경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조선" 국내에서 생산되는 금ㆍ은의 해외유출과 중국 상품의 유입을 철저히 금지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금ㆍ은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던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상업 진흥책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천시하고, 위험시하던 "사대부"들과는 반대되는 견해였으며, "상공업 육성"에 장애가 되는 양반들을 도태시키기 위해, 봉건적인 문물제도ㆍ과거제도를 타파할 것도 주장했다.

④ 폐쇄성ㆍ배타성 비판

"조선사회"가 상당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회"라고 지적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리지어 비웃고, 또 덩달아 이를 업신여긴다. 좁은 소견으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엿보고, 틀에 박힌 안목으로 끝없는 변화를 논하곤 한다."며, 한탄했다. "폐쇄성ㆍ배타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외부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중국"의 중화 문명만큼 혹은 그보다 더 우수한 문명이 서방에 존재하고 있다고 알렸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⑤ 허례허식 비판

저서 "북학의"에 대부분의 백성은 아침저녁 먹을거리가 없이, 생계를 꾸려가는데,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그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향기 나는 사회"이다. 재화의 유통이 활발하고, 사치가 가능하며, 문화적 수준도 상당한 사회. 그는 "문화예술과 사치품"에 관해 논할 때, 도덕주의적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는 "돈에는 도덕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부도덕한 사람이라 해서 돈을 벌지 못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을 "도덕"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위선으로 규정했다.

그는 "도덕ㆍ인의예지ㆍ인륜"의 명분으로, 조정에서 "춘화ㆍ야담"을 단속하는 것도 잘못이라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의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은 "재화와 물품을 마르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한 향락을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쓰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며, 모든 백성이 선비처럼 고결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며, 소인은 소인답게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박하고 질박한 생활을 표상했던 "유학적 가치"와 완전히 결별한다. 당시 "위선적인 농본정책"에 따른 극빈의 삶으로 온 나라가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인의(仁義)가 강물처럼 흐르는 요순의 시대"를 재현한다며, 허장성세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⑥ 북벌론 비판ㆍ북학론

"북벌론"이 당시 "조선"의 국력ㆍ경제적ㆍ군사적 현실을 외면한 "공리공담"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이 북벌(北伐) 대상으로 지목한 청나라가 오랑캐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서양과학으로 무장한 문명국"임을 직시했다.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그의 주장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 조선 지식인들의 낡은 생각을 뒤흔든 혁명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북벌론"에 대한 비판은 "노론"은 물론 "남인 강경파"에게도 반감을 초래하는 이유가 되었다.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그는 "청나라가 단순한 오랑캐가 아니다"고 확신했다. "조선"의 빈곤 타파와 갑갑한 습속의 개혁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만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이 때문에 "연행"을 다녀온 직후, "북학의"를 저술한다.

⑦ 중국어 사용론

"조선"이 빠르게 "청나라"에 맞서는 문명국이 되려면, "언문"이 일치되는 "중국어(북경어)"를 사용하자고 하였다. "중국 문명"을 그리워하는 "사대부"들이 "중국어"를 "제2의 국어"로 쓰지 못할 것은 없다고 봤다. 그러나 문명세계를 향한 그의 욕망은 "중국어 공용론"으로 거리낌 없이 내달린다. 이런 정황상 "북벌론"을 절대이념으로 수호했던 당대 "선비"들이 이 "열혈 북학자"를 "당괴(唐魁)" 혹은 "당벽(唐癖)"이라 비방하게 된다.

⑧ 서양기술 도입론

"조선"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과의 "통상ㆍ신기술 도입"을 주장했다. 서양의 신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역ㆍ상권 형성"으로 자연스럽게, 서양인들이 유입되게 하자고 하였다. 그는 1786.01.22.일, "조정의 조회(朝會)"에 참석해서, "통상ㆍ신기술 도입"을 건의한다.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일본ㆍ유구ㆍ안남ㆍ서양 등이 모두 중국의 복건ㆍ절강ㆍ교주(交州)ㆍ광주(廣州)에서 교역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나라처럼 뱃길을 이용해 통상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국가 경제ㆍ재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물자유통ㆍ물가 평준화"를 기하기 위해, "수레"를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박"의 이용을 늘릴 것을 주장하였으며, 병기의 개선ㆍ영농법의 개량ㆍ선진기술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특히 서양인을 초빙해 천문 관측ㆍ농잠(農蠶)ㆍ의약ㆍ궁궐, 성곽, 다리를 짓는 법ㆍ구리, 옥을 채굴하고 유리를 구워내는 법ㆍ화포를 설치하는 법ㆍ수레를 통행시키고, 배를 건조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이유로 "나라에(학문을 공부한답시고) 놀고먹는 자가 갈수록 불어나는 것은 사족(士族)들이 날로 번성하기 때문"이라면서, "물길과 뭍길을 이용해 장사하고, 교역하는 모든 일에 사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양인"을 귀신ㆍ괴물로 여기던 당시의 집권층은 그가 요망한 것에 혹하여 사술을 꾸민다며, 반발한다.  그밖에 "종두법"의 연구에도 관심을 쏟았다.

