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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ㆍ악녀 (10인)ㆍ부덕 (6인)

개화파 : 김옥균 ② 여성 편력ㆍ청일전쟁 원인 제공ㆍ김좌진9촌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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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金玉均ㆍ1851~1894.03.28ㆍ43세) "은 진보주의자갑신정변 주도자(박규수 제자)로, 김좌진과는 9촌 관계이다. 조선 후기 근대화ㆍ개화(개혁)사상을 주장했던 "급진개화파"의 지도자ㆍ풍운아ㆍ혁명가였다. 일본 이름은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하기 전, "스치 후치츠로(천세환의 선원)"이 지어준 것이다.

 

1. 여성 편력 위장 : 일본 망명 생활시 (1884.12~ 1894.03)

그의 여자관계는 "난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 후처1 : 스기타니 다마(오타마(小玉)- 게이샤(24~ 25세 정도의 미인)ㆍ금전적ㆍ정신적 후견인ㆍ후에 실업가의 부인이 됨.

• 후처2 : 마츠노 나카(松野なかㆍ게이샤)- 딸 1(사다)

• 내 연 : 나미 (망명 직후, 잠시 거주하던 집주인인 야마구치 신타로의 어머니)- 아들 1(미상)

① 내연녀 : 나미 (야마구치의 어머니)

망명 직후, 그는 "간사이 지방"에 머물렀으며, 이때 "야마토"의 "히가시히라노초(東平野町)"에 살고 있는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야마구치"의 어머니인 "나미(내연 관계)"와 관계를 맺어, 다음 해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이후 그는 자중하였지만, "도야마 미치루"의 권고로 다시 여자를 찾았다. 조선에서 자객이 파견되자, "도야마 미치루"는 그에게 "일부러 술과 여색에 탐닉하라"고 권고했다. "조선에서 김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자, 그의 신변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일본 고사(古事)중 오이시우치가 교토에서 기라의 첩자를 방심시킨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국적 행위를 버리고, 주색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가 매일같이 도쿄 유라쿠초의 여관에서 시바우라의 온천장까지 들락거리며 홍등가를 방황했다." < 도야마 미치루의 증언 >

일부러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하였다. 그의 "주색(酒色)방종"은 "홋카이도 유배" 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타루"에서 사귄 기생도 김옥균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물론, 다른 여자의 소생까지 거두어, 김옥균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② 일본인 후처-1 : 스기타니 다마 (게이샤)

"청나라"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1886.07월부터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08~1890.04월까지 "홋카이도(北海道)"에 연금을 당한다. 1890년에 석방되었고, 그 뒤 1894년 "도쿄"로 돌아오자, 그는 "청나라"로 망명을 기획한다.

이 무렵, 2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금전적ㆍ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삿포로"에 살던 그는 지병인 "류머티즘"을 치료하기 위해, 종종 "하코다테의 온천여관"에 들렀는데, 거기서 "스기타니"를 만나, 애인관계로 발전한다.

"스기타니 다마"의 원래 이름은 "오타마(小玉)", 하코다테 도서관이 소장 중인 사진에는 "봉래정예기옥녀(蓬萊町藝妓玉女)"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게이샤"였던 "오타마"는 곧 김옥균의 재정적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고, 바로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미야자키 도텐"의 저서 "33년의 꿈"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 책에 따르면,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가,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후, "도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야자키가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슬피 우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여인의 몸. 선인(先人, 김옥균)의 사상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재일사학자 "금병동(琴秉洞)"은 그의 저서 "김옥균과 일본(2001년 판)"에서 "스기타니는 24~ 25세 정도의 미인이었으며, 두 사람 관계는 당시 "하코다테"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면서, "1890년 김옥균이 홋카이도에서 연금에서 풀려나 도쿄로 돌아올 때, 함께 상경해 도쿄에서 살림집을 꾸리고 살았다"고 소개했다.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상하이"로 건너간 뒤에도 김옥균을 위해 따로 밥상을 차려놓고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불공을 올리다가, 부음을 전해들은 것으로 돼 있다. "스기타니"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후인 1916년 "미야자키 도텐"과 재회했을 당시에는 이미 한 실업가의 부인이 돼 있었다고 한다.

③ 일본인 후처-2 : 마츠노 나카 (게이샤)

이때 김옥균에게는 또 다른 일본인 연인이 있었는데, 역시 다른 술집에서 만난 "게이샤"인 "마츠노 나카(松野なか)"였고, "마츠노 나카"에게서는 딸 1명이 태어났는데, 이름은 "사다(さだ)"였다.

