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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ㆍ악녀 (10인)ㆍ부덕 (6인)

북학파 : 박지원 (정조ㆍ1737~1805)ㆍ열하일기ㆍ박규수 조부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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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朴趾源ㆍ1737~1805ㆍ58세)"은 실학자ㆍ사상가ㆍ소설가ㆍ북학파 영수ㆍ열하일기 저술(문체반정)ㆍ한문소설ㆍ물레방아를 설치했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고, 고의적으로 낙방했으며, 이후 계속해서 "과거"를 피했으며, 학문 연구ㆍ저술에 전념하였으며, 제자로는 "박제가ㆍ유득공ㆍ이덕무" 등이 있다. 실제로 "박지원"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안의현감ㆍ면천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긴 했지만, 끝내 "조정의 요직"에는 오르지 않았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1. 박지원 (朴趾源1737~1805향년 58)

1777(정조1), "정조" 측근인 "홍국영"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 "홍국영"에게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1978 "황해도 김천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고, 이 골짜기 이름에서 "연암"이란 호를 따 온 것이다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농사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출 생 : 조선 한양 서부(西部) 반송반(盤松坊) (야동(冶洞))     사 망 : 조선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ㆍ묘소는 "조선일제 강점기" 때 버려졌다가, 1959년 북조선 "황해북도 개풍군 전재리 황토고개"에서 봉분이 퇴락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 뒤 1990년대에 이르러, 북조선에서는 "황진이박지원" 등 명사들의 묘소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그의 묘소 역시 "봉분"을 쌓고, 비석석물 등을 정비하였다 묘소 남동쪽에는 "개성공단"이 있고, 서남쪽에는 "선죽교""정몽주"의 옛 집이 있다.

: 연암(燕巖)연상(煙湘)열상외사(洌上外史)       사 인 : 병사 (유언-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       가 족 : 아들- 박종채       손자- 박규수(군인외교관개화사상가철학자화가지도 제작자종묘배향공신 후일 "우의정"을 지냈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개화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친 구 : 박제가홍대용     제 자 : 박제가(박지원박제가김정희박규수)       스 승 (장인처삼촌)       1752(영조28),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처사 이보천(李輔天))"에게는 "맹자"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처삼촌(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비롯하여, 역사서시 짓는 법글과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고전을 습작하였다 수려한 글재주를 본 "이양천"은 그가 문장가가 되리라고 예견하였다 처남인 "이재성"과는 평생의 친구로 지냈고, 동시에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또한 8촌 형 "박명원(영조 부마,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옴)"의 영향을 받아, 외부의 문물에도 관심을 두었다 "박명원"은 자신 외에도 "청나라"를 견문하고 온 사실들에게서 접한 새로운 사실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그는 문하생에도 "양반중인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영수가 되었다"북학파의 영수" "홍대용박제가"와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배우고, 신기술을 유치해야 하며 장사는 천한 것이 아니라는 "중상주의" 주장하였고, "이용후생"의 과학을 강조하였다제자이며, 친구인 "박제가" "윤가기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순조" 즉위 후,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노론 북학파 사상" 역시 이단시되어. 정계에 발탁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추방당했다.

자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문체반정),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고, 10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였다그는 작품에서 아무 실속 없이 "양반"이라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허세부리는 자들을 조롱하고, 힘써 일하지 않는 게으른 풍조가 "양반중인평민"에게까지 확산되는 것을 지적했다또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자신의 작품에 실음으로서, 논란거리가 되고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정조" 즉위 후, 여러 번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 (정조10) 50세 때, ""로 처음 출사하여, 조정 시무책을 건의하였다1786, "음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1791년 한성부판관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 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안설(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사후에도 그의 문집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융희4)에 가서야 간행되었다1900,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 "김만식"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처음 초록 형태로 간행될 정도로 늦었으며, 1911, "최남선"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간행하였다.

2. 저 서

"박지원"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 그의 문집은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도 간행되지 못했다.  1826, 아들 "박종채"가 그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을 완성했으나, 문집을 편찬하려 했다가, 내용을 보고 놀라, "박지원"의 저서들을 간행하지 못했다 손자 "박규수""고종" "의정부 우의정"에 올랐지만, "박지원"의 문집을 간행하려다가 편찬을 그만두었다.

