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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 박영효 (고종ㆍ1861~1939)ㆍ부마(철종 사위)ㆍ이완용 추도사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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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朴泳孝ㆍ1861~1939ㆍ78세)"는 조선 마지막 부마(철종 사위)ㆍ고종/김옥균의 비문(일본) 작성ㆍ1920년대 이후 "일선 동조론"에 동조했다. 조선 말기의 문신ㆍ급진 개화파ㆍ사상가ㆍ총리대신(2차 김홍집 내각 이후)ㆍ2차 갑오개혁 단행했으며, 태극기 도안자 (1882년,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일본 배 안)ㆍ명성황후 암살미수ㆍ동아일보 초대사장이었다. 1926.02.12일 "이완용"이 사망하자, 추도사를 낭독하였고, "이완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추원 부의장직"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해 말 다시 공석인"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 박영효 (朴泳孝야마자키 에이하루1861~1939.09.21향년 78)

은사공채금(은사금) 최고액 수령자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조선인 최초); 조선총독부에서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며, "은혜로운 돈"을 내린 회유정책ㆍ1911.01, 은사공채금 28만 엔(현재 56, 1만원= 현재 15)을 받고, 2월 작위 수여식에 참석작위 수여를 거부하고, 은사공채금도 1년 후 반납한다. (친일파 1: 이완용- 15만 엔(20)박제순- 10 (20))ㆍ1926.02.12 "이완용"이 사망하자, 추도사를 낭독하였고, "이완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추원 부의장직"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해 말 다시 공석인"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  출 생 : 조선 경기도 수원        •  사 망 :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  사 인 : 병사

•  :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  종 교 : 유교(성리학)        •  저 서 : 사화기략(使和記略)

•  : 본처 : 영혜옹주(永惠翁主1858~1872철종 서녀12세 때 옹주(15))  / 후처 : 상궁 순길당 (順吉堂)상궁 교전비 방나인 범씨 (轎前婢 房內人 范氏)박경희 (朴景熙1870~ ? 박인규의 딸)

•  자 녀 : 21(족보상)박묘옥(朴妙玉범씨 소생)- 한갑현(인천부호) 결혼   /   가 족 : 손녀 : 박찬주(朴贊珠) : 이우(의친왕 이강의 차남)1935.05.03일 혼인ㆍ "이우"가 일본 왕실이나 일본 귀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의친왕" 역시 일본인 며느리 불가론을 펼치면서 갈등이 빚어지자, 그가 사태 중재에 나섰다 이때 그는 타협의 조건으로 "자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이우가 이미 "손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   손자 : 박찬범(朴贊汎) : 이해춘(의친왕 이강의 3)과 혼인

박영효

일본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하기 전 "천세환"의 선원 "스치 후치츠로(十藤十郞)"가 지어준 것이다.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고, "박규수유대치오경석"의 문인이다"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베이징"서 가지고 온 "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 등 청나라와 외국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김옥균(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4, "김옥균홍영식윤치호서재필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였다. "을미사변갑오개혁"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일본 체류 중 1900년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907년 특별사면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이완용의 고종 양위 계획"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투옥유배되었다"대한제국" 이전, 조선조에서는 받은 품계는 최고 등급인 "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이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일선 동조론"에 대해 허위사실이며, 사실무근이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이는 "신궁봉경회"에 참여할 때도 나타났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일선 동조론"에 동조하게 된다일제 강점기 초반에는 기업은행 활동에 전념하던 중, "조선총독부"의 회유타협에 응하여, "중추원 고문귀족원 의원"을 지냈고,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1920.04, "김성수" 등의 주도로 결성된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초빙되었으며,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1926.02.12, 정적이자 경쟁자였던 "이완용"이 사망하자, 추도사를 낭독하였다"이완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추원 부의장직" 제의를 받아들였고, 그해 말 공석인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이다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2. 평 가

긍정적 평가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며, 뉴라이트 등은 "개화파(박영효김옥균 등)"청나라"에 바치던 조공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부정적 평가

급진적이라는 비판과 친일파라는 비판도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어, 지탄받았다.