④ 박영효와의 결별

"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 "박영효"는 김옥균에게 "처신을 바로 하라"고 충고했지만, 김옥균은 이를 거절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 "김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 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김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박영효"는 온순하고, 침착한데다가 세상사를 멀리하였으나, "김옥균"은 예민하고, 다재다능한데다가 세상의 교제도 넓었다.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박영효"의 문벌ㆍ신분이 높아, "김옥균"을 능가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져, 자연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김옥균"을 남겨둔 채, "박영효"가 미국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광린"은 "박영효가 김옥균을 두고, 서광범ㆍ서재필 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던 이유도 김옥균과 박영효의 기질 차이"로 이해하였다.

2. 묘비문 : 시문- 박영효글씨- 이준용조각- 유길준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남긴 "머리카락"을 묻은 "무덤(가묘)"를 만들고, "위패" 일본의 한 신사에 안치한 뒤, 제사를 지냈다1900, "도쿄 아오야마 공원" 인 묘지에 세울 "김옥균의 묘비 문" "유길준" "이준용(흥선대원군 적장손)"에게서 받아서, 직접 돌에 새겼다.

외인 묘지에 서 있는 "김옥균 묘비석"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 이것을 돌에 직접 조각한 이는 "유길준"이었다"김옥균의 비문"을 돌에 조각하면서, "유길준"은 통곡하였다.

훗날 "신봉승(작가역사가)"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때 유길준은 조선에서의 또 다른 쿠데타에 연루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오사가하라 섬의 모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김옥균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절해고도에서 김옥균의 비문을 써야 하는 유길준의 심정은 착잡함을 넘어서 아픔이었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3. 김옥균 죽음의 영향

"김옥균의 죽음"은 곧바로 "동북아 정세"의 외교적으로 확대되었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에는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일본 제국"은 곧바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언론매체 등을 통해,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등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청일전쟁"을 향한 "일본 제국"의 국민감정으로 발전시키는데, 이용했다.

① "상하이 암살 사건"은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김옥균 암살 계획"을 미리 감지한 쪽은 "일본 정부"였다. 그러나 암살을 애써 저지하지 않았다. 한때 "김옥균"을 "근대화의 선구자" 운운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한 일본이었지만, "김옥균"이 정변에 실패하고, 자객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찬밥 대하듯 했다. 그런데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자, "일본 정부ㆍ언론"은 일제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암살당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애도하고, 의연금을 모으고, "사체 수습 문제"를 협의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다.

"상하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청나라"에게는 불행이었다. "일본"은 "김옥균"은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일본 여관"에서 사건이 일어난 만큼, 사건 관할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암살을 방치한 "청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청국"은 "홍종우"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조선 정부"의 요구대로, "홍종우ㆍ김옥균 시신"을 "조선"에 넘겼다. "조선과 청국"은 "일본"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만국공법"과 같은 허울 좋은 "세계 공존론"을 맹신한 나머지 "제국주의"가 침투하리라는 예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김옥균 암살 사건"은 "조선 침략", 나아가 "대륙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에게 대단한 호재였다. 장기적으로는 "조선 합병", 당장에는 "청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기막힌 명분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일본ㆍ청국"은 정면으로 부딪친다.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 만국공법 (1864): 중국 총리아문이 유럽의 법체계와 관행을 연구하기 위해 참고하던 책으로, "휘튼 (H.Wheaton)"의 국제법 저서를 선교사 "마틴 (W.Martin)"으로 하여금 번역시켜 한문본으로 출간

② 일본의 규탄

"김옥균"이 처음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부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냉대했었다. 그를 국외로 추방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이번에는 "김옥균"을 가형한 "조선 정부"를 비방하고 나섰다. "김옥균의 부관참시"는 외국인 기자들ㆍ일본인ㆍ미국인ㆍ프랑스인 등에 의해 외국으로 보도되었다.

"조선 정부"의 "부관참시" 조치에 "일본 지식인층"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 조선에 호의적이었던 "일본 자유주의자"들의 분노는 증폭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ㆍ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조선인들의 야만성ㆍ폭력성을 규탄하였다. "조선인들은 반문명적인 야만인들이며 이와 같은 조선인들의 비인도적인 테러 행위, 생명 경시 현상을 방치해야 되는가"하는 주장이 일본의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도회ㆍ김옥균 기념회ㆍ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일본 측의 기록에 의하면, 1894.04.21일에는 "간다니시키정(神田錦町)의 금휘관(錦輝館)"에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가 열렸고, 여기서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대대적으로 성토하였다. 1894.04.23일에는 일본 정계의 유력자 100여 명이 모여서, "대외경파간친회"라는 모임이 "이사쿠사(淺草)"에 있는 "본원사(本願寺)"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성황이었다고 한다.