열하일기 (熱河日記)연암선생 서간첩과농소초 (課農小抄)과정록 (過庭錄)연암집한민명전의 (限民名田義)ㆍ열하일기 (熱河日記) : 1780(정조4), "박지원"이 청나라 황제 "건륭제"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를 갔다가 보고 듣고 물은 것을 꼼꼼히 기록한 여행기열하 (중국 허베이 성청더(承德市)에 있는 별궁으로, 여름에 황제가 집무를 보는 곳으로 피서별궁열하행궁으로 불림)

허생전 (許生傳) : 양반 사대부의 무능 비판새로운 삶의 각성실천 촉구 열하일기

양반전 (兩班傳) :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무능력한 양반 풍자

열녀함양박씨전 (烈女咸陽朴氏傳): 인간 본능을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억제시키는 것의 부당성 강조

호질 (虎叱) : 위학자와 열녀의 불륜 관계 고발

마장전(馬駔傳) : 양반의 위선적 우도 비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신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진실성 강조

민옹전(閔翁傳) : 인재 등용의 모순 풍자

광문자전(廣文者傳): 걸인의 순수한 삶을 통한 진실성 강조

김신선전(金神仙傳): 현신 도피적소극적 생활 태도

우상전(虞裳傳) : 신분이 낮아 재능을 인정받지 못함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덕망을 가장한 학자의 비리풍자

봉산학자전 : 위학위덕을 가장한 유학자의 풍자

3. 홍대용박제가와의 만남

1756년 무렵, "김이소황승원홍문영이희천한문홍"들과 "북한산봉원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 그로부터 "허생변승업" 등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이는 후일 "허생전"의 소재가 된다.

1761년 봄, "단릉처사 이윤영"을 찾아가 "주역"을 배웠고, 이 해에 "홍대용(洪大容)"을 만났다"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 "홍대용이덕무정철조" 등과 "북학""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1768, "원각사"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유금" 등과 이웃하면서 그들과 교류하며,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고, 후일 "박제가유득공" 등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4. "열하일기" 저술청나라(건륭제) 방문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사상"을 소개하였다그의 "실학사상""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고, 또한 "북벌론"을 말하면서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음을 꾸준히 지적하였다.

1780(정조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 따라, "북경" 갔는데, 1780.06.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베이징열하"를 여행하고, 4개월간 돌아본 후, 1780.10.27일 귀국하였다이때 "건륭제""열하(熱河)"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지 갔고,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베이징열하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현지 주민의 생활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청나라"에 있을 때, "물레방아"를 관찰, 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귀국할 때 가져왔다그는 "물레방아""수차(水車)"라 했고, 여러 개의 "모사본"을 그렸다가, 11년 뒤 "안의현감"이 되어 "함양" 땅에 "물레방아"를 설치한다.

1792"안의 현감" 부임 직후, "정조"가 문체를 타락시킨 잘못(문체반정)"속죄하라고 하교하였다"정조""하일기"를 지목하고는 "공철" 보내, "순정문(醇正文)"으로 지을 것을 명하였으나, 직접 응하지 않고,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는데, "정조"가 그 답서를 보고 문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박지원""답남직각공철서(答南直閣公轍書)"라고 썼는데, 이는 "왕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글로써 만든 과거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5. 외 모

"박종채(아들)""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박지원"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또한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바깥의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원래 "박지원" 자신의 중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1점 있었지만, 박지원은 그 초상화가 본래 자신의 모습의 7할도 못 미친다며 없애버리게 했고, 다시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박지원"은 다른 사람과 쉽게 타협을 할 줄 몰랐던 성격이었다"김기순"은 그에 대해 "연암은 순수한 양기를 타고 나서, 반 푼의 음기도 섞여있지 않으니, 지나치게 고상해서 매양 부드럽게 억누르는 공력이 모자라고, 지나치게 강해서 항상 원만한 면이 부족했다" 평가하고 있으며, 박지원 자신도 "일생 동안 이런 저런 험한 꼴 다 겪은 것은 모두 내 성격 탓이다",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라서 바로잡으려고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다."라고 인정하고 있기까지 하다.