⑨ 농정 개혁론

그는 "이익ㆍ유형원"의 "중농주의"는 비판ㆍ반대하였으나, "농업 계획론"을 주장했다. 국가의 부력ㆍ전 경제기구 내에서 "농업경제"의 위치를 규정할 것과, 경제기구 전반의 원활한 운영을 하는 것이 농업경제의 안정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기구의 개량화ㆍ국가적인 농업ㆍ농지개량 정책으로 농업 경영의 합리적인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면 국가재정이나 경제 질서 전반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에 따라, 다른 산업의 유통이 활발해져야, 농기구ㆍ농업시설의 개량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봤다. "농업 진흥론"은 농업문제 해결을 다른 산업분야와 연결시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즉,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업"이나 "수공업"도 아울러 개선해야 함을 역설했다. "농법 개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합리적인 경작ㆍ농경을 위해, "전무(田畝)제도"를 개선하고, "시비(施肥)"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취분법(取糞法)"을 개량하며,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해, 농기구를 개량해야 된다고 하였다. 또한 농기구를 저렴하고 쉽게 바꿀 수 있어야 함도 강조했다. 시장의 활성화 역시, "농기구 개량"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시장의 활성화로 농산물 판매가 원활해지는 것ㆍ상거래를 통해 최신 농기구 등의 유입ㆍ수공업의 발달 등으로 낙후된 조선의 농기구를 개량한다면 농업의 활성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대부"에게도 노동ㆍ농업을 하게 하도록 하고, 유통경제부문인 "상업 활동"에도 종사하게 함으로써 일하지 않는 인력을 줄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대부"의 노동ㆍ농업 참여는 "토지소유" 관계의 측면에서보다는, 당시 토지를 점유하던 지주들이 "사대부"였으므로 사대부를 농업에 참여케 하는 것은 "농업"을 합리적으로 경영함으로써,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의 기치를 내건 "조선"에서 "유생에게 농사를 하게 하자"는 그의 주장에는 반발은 없었지만, "사대부"들은 내심 반발하고 그를 꺼렸다. 그러나 "토지"를 조정에서 매수ㆍ몰수해야 된다는 견해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사대부들의 농지과다점유를 함부로 탓할 것이 아니라, 경영ㆍ기술의 개선ㆍ합리화, 집약화를 통해 수익을 늘리는 것, 소규모의 농지에서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급선무라 하였다. 그는 이를 시험하고자, "둔전(屯田)의 설치"를 "정조"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했다.

⑩ 청렴 무용론

그는 조선의 선비들이 가난한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청렴성을 강조하는 것은 "위선"이라 하였다. 박제가는 "가난"을 싫어했고, 그에게 "안빈낙도"는 자신을 속이는 말이었다. 그는 "가난함"은 도덕적으로 고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권력에 아부하기 싫어, 차라리 가난하게 산 것이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렴과 청빈함"을 강조하는 것은 허위의식이라고 설파하고 다녔다.

젊은 시절, "장인 이관상"이 검소하게 살라고 하자, 그는 이를 반박하였다. "침향목과 단목으로 저를 조각하고, 색실로 저를 수놓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길이 후세에 전해 사람마다 보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쿠리 밥에 표주박 물을 마시며, 해진 솜옷을 입고 살면서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지내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습니까?"

그는 "유항산 유항심 무항산 무항심"이라 하여,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설"을 비판하여,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 기풍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풍수가 아니라 사회 환경이라고 하였다. 놀기만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양반사대부"의 나쁜 기풍은 바르지 못한 환경 때문에, 조성된 것이라 하였다. "(같은 벌레라고 하더라도) 꽃에서 자란 벌레는 그 날개나 더듬이조차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가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여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덕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는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소비를 샘물에 비유하여, 절약보다는 적당한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무조건적 "절약"보다는 화폐를 사용하고, 상행위를 해야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것이었다.

⑪ 국수주의 비판

그는 늘 "언제까지 우리 것만 좋다고 주장할 것인가?"라며, 맹목적인 애국심ㆍ자부심ㆍ국수주의에 비판을 가하였다. 너무나 당연시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문화ㆍ우리 것에 대한 습관적인 태도ㆍ맹목적 자부심에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형식적인 북벌론"을 말하면서도, "북벌"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했고, "청나라"가 과거에는 "오랑캐였지만,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중국 문화에 흡수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조선"의 현실이 맹목적으로 애국할 환경인가에 늘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회 상류층도 끼니를 건너뛰기 일쑤고, 선비들은 종이가 없어 책을 쓰지 못하며, 소 한 마리 갖지 못한 농부가 태반인 나라 형편에도 조선은 비효율적인 농본정책과 극단적인 국수주의를 선택했다."고 지적했으며, "소비와 욕망"을 없앤 비극적인 사회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은 커녕 주변사람들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를 "역심을 품은 인물"로 취급하고, 터부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⑫ 인습에 대한 저항

그는 패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당대의 사람들이 지당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인습에 저항했다. 조선의 사회를 "위선과 가식이 넘치는 사회"라고 지적했다.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눈꺼풀로 눈을 막고,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고 했다. 늘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눈꺼풀"을 떼어내고, 천하를 응시하여, "심지를 열고 이목을 넓히라"고 외쳤다. 그는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린 관습이 "인간의 본연지성"을 무시하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활ㆍ삶ㆍ생각을 틀어막는 장애물이자, 짐"으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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