4. 망명 생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였다. "야마테초"에서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통해, 그는 "일본 고위층 우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중 1명인 "도야마 미치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암살하는데, 참여한 낭인 조직의 하나인 "겐요사(玄洋社)"를 조직하기도 했다.

조선에는 "김옥균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민씨 정권"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다. "청나라"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1886.07월부터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08~1890.04월까지 "홋카이도(北海道)"에 연금을 당한다. 1890년에 석방되었고, 그 뒤 1894년 "도쿄"로 돌아오자, 그는 "청나라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 한다.

① "이노우에(일본 외무대신)"의 배신

1884.10.27일,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이노우에(일본 외무대신)"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불우한 처지의 망명객으로,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이노우에"는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배신에 분노한 그는 "갑신정변"의 경위ㆍ일본 측의 관여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나섰으나 "일본" 측에서는 "조선에 송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1885.04월, "일본"은 "청나라"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고, 조선에 주둔중인 군사를 공동으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후, "조선 문제"에서 당분간 손을 떼었다. 불우한 정치망명객인 "김옥균 일행"을 "일본"은 부담스러워했고, 그는 울분ㆍ울화를 겨우 다스리고 거처에 은신하며, 자신의 개혁운동을 회고하는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쓰면서, 연명하였다.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야마테초, 이 지역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공원"이라 이름 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 개항 이래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도 외국인 묘지가 남아 있다.

②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의 거사 탄로ㆍ일본 추방 모면

1885년 말, 그의 처소를 자주 출입하던 "일본 자유당 계 무사들"이 "오사카"에 모여, "조선 토벌을 위해 무장 집단을 파견하자"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이들의 "조선 정벌"은 일본 사회에 화제가 되었고, 이는 곧 "정한론"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일본의 대륙침략 세력 선봉대"가 기도한 음모로, 그는 전혀 알 리가 없었지만, "오사카 사건"은 김옥균을 배척하려는 무리들의 악의에 찬 선전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김옥균이 일본인 장사대(壯士隊)를 이끌고, 조선에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이야기가 "일본"은 물론 "청나라 조정"에까지 전해져, "청나라의 리훙장"은 "김옥균 일행"을 단단히 구속해두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은근히 그에게 "일본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는데, 그를 내치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와ㆍ이노우에 가오루(일본 외무대신)"의 반대로, "일본 추방"은 모면하였다.

③ "조선 조정"의 암살 위협→ "청나라" 망명

"조선 조정"에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으로 자객을 파견하였다.

5. 김옥균 암살조선의 자객 밀파

① 1차 암살 : 미수 사건

1885.06월, "고종ㆍ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張殷奎ㆍ일명 장갑복ㆍ귀인 장씨(의친왕 생모)의 친정오빠)"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은규"가 "귀인 장씨의 오빠"라는 것을 알게 된 "유혁로"는 그를 경계할 것을 김옥균에게 제안했고, 김옥균은 "장은규"를 피함으로써, 1차 암살 기도는 미수로 돌아갔다.

자객 "장은규"는 "김옥균"의 민첩한 대응으로 암살이 실패하자, "김옥균이 자유당 계열 무사들과 결탁하여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이른바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을 뿐, 김옥균의 신변에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이 국제적인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에게 일본을 떠나라고 했지만, 그는 쉽게 떠날 수 없었다.

② 2차 암살 : 미수 사건

"조선 조정"은 2번째 자객인 "지운영(池運永ㆍ역관출신ㆍ온건개화인사)"을 파견하였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02.23일 인천을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한다. 그러나 김옥균은 "지운영"이 자객임을 간파하였다.

김옥균은 당시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거 중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伊勢勘) 여관"에 투숙하며, 인근에 살고 있는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과거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도쿄"까지 찾아와 한번 만나자고 하는 "지운영"의 제의에 김옥균이 응할 만도 했지만, 김옥균은 서신을 보내, "지운영의 면담 제의"를 거절했다.