"파격의 글쓰기"로 소위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당사자였던 그는 "승려들"과도 어울렸다"박지원""경윤"이라는 스님의 대화중에 스님은 몇 대에 걸쳐, 다듬은 "승안사 미륵불"을 완성하자마자 다시없었던 일로 한다고 했다만들다 보니 천상 "영감"을 닮은 천하태평 인간의 모양새더라는 것"부처""부처" 답기를 바라는 대중이, 그 인간 모양의 "미륵불"을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그는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도 좋아했는데, 눈 내리고 찬바람 부는 가을겨울에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식도락 모임인 "난로회"를 만들기도 했으며, 제자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먹이기도 했으며, 고령에도 직접 ""을 담그기도 하였다.

1741(4세 때),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조부 박필균"의 임지에 따라갔다가 되돌아왔는데, 번 본 "감영의 모양칸수"를 모두 말하여, "신동"이라 칭찬을 들었다그는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암기에 능하였다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수호전중국 고전일본 서적" 등을 새벽까지 보거나, 밤새워 탐독하느라 "새치"가 돋아나고, 수염이 "은백색"이 되었다고 한다.

1754(영조30),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우울증불면증"이 나타나, 고생하였다처음에는 동정적으로 보던 이들은 나중에 그를 "미쳤다"고 하며, 꺼리거나 피하였다그러나 "박지원"은 스스로 극복하려 했고,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울증을 고쳐 보고자 했지만 실패한다이때 만난 말동무 "민유신"은 그의 오랜 지기가 되었는데, 자신의 소설 "민옹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해, "거지 광문"의 입을 빌려, 사회를 풍자한 단편소설 "광문자전"을 썼다.

6. 과거 낙방단념방랑 생활

1760, "박필균"이 죽자, 가세는 점점 어려워졌고, 집안에서는 그가 "과거"에 나가기를 원하였다그 뒤 과거 시험에 전념하였다1765, 집안의 염원을 받아들여, 1770(영조46, 23세 때), "과거 1차 시험"에서는 "장원", 그러나 "2차 시험"에서는 "백지"를 제출하였는데, "성균관""사마 시험"을 치러 가서는, 답안지에 "" 대신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놓고 나와서, 시중의 비웃음을 샀다.

그해 가을, 친구 "김이중"이 나귀를 팔아 마련해준 돈으로 "유언호신광온" 등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 유람하고 돌아왔다"삼일포사선정"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총석정 해돋이(叢石亭觀日出)"를 썼다이 글은 후일 "열하일기"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홍상한(병조판서)"가 이 작품을 격찬했다고 한다되돌아와서 "김 신선전"을 지었다.

이듬해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했고, 여러 번 과거에서 낙방한 이후, 과거 시험을 단념하였다"당색"으로는 "노론 명가"였지만, "사회 부조리폐단"을 계속 지적한 탓에, 그의 답안지는 채택되지 않았다그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저술후학 양성청나라에 존재한다는 신문물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에도 능하였으며, "그림" 재주도 뛰어나, 동네 청년들을 모아 놓고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7. "유한준" 가문과의 인연 : 박규수ㆍ유길준

"박지원유한준"은 본래 문우이자, 친구였다가, 원수로 변하였다"기계 유씨 가문"이자, "박지원"과 같은 "노론"계에 속하였던 "유한준""박지원"의 가문과 사돈 관계이기도 하였다젊어서 친분을 쌓았으나, "박지원 선친 묘소 문제"로 다투게 되었고, 문학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박지원""유한준의 문장"을 비판한 후, 원수지간이 되었다.

 유한준 (兪漢雋ㆍ1732~1811ㆍ향년 79세)

조선 후기의 문장가서화가 : 저암(著菴)창애(蒼厓)ㆍ1768(영조4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김포군수" 등을 역임하고, "형조참의"에 이르렀다당대에 뛰어난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저서로 "저암집"이 전해온다그림에 대한 재능도 거론되지만, 그것을 입증할 유작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화우(畫友)들이 많았던 듯,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 "제발문(題跋文)"을 심심하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남유용(南有容조 때 대제학(大提學)"의 제자로, "송시열(宋時烈1607~1689성리학의 대가송자(宋子)라고 존칭 받은 대학자)"을 추모하여, "송자대전 (宋子大全)"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후일 "박종채(박지원 아들)"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심하게 험담하였다"유한준은 아버지가 자신의 글을 평한 편지로 인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중년 이래 비방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사람이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것이었다 당시 경주 김씨가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본디 이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므로, 유한준은 이때를 틈타서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 이 자는 우리 집안 백세(百世)의 원수이다." < 과정록 중에서 >