강력한 치안론 주장

구한말, "박영효유길준윤치호서재필"의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이 각자 달랐지만, 일본식의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역적(동학의병)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봤다 "갑신정변" 당시 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의지는 모두 좌절됐고, 그는 "민도가 낮아서 개혁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낮은 민도"를 해결할 방법이란, "경찰 치안과 군대에 의한 통제만이 답"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이들의 강력한 경찰권 주장은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반발 없이 제대로 채택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경무부 대신(경찰청 총장)" 서리 이근택(1865~1919)3~ 4명 이상이 모여서 속닥거리면, 엄벌하겠다는 계엄령을 내린 것은 식민화 훨씬 이전인 1901.06.22일의 일이었다.

박영효김옥균의 관계

"박영효"는 온순하고, 침착한데다가 세상사를 멀리하였으나, "김옥균"은 예민하고, 다재다능한데다가 세상의 교제도 넓었다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박영효"의 문벌이나 신분이 높아 "김옥균"을 능가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꾸로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져, 자연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김옥균"을 남겨둔 채, "박영효"가 미국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광린은 "박영효가 김옥균을 두고, 서광범서재필만 데리고 미국으로 갔던 이유도 김옥균박영효의 기질 차이"로 이해하였다.

3. 영혜옹주와 초혼사별

1872.04, "수원부유수 신석희"의 천거와 "우의정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부마로 선택되었다당시 "철종" 유일한 고명딸 "영혜옹주(永惠翁主1858~1872철종 서녀)"15박영효는 12세였다1872.05(고종9), 철종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여, "금릉위(錦陵尉)"의 봉작을 받았다그러나 8, 결혼 3개월 만에 "영혜옹주"가 사망사별하고, 3년 상을 마쳤다.

1945, 광복이 되면서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의 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그의 묘는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손자 "박찬범"이 묘 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고, 그 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서자 박일서서손 박찬범"의 묘가 옆에 있다후일 후사가 없는 그를 불쌍하게 여긴 "고종"의 특별 배려로 궁녀 몇 명을 하사받았는데, 이들에게서 "서자서녀들"을 보게 된다.

사망 당시, "후작중추원 부의장" 직에 재직 중이기도 했다.

1939, " 21"으로 사망하였고, 사후 그의 작위는 장손인 "박찬범"이 계승했다. 1939.11월 일본의 사회단체인 "흑룡회"가 선정한 " 합방 조선측 유공자 추도회"를 할 때, "이완용이용구송병준" 등과 함께 "합병 공로자"로 추천되었다묘는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손자 "박찬범"이 묘 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 그 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서자 박일서서손 박찬범"의 묘소가 옆에 있다.

4. 갑신정변(1884.12.04) 실패 후, 가족사

"정변"이 실패하자, 가족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역적으로 몰리면서 집안에서는 항렬자를 바꾸는데, "()"에서 "()"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일부 그의 일족들은 "()"자 돌림을 고수하기도 했다일찍 "이일영"에게 시집간 1째 누나와 "김철현"에게 시집간 2째 누나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죽음과 "" 되는 것을 모면했다아버지 "박원양"은 장손이자 "박영교"의 장남인 손자를 죽이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바로 들이닥친 의금부 나졸들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며칠간 굶어, 비참하게 아사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조병옥의 나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원양은 감옥에서 섬거적(볏짚으로 만든 거적) 뜯어 먹다가 굶어죽었다"고 기록해 놨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어머니 "전의 이씨"는 처형당하였다"박영교""홍영식" 등과 함께 고종 내외의 피난처를 지키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2째 형 "박영호"는 일본 공사관에 피신하여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5. 태극기 도안 (1882, 선상)

1882(고종19), "제물포 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1882,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3수신사로 선발되어, "부사 김만식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과 비공식사절인 "민영익옥균" 등을 대동하고 배편으로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도일했다. 도일 당시, 그는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이응준 태극기"4()의 좌우를 바꿔 도안, 제작했고, 이는 후에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가 됐다.