"장은규 일파"를 상대한 "유혁로"는 "지운영"도 자객으로 의심하고, 이를 "김옥균ㆍ박영효"에게 전했다. "지운영"의 정체에 의혹을 느낀 김옥균은 거절하는 답신을 보낸다.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 

그는 "유혁로" 등에게 "지운영"이 가져온 "거사금 5만 엔"을 갈취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갑신정변 동지들"로 일본에 같이 망명해 있던 "유혁로ㆍ정난교ㆍ신응희" 등을 "지운영"에게 접근시켜, "지운영"이 자객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잡도록 하고, 그가 "공작비"로 가져온 "5만 엔"의 돈을 빼앗자고 제안한다.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만나, 이국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김옥균"을 비난하는 등 "김옥균"에게 큰 불만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지운영"은 "유혁로 일행"과 2~3개월 이상 만나면서,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운영"은 김옥균을 처치하면, 망명자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은 국왕의 밀지를 받들어,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왔으므로, 자신을 도우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지운영"은 그 증거로 "고종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명여로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인 바, 임시계획을 일임 편의요, 위국사무(爲國事務)도 역위전권(亦爲全權)하니 물핍거행(勿乏擧行)할 사"— 대군주모(大君主募) (이 사람은 명을 받은 특차도해포적사이니, 임시계획은 편의로 일임하며, 나라를 위하는 일 역시 전권을 위임하니, 조선의 신민이라면 핍박하지 않고, 거행하도록 하라.) 발행 일자는 1896.05월로 되어 있고, "국왕의 옥쇄(대군주모)"까지 찍힌 이 칙서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바다 건너의 역적을 체포하는 특명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옥균 살해에 성공한 자에게는 5천 엔을 지불한다."는 지불보증서도 가지고 있었다. "지운영"은 한성에서 품고 온 비수도 보여주었다. "유혁로" 등 3인은 "지운영"을 포박한 뒤, 구타하고 위협하여 가지고 있던 "칙서ㆍ비수" 등을 빼앗았다. 김옥균은 이를 "일본 언론"에 알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거론하며, "이노우에"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건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에 송환하고, 김옥균에게는 일본과 조선의 우호에 방해가 된다면서, "일본을 떠나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김옥균은 이에 항의하며, "이노우에"를 상대로 한 문서를 공개하고, 일본 신문에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나라의 북양대신 리훙장" 앞으로 사건의 책임을 따지는 공개서한을 게재하였다. "청나라"에서는 항의하였고, "김옥균의 발언"이 외교적인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1886.07월에 그를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강제로 연금했다.

"오가사와라 섬"에서는 소일 삼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라는 청년이 그를 추종하여, "상하이"에서 죽는 순간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이때 동행한 동지는 "이윤과" 한사람뿐으로, 이곳에서 그는 2년 동안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습한 기후와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여, 연금 해제나 연금지역을 옮겨줄 것을 호소한 그는 1888년 "훗카이도(北海道)"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에 석방되었다.

③ 3차 암살 (성공): 홍종우 (암살자)와의 만남

1894.02월,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가기로 결정한다. 1894.03월초, 김옥균이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李逸直)ㆍ홍종우(洪鍾宇)"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자신을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자신의 친척으로, "프랑스 유학생"이라고 거짓 소개를 했다.

그들은 평소부터 "김옥균의 행적"을 잘 알고 있고, 존경해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청국 행 경비를 제공하겠다."고 말했고, 김옥균은 한눈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김옥균"이 눈치 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홍종우가 동행하여, 김옥균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의심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실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박영효"까지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이일직"은 "박영효"를 암살하러 갔다가, "박영효"가 민첩하게 일본인의 집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그를 찾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수사결과 이들을 지휘한 "민영소의 사주"가 밝혀지기도 했다. (민영소 : 친일반민족행위자ㆍ여흥 민씨 집권당(수구당)의 일족ㆍ1894년 병조판서로 재직)

1894.03.10일, "오사카"에 도착한 김옥균은 여인숙에 숙소를 잡아놓고, 중국 입국 절차를 밟으면서, "도쿄"에서 즐겨 치던 당구도 치고, 골동품 점에 들려, "중국"에 가지고 갈 선물도 샀다. 1894.03.10일, "오사카 역"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치루"와는 14일과 16일 2차례 다시 만난다. 김옥균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면서, 중국행을 걱정하는 "도야마"에게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잡겠느냐"고 반문했다.

"도야마"는 만류를 단념한 듯, "김옥균"에게 "이홍장에게 선물로 갖다 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최고의 일본도로 치는 "교토의 산조(三條)" 칼 1자루였다. 이 "일본도"는 상하이에서 김옥균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후에 보디가드였던 "와다"가 소중하게 챙겨 와서, "도야마"에게 정중히 돌려줬다.

1894.02월, 김옥균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묵고 있던 "도쿄" 인근의 휴양지 "하코네(箱根)"로 찾아갔을 때, "후쿠자와"는 중국행을 상의하는 김옥균에게 "위험하다"며 만류하였으나, 그때 그의 대답은 "호랑이 굴" 운운이었다. 김옥균은 위험하다며, 중국행을 만류하는 일본인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이 "호랑이 굴" 비유로 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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