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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 유대치 (고종ㆍ1831~1884)ㆍ유홍기ㆍ한의사ㆍ개화파 영향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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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기(劉鴻基ㆍ유대치(劉大致)ㆍ1831~1884ㆍ53세)"는 "갑신정변"실패 뒤, 12.08일 집을 나갔다가,행방불명되었다. 혹시"갑신정변"의 사후처리로,"중도 개화파"가"급진 개화파"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행할 때, 암살된 것이아닌가하고 추측된다. 한때"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894년(고종31)"갑오개혁"으로"갑신정변"과 관련된 인물들의복권이 이루어진 뒤에도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갑신정변"으로 그의 문인들이 역적으로 몰리면서,그에 대한 자료들도 대부분 인멸ㆍ실전되었다.

 

1. 유홍기 (劉鴻基유대치(劉大致)1831~1884향년 53)

한의사(중인역관 집안)개화 사상가(개화파의 정신적 지주)학자정치인ㆍ흔히 "유대치"로 많이 알려졌으며, "개항 이전", 이미 "개화"에 대한 확고한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초기 개화사상가로, "오경석박규수" 등과 함께,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윤치호" "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스승 역할ㆍ"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고, "김정희"로부터 "금석문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출 생 : 서울      사 망 : 행방불명 (갑신정변 이후)       별 칭 : 백의정승(白衣政丞)산림정승 

: 대치(大致, 大癡)유대치(劉大致)여여(如如)대치장(大致丈, 대치 어르신)

: 강릉 최씨 (역관 최영원의 딸)       자 녀 : 13(유운두 등)       가 족 : - 유익소(劉益昭, 무과), - 김해 김씨 / 조부- 유흥오(가선대부(嘉善大夫)경희궁 오위장 역임), - 유한기(대호군(大護軍))

스 승 :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       친 구 : 오경석(1879 병사)박규수(1877 병사)이동인(행방불명)

유대치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그로부터 "금석문"을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이후 "한의사"였던 그는 친구인 "역관 오경석""청나라"를 오가며 가져다 준 "서학 서적"을 탐독, 신문물 일찍이 접하였고, 개화에 눈을 떴다이웃에 살던 친구이자, "역관 개화사상""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보고 탐독,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인 출신"으로 "오경석""청나라"에서 가져온 여러 서양의 서적을 탐독하고,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김옥균박영효"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1877, "초기 개화파" 형성에 참여했던 "박규수"가 병으로 죽자, "오경석"을 통하여 "박규수"의 영향 아래 있던 "김옥균이동인유길준윤치호박영효박영교홍영식서재필서광범백춘배오세창정병하이종원이정환박제경탁정식"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게 되었다1879, "오경석"이 병으로 죽게 된 뒤로, 혼자서 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당시 정계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었으며, "문호 개방""정치 혁신"을 주장했다.

2. 출신 성분 논란

"출신배경가문"을 두고, "양반 출신중인 출신"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이것은 역사가들이 "유대치""중인"이라 강조하다 보니, 생긴 논란으로, 원래 "태조(太祖)개국공신 이등(二等)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의 후손으로서, 그의 가문에 흐르는 피는 양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역관(46)의관(10)음양과(16)율과(20)"을 배출했다모두 합하면, "잡과 합격자"92명을 배출한 집안으로, "진사 1, 무과 2"이 합격하였다그의 집안에서는 "역관"들이 다수 배출되었고, 그의 집안은 "역관의 집안"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신분상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아버지할아버지""무관"었으므로, 그는 "한의업"에 종사한 양반출신 "유의"였다갑신정변으로 그의 문인들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에 대한 자료들도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3. 성격외모 (풍모)

"김옥균 전"에 의하면, "대치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를 업으로 했고, 깊이 불교를 믿어 도()는 높고, 품성은 청백(淸白)했다학문으로서는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였다변설(辨說)은 유창했고, 신체는 장대하고, 홍안백발이며, 항상 생기에 넘쳐 행동하였다."고 한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고금역사" 지식도 해박하였고,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유대치"의 교제 범위는 넓고, 대단히 신축성이 있었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일찍이 "백의정승"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지며, 그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4. 사망 관련 의혹

1884.12.04.(고종21),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정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유홍기""오세창(독립운동가오경석의 아들)"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피신하였다12.08일 집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혹시 "갑신정변"의 사후처리로, "중도 개화파""급진 개화파"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행할 때, 암살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된다한때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894(고종31)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과 관련된 인물들의 복권이 이루어진 뒤에도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에는 "유대치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하지만 "김의환"이 지은 "조선개화당의 막후지도자 유대치의 활약과 그의 최후"라는 논문에서는"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경기도 용문산에 토굴을 짓고 살면서, 1890년 경 임종할 때까지 좌선(坐禪)으로 일관하며 살았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이순고(고고학 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이름이 후대에 실리는 것이 두려워, 죽은 뒤 8일째 부활하여, 그의 무덤을 파서 자신의 시신을 가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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