"박종채(박지원 아들)" "유한준"을 아버지의 원수를 뛰어넘어, 100세 동안 이어질 집안의 원수라고 성토하였다"유한준""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로 집안끼리도 인연이 있고, 연배도 비슷하여,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문학공부를 같이한 문우(文友)이자, 친구로 지냈다그런데 "박지원""유한준"의 글을 여러 번 비평하다가, "유한준"의 문장을 두고,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 혹평했다.

반면 "유한준""박지원"의 저작에 대해,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이라며, 몰아붙였다"박지원"이 할아버지 "박필균"과 아버지 "박사유"의 묘를 이장한 곳이 "유한준" 선산 근처였는데, "유한준""박지원"의 이장을 반대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자신보다 먼저 요절한 15세 된 "손자의 묘""박필균 묘" 위에 매장했고, "쟁송문제"로 발전했다"박종채(박지원 아들)"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했고, "유만주(유한준 아들)" "박지원""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고 비판하였다.

1871, "박규수(홍문관 대제학)""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보고, 그 시의 주인공을 불러들였다시를 지은 이는 16세의 "유길준"이었다"박규수""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아들이며, "유길준""유한준"의 아들 "유회주"4대손이었다"유길준"이 처음으로 "박규수"를 만나러 갈 때, "유진수(유길준 아버지)""우리 집과 서로 원수같이 지내왔는데, 어떻게 그 자를 찾아간다는 말이냐", 완강히 반대했다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유길준"을 만난 "박규수""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옛날처럼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 게 아니겠냐?", 감개무량해하였다.

"박규수"는 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백세의 원수에 대한 생각은 잊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오히려 집안간의 불화를 잊자며, "유길준"의 뛰어난 재주를 거듭 칭찬하였다또한 힘써 공부할 것을 당부하며, 자주 찾아올 것을 권고했다"박규수"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오히려 "박규수"를 스승으로 받들고, 그로부터 학문을 사사받았다.

8. 문학 세계

"!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 버린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중국이 아닌 "조선",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실학사상""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양반전"은 조선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등은 "양반 계층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 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양반전(兩班傳)호질(虎叱)민옹전(閔翁傳)광문자전(廣文者傳)마장전우상전(虞裳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9. 사상신념

① 자연과학

"홍대용"과 함께, 땅이 평평하지 않고, 원형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홍대용"과 함께, "지구설(地球說)ㆍ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해, "주자 성리학"에서의 "지방지정설(地方地靜說)"에 반대했다. 그는 지구가 평평한 평지가 아니라, 거대한 "원형"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땅"은 하나의 먼지와 흙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세계는 "천체"로부터 자연 만물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결합(凝聚結合)"하고, 운동ㆍ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만물이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지구가 둥근 원형"이라는 박지원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② 양반 특권 비판

"박지원"은 일찍이 "양반사대부"가 하는 것 없이 무위도식하는 것과 "북벌론"을 호언장담하면서 폭이 깊고 소매가 긴 옷을 입는 것, 무예연습을 하지 않는 점을 풍자했다. 그러나 "평민들ㆍ하층민"조차, "양반관료ㆍ재력가"에게는 비굴하게 행동하면서, 자신보다 지체가 낮거나 미약한 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평민들ㆍ하층민"에 대한 동정심도 거두게 된다.

