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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 이동인 (고종ㆍ1849~1881)ㆍ승려ㆍ유대치 제자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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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 (李東仁ㆍ아사노 도진ㆍ1849~1881.05ㆍ32세)"은 1880.10월, "개화기"에 활동한 인물 가운데, 최초로 "창씨 개명"을 한 사람이었다. 일찍부터 "개화된 승려"였던 "이동인"은 "유대치ㆍ오경석" 등을 통해, "김옥균ㆍ서광범ㆍ윤치호" 등의 청년들을 만나, 새로운 문물을 전달하며, 그들과 교류하였다. 1860년대부터 승려 활동, "범어사(부산)" 승려→ "통도사(양산)" 승려→ "봉원사(서울)" 승려 (본래 "승려"가 아니었으나, 1880년 정식으로 "일본 승려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1. 이동인 (李東仁아사노 도진1849~1881.05향년 32)

조선후기 불교승려(개화승)외교관(일본통)개화 사상가ㆍ"외제 상품(램프석유잡화 등)"을 들여와서 "왕실세도가친지"들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조선인" 의해, 외제상품이 서울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최초였다.

1849, "조선 경남 양산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가계출신성분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부산 범어사"에 승려로 있었으며, "양산 통도사"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그 뒤 1860년대부터 "한성부 봉원사"에서 활동하였다"일본통"으로 알려진 인물로, 처음에는 "유대치(유홍기)"와 교류하다가, 1870년경 "유대치"의 소개로 그의 문하에 출입하던 "김옥균" 등을 만나게 되었다.

출 생 : 경남 양산시  (일찍 승려가 되어, 가계출신 성분유년 시절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음)         사 망 : 행방불명  (1881.05월경,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파견 전, "한성부"에서 암살 추정ㆍ"일본"과의 "군함구매 비밀 교섭""이원회"와 함께 하다가 실패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법 명 : 천호 (淺湖)        가 족 : - 이덕중(李德中), - 김씨(김숭렴의 딸), 조부- 이세위(李世瑋)

이동인

2. 양산 통도사 승려ㆍ의문의 실종?

그는 "양산 통도사 승려"인데, "오쿠무라(일본 혼간사(本願寺) 부산별원의 장"의 접촉으로 개화 문물을 손에 넣은 다음에,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서 "김옥균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과 교류하면서, "김옥균"이 여비로 준 "금덩이 4""쿠무라"에게 내보이면서, "일본 도항"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동인"의 금을 받지 않고, "여비생활비"로 쓰라며, 오히려 추가 여비와 각 지방 별로 무사집단이 난립하는 혼란 상태임을 주지시키고, 조심할 것을 충고했다이리하여 "이동인""오쿠무라""마에다(前田獻吉) 영사"의 주선으로 "교토"로 가서, 그곳 "혼간사(本願寺) 본산"에 머물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1879, "김옥균"의 주선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이후 여러 번 "일본"을 다녀와, 신문물을 시찰하였다1880년 말, "조선 정부 밀사""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귀국하여 서울도착 즉시, 국왕으로부터 "별선군관"에 임명되어, 자유로이 "왕궁"을 출입하게 되었다이후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서, 1881"신사유람단""일본"에 보낼 때에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포" 등의 "무기군함"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과 비밀교섭을 하기도 했다

1881,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재 파견되기 직전,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당하였다한 불교학자는 "그가 오래 생존하였다면, 한국의 개화에 크게 기여하고, 불교 근대화에도 새로운 장이 열렸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임혜봉(승려사학자)"은 그를 "일본의 조선 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한 전형적인 친일 인물"로 평가하였다"왜냐하면 이동인이 개화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일본정부의 침략 밀명을 받고 부산에 처음 상륙한 일본 불교의 접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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