"태극기"가 대외적인 국가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1882년의 일이다. 그럼에도 무슨 영문인지 1882년에 그렸다는 최초의 태극기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아 태극기 역사가 단절되어왔다. 일제 침략 36년 동안, 처절한 압박과 함께, 천태만상의 변형된 태극기를 사용되었다. 그 후, 1949.10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현재 모습의 태극기를 제정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역사학계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1997.08, "동경 도립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관련 기사가 게재된 1882.10.02일자 "시사신보 (時事新報)"를 발견하여, 1997년 광복절에 공개함으로써 115년 만에 그 실체를 역사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다.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고종"이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재질도형의 설명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했던 내용들이 자세히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박영효의 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4각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 부분 5분지 2를 중심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 숙소(고베의 니시무라야) 옥상에 휘날림으로써. 국왕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 라는 내용이 곧 최초의 태극기를 사용하였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1882, 사용한 태극기는 1392"고려 말 공양왕" , 제작된 "범종(梵鐘)"에 새겨져 있는 "태극 모양4괘 도형"이 대부분 일치한다"범종"의 태극기는 높이 35cm, 직경 30cm"고종"이 그려낸 태극기와 같은 형식이다. "고종"은 태극기를 새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태극 모양을 그대로 "대한제국 국기"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1883.01.27, "고종"은 태극기를 "국기(國旗)"로 사용한다고 왕명으로 공포하였다. 당시의 태극기는 4괘의 위치가 지금과 동일하지만, "태극의 음양" 모양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태극의 음양" 배치가 아래로 되어 있지 않고, (빨강)(파랑)으로 되어 있었다.

6. 갑신정변 이후, 귀국사유

"허정(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에 의하면, 그가 일본미국으로 망명했으나, 귀국하게 된 이유가 "양반가의 자손이란 자존심 때문에, 노동을 하기 싫어해서이다"고 회고하였다"박영효과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

7. 명성황후 암살미수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여 "고종" 한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제휴를 통해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기원했으나, 그는 이를 우려했다.

"명성황후""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 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하였다그녀의 권모계략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고 본 그화근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여겨, 1895.07월로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그는 "유길준"을 자기의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고종에게 밀고했다그는 "유길준"에 의해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바꿔 입고 변장하여,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 나와, 강 자락의 용산에서 증기선을 타고 도주한 것이다일당인 "이규완신응희" 등도 따라 달아났다. 그러나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그 무렵 따로 "대원군이준용의 왕비 암살 모의" 가담한 상태였다

8. 을미사변무력 쿠테타(고종 폐위) 기도

1895.07월 말(고종32), "도쿄"에 도착한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주선으로 "도쿄" 구석의 판자촌에 은거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경호원을 보내, 그를 지켜주었다한편 조선에서는 계속 자객을 파견하였고, 그는 외부 출입을 삼가하였다1895.08"을미사변"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협력자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을미사변"에 그가 직접 가담한 혐의가 보이지 않자, 1898.12.16"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불러들여, 정부 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거절했다도리어 "박영효"의 정계복귀를 꾀했다는 이유로 고종척족 대신들은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독립협회" 해산 이후, 그는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해야 된다고 결심하여 "무력 쿠테타"를 계획한다.

"윤치호서재필"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던 그는 이들과의 연락하며 사람을 국내에 들여보내, 국내외의 정세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입수한다이후 국내의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1900.07(광무7), "고베"에서 "이승린이조현김창한" 등을 러 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고종" 양위시킨 뒤, "의화군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리고 국내에 있던 "한규설윤치호윤석준" 등에게 자금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극비리에 "이승린이조현"을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했지만, "의금부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된다그의 정계복귀 공작과 고종 폐위 기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그는 일본인 경호원을 고용한 뒤, 다시 은거한다.

9. 김옥균의 여성 편력 위장김옥균과의 결별

"김옥균"은 여자관계는 난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망명 직후, 그는 "간사이 지방"에 머물렀으며, 이때 "야마토의 히가시히라노초(東平野町)"에 살고 있는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다그때 그는 "나미(야마구치의 어머니)"내연관계를 맺어, 다음 해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이후 그는 자중하였지만, "도야마 미치루"의 권고로 다시 여자를 찾았다.

조선에서 자객이 파견되자, "도야마 미치루"는 그에게 일부러 술과 여색에 탐닉하라고 권고했다."조선에서 김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자, 그의 신변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일본 고사(古事) 오이시우치가 교토에서 기라의 첩자를 방심시킨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국적 행위를 버리고, 주색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가 매일같이 도쿄 유라쿠초의 여관에서 시바우라의 온천장까지 들락거리며 홍등가를 방황했다." < 도야마 미치루의 증언 >

일부러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하였다"김옥균"의 주색(酒色)방종은 "홋카이도 유배" 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오타루"에서 사귄 기생도 "김옥균"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물론, 다른 여자의 소생까지 거두어, "김옥균""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박영효""김옥균"에게 "처신을 바로 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김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사람, 일본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 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김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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