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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 유길준 (고종ㆍ1856~1914)ㆍ개화사상 대변인ㆍ흥사단 조직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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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길준 (兪吉濬ㆍ1856~1914ㆍ58세) "은 유길준(개화사상의 대변인)→ 최익현(위정척사파 대표)였다. "갑신정변ㆍ김옥균 (金玉均ㆍ1851~1894.03.28ㆍ향년 43세)의 암살" 이후"명성황후 (明成皇后ㆍ민자영ㆍ민비ㆍ1851~1895.10.08ㆍ44세)"와는 정적으로 변했다. "김옥균의 비석(아오야마(靑山)의 외인 묘지)"을 직접 석각했다. (박영효가 글을 짓고, 이준용(흥선대원군 적장손)의 글씨체로 썼으며, 유길준이 직접 석각)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하며, 그의 "흥사단"을 본 따, "흥사단"을 재건하였다. 1910.08.29일,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지자,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 유길준 (兪吉濬1856~1914향년 58)

조선 후기 문신외교관작가대한제국 정치가개화 사상가(온건개화파)계몽운동가철학자ㆍ같은 개화파이자 오랜 친구"윤치호"는 일기에, "유길준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음"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점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전국적으로 이토 추도회를 주관한 점" 등은 비판,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출 생 : 한성부 북촌 계동        •  사 망 : 노량진 자택 (- 경기 하남 덕풍동 검단산)한국 최초의 사회장        •  수 상 : 1910- 대한제국 훈일등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

•   : 구당(矩堂)ㆍ천민(天民)ㆍ구일(矩一)        •  사 인 : 신장염과로스트레스 합병증        •  종 교 : 기독교

•  학 력 : 미국 보스턴 대학교 1학년 중퇴       •  : 경주 김씨충주 이씨       •  자 녀 : 2(유억겸유만겸)       •  가 족 : 조부 : 유치홍(兪致弘청송부사) / : 유진수(兪鎭壽진사동지중추부사): 한산이씨  

•  1: 유만겸(兪萬兼1889~1944)  /  아들- 유병덕(兪炳德1932~2000) 감사원 심의실장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ㆍ친일반민족행위자ㆍ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학과 졸업유학 중, 일본의 대륙침략 논리였던 아시아주의를 찬동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문명화라고 주장

•  2: 유억겸(兪億兼1896~1947): 계몽운동가법조인교육인친일반민족행위자ㆍ부인 : 윤희섭(尹喜燮1905~ ?): 언니 순정효황후(한국사의 마지막 황후순종의 계후)ㆍ신간회흥업구락부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고,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조선체육회 회장 등 역임하여 각종 사회활동을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에 변절하여 적극적인 친일 활동ㆍ 해방이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미군정 주둔 후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12월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장, 1946.02월 문교부장을 역임

•  저 서 : 보로사국(프로이센) 후례대익(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영법로토(영국-프랑스-러시아-터키) 제국 가리미아(크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구당시초(矩堂詩抄)구당집(矩堂集)세계대세편(世界大勢編)정치학(政治學)평화광복책(平和光復策)이태리 독립전사(伊太利獨立戰史)유길준전서파란 쇠망전사(波蘭衰亡戰史)구당서간집(矩堂書簡集)서유견문(西遊見聞)- 국한문 혼용 기행문/ 번역- 문자지교(文字之敎, 후쿠자와 유키치 저)/ 국어사전문법서- 대한문전(大韓文典)

유길준

정치적으로 "일본"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일본의 호의를 의심하였으며, "을사 보호조약한일 합방" 력 반대하였으나, 홀로 이를 막기에는 무리수였다근대 한국 최초로 "일본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현대 한국의 막강한 "해외 유학파"의 원조라는 시각도 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일본어중국어라틴어"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약간의 독일어 회화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회화 실력으로 서구 각국의 원서를 보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각종 저서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민주주의자본주의 등을 개하였다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08.29,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1870(고종7), "이경직(외할아버지)박규수(노론 실학파 학자)"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개화사상가 "유대치오경석강위" 등의 문하생이었다.

1871,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이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1881,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일본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갑신정변" 실패 직후, 귀국하여 6년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김홍집 내각""내무부협판내무부"으로 활동하였다

1894(고종31),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전격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신식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고, "갑오경장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1895(고종32), 근대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의 수정과 증보 후, 1909(융희3)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또한 "독일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1895.08,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자,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3)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11(광무8),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을 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1910.10.01(융희4), "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한일합방 무효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2. 부정적 평가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전국적인 추도회를 열거나, 그가 1908년에 조직한 "한성부민회" 차원에서 일본 고관들의 환영식에 학생과 주민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것 등은 추악한 행각임에 틀림없다는 비판이 있다사상적 측면에서도 일본 망명으로부터의 귀국(1907) 이후의 기본 방침인 "식산흥업과 교육에의 헌신정치에의 불참"은 곧 닥쳐올 일제시기의 토착 엘리트(친일파)의 이데올로기인 현실 순응적인 "실력양성론일본 지도하의 몽매한 조선의 문명화"의 청사진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지도자로 추앙되었고, 선각자계몽의 선구자로 기려져왔다"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 의하면, "유길준에 대한 선양작업"을 시작한 것은, 그를 "조선 민족의 모범적인 지도자"로 섬기고, 그의 흥사단(1907년 설립) 이름까지도 본떠 사용한 근대 친미적 부르주아며, 지식인의 수장인 안창호였다", 부정적으로 평하였다"윤치호 일기"와 같은 사료에서, "갑오내각"의 주요 인물이었던 "유길준" 명성황후 시해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등, 행적이 결코 "모범적"이지만 않았음에도, 오늘날 교과서에서는 그의 모습을 "대화의 선구자국민 계몽의 주역"등 긍정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다고 혹평하였다.