그는 "소설 양반전"을 써서, "양반"의 특권ㆍ횡포를 신랄히 풍자했다. 그는 "국력의 쇠퇴ㆍ민중의 극단적인 빈곤의 근본 원인"이 양반통치 계급제도에 있다고 생각, 양반 계급의 실상을 폭로ㆍ비판하기 위해 "양반전"을 쓰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양반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해도 꺼리 낄 것이 없으며, 선비, 글공부라는 핑계 하에 국력에 해를 입히는데도, 죄를 묻지 않는 이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그 백성이 넷이다. 그 중 으뜸은 사(士)로다.  양반이라고도 일컬으며, 이익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밭을 갈지 않고 장사를 하지 않으며, 글과 역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크게는 문과에 합격하고 적어도 진사가 된다.  문과의 홍패는 두 자에 지나지 않지만, 온갖 물건을 얻을 수 있으니, "돈 자루"라고도 할 수 있다. 진사는 40세에 첫 벼슬을 해도 큰 고을의 남항(南行ㆍ음직ㆍ음서제도와 같은 말로. 학식과 덕행이 특출하여 추천되었거나, 가문 덕에 하는 벼슬) 수령으로 가서 잘만 풀리면, 귀가 양산 그늘에 휘어지고, 배는 종놈의 대답 소리에 저절로 불러지고, 방에는 노리개로 기생을 두고, 뜰에는 명학을 기른다."며, 양반의 "무위도식"을 조롱했다.

또한 시골의 선비, 혹은 낙향해서 생활하는 선비들에게도 풍자를 가하였다. "궁한 선비가 시골에 살더라도 꺼리 낄 것이 없다. 이웃 소를 함부로 가져다가,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사람들을 함부로 불러다가 김을 매도,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네코에 재를 붓고, 뜨거운 물을 붓고, 함부로 상투를 꺼들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정쟁에서 초연하거나, 불의를 보고 낙향한 것처럼 행세하던 선비들 역시, 낙향한 시골에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고결함을 가장한 "위선"을 질타하였다.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이는 인간을 바로 보는 데, 장애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 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며, "신분ㆍ붕당ㆍ사상"의 편견을 버리고, 인간으로써 대할 것을 주장했다.

③ 학문에 대한 관점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한다면, 그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결론하였다. 그는 학문에서 귀중히 여길 것은 "실용(實用)"임을 강조했다.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를진대,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승강질 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학문은 "인간의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학문이 진정한 학문"이라 하였다. 그는 학문 공부의 목적을 "유민익국(裕民益國)ㆍ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 하였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국가에 유용할 때에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 없이 배워야하며,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는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인간에게 이롭게 하지 못하는 학문은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 평하였다.

④ 북벌론 비판

"청나라"에서 "괘종시계ㆍ안경ㆍ지구본ㆍ망원경ㆍ톱니바퀴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와 기구를 목격한 이후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기술도 뒤쳐진 "조선의 북벌"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는 "북벌을 한다"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는 "조선 양반 관료들"을 비판하고, "복수설치"의 대의를 위해 아무도 준비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나중에 가서는 "북벌론"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그는 "조선의 양반들이 복수설치와 북벌을 다짐하고도 무를 천시하는 점ㆍ병력을 양성하지 않는 점ㆍ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지 않는 점ㆍ당쟁에 여념이 없고, 음모로서 상대 정파를 죽이고, 학살하는 점ㆍ전쟁이 나서 유사시 피난 가는데, 장애가 되는 넓은 소매에 긴 옷자락을 가진 옷ㆍ불필요하게 격식을 가진 복식"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모두 수용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북벌론"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⑤ 귀신ㆍ신에 대한 반박

"귀신ㆍ신"은 허황된 것이며, 자연은 스스로 움직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천주재설(天主宰說) 역시 미신"이라며 비판하고, 자연은 자연필연성을 가지고, 자기운동을 할 따름이며, 그 어떤 목적의지도 없다고 했다. 또한 "신비적인 참위설(讖緯說)ㆍ오행상생상극설(五行相生相克說)"에 반대했다. 그는 이런저런 재앙을 "귀신"의 진노로 보던 것을 허황되다고 비판했다. 그는 하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과 "인과 응보론"에도 반대했으며, "천인감응설ㆍ인과 응보론" 같은 것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물질적 기(氣)"의 존재를 주장했다. "만물이 발생함에서 무엇이나 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차 있는 것은 기이며, 차는 까닭은 이(理)이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하는 그 가운데 이가 있으며 기로써 이를 싸는 것이 마치 복숭아씨를 품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만물의 근원은 어떤 "기"이고, 이는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기"의 움직임의 변화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 감각의 원천은 "객관적 외부세계"이며, "감각ㆍ촉각ㆍ의식" 등은 어떤 사물이 객관적 외부세계를 느끼는 것ㆍ감각기관에 작용한 결과로 발생한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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