또한 "1908년에 조직한 한성부민회의 차원에서 일본 고관들의 환영식에 학생과 주민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것 등은 추악한 행각임에 틀림없다."고 비판하였다"교과서 등 청년의 의식을 좌우하는 권위적인 서술에서, 그의 계몽주의가 어느 계급계층을 위한, 그리고 어떤 모델에 의한, 어떤 가치 구조를 가진 운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다루어졌으면 한다. 그렇게 해야 유길준이 걸렸던 군국주의의 전염병이 우리에게까지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3. 긍정적 평가

사후 "안창호ㆍ윤치호"에 의해 애국자로 추모되었다.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넉넉히 급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관직에 오르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과거를 포기한 이른바 "선각자였다"는 평가가 있다. 안창호는 "조선 민족의 모범적인 지도자"로 평가하고, 그의 흥사단을 본 따, "흥사단"을 재건하였다. 

"권동진"은 "삼천리지"에서 그를 평하기를, "유길준은 그때 우내(宇內)의 대세를 살피는 정객이었다. 게이오 의숙을 마치고, 미국 화성돈에 가서, 보스턴 대학을 졸업한 당시에 있어서는 희유한 신지식의 소유자였다. 명문의 아들이었으며, 두뇌도 명석하였으며, 의지불굴의 기골이 있어 대각에도 올랐다."고 평하였다. "윤효정"은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이며, 애국자라고 애석해했다. "세상에는 상당한 학식과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자가 수없이 많지만, 유길준처럼 그 뜻을 전적으로 펼쳐보지 못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박학함과 본래 자신이 품고 있던 큰 야망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했고, "서유견문"조차 제대로 간행을 끝내지 못했다."며, 애석해하였다. 

① 유럽 정치 지도자 소개

"보로사국(프로이센) 후례대익(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를 통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클라우제비츠를 조선 사회에 처음 소개하였고,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를 알리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태리 독립전사"를 통해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주세페 가리발디 등 당대의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을 조선에 소개하였다.

② 장애인 교육 개척

장애인들을 지도하는 방법을 최초로 설파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장애인을 장애인이라고 특별하게 대우하지 말고 일반인과 똑같이 대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장애인 지도법을 최초로 제시하여, "근대 특수교육 성립에 기여했다"는 시각도 있다.

③ 문법서 편찬 (조선문전ㆍ대한문전)

한글의 문법서인 "조선문전"과 조선문전을 개정한 "대한문전"을 발표하였다. 대한문전에서 그는 음운, 어휘ㆍ형태, 문장의 차원에서 체계화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문전"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선문전"은 8차에 걸친 수정ㆍ개정 과정을 거쳐 1909년의 "대한문전"으로 최종 편찬되었다. "조선문전"의 특징은 언어(어휘)의 갈래를 설정하고 의미별로 세분하며, 부론에서는 축어법과 어음의 몽수를 두었다. 이는 형태소 및 어휘에 대한 인식과 음운 변동 규칙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0년부터, "한글의 문법"을 연구하여, 1895년 최초의 한글 국어사전이자, 문법서인 "조선문전 (朝鮮文典)"을 간행하였고, 다시 10여 년간의 연구와 증보 끝에, 1909년 "최광옥(崔光玉)"의 이름으로 "대한문전(大韓文典)"이 간행되었다. 처음 "조선문전"을 편찬한 뒤, 그는 백성들의 계몽ㆍ개화를 위해, 계몽사상을 설파하고 야학당을 개설하였지만, 글자를 모르는 문맹들이라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문법 연구ㆍ한글의 보급의 필요성을 깨닫고 한글 사용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한글 사용론"에서 한발 후퇴한 "국한문 혼용론"을 주장하였다.

"조선문전ㆍ대한문전"은 제1장 총론ㆍ제2장 언어론ㆍ제3장 문장론의 3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 총론은 한글 단어의 종류와 뜻ㆍ 문자와 음성에 대한 설명, 제2장, 단어의 동사ㆍ명사ㆍ조사 등 각 품사, 제3장, 각 문장에 관한 문법ㆍ용법적인 것을 기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품사에 관한 설명에 품사 또는 언어 대신 "어종(語種)"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의 어종ㆍ품사의 분류는 후대 "한글의 8품사" 그대로다. 그리고 조사ㆍ용어의 어미를 구별하여 기술하였으며, 각각 조동사ㆍ접속사라고 이름 붙였다. 문장에 관한 것을 소개할 때는, 부사를 설명하고, 이것을 "보족어(補足語)"라고 이름 붙였다.

④ 국한문 혼용체 주장ㆍ한글 연구

"서유견문"은 일본의 근대사상가, 교육자인 "후쿠자와 유기치"의 저서 "서양사정"의 영향을 받았다. "서유견문"을 간행하면서, 한글 활용의 중요성과 언문일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서유견문"은 국한문 혼용체이며, 이후 그는 "국한문 혼용체론"을 주장했다.

그는 백성들이 한자가 어려워서 해석하지 못한다고 보고, 언문을 보급하는 활동을 하였다. "서재필 독립신문"의 한글 전용보다는 국한문 혼용을 통한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도 일본처럼 언문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만 한문은 너무 어렵고 뜻이 복잡하여, 글을 배우지 못한 자들이 쉽게 배우지를 못하므로 보다 쉽고 간편한 한글을 연구, 보급시켜서 언문일치화도 이루고 동시에 무지몽매한 조선 백성들에게 글과 신사상 교육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계몽시켜보자"라는 취지에서 한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문전"을 써서 한글의 언어와 방언, 문법 등을 연구하였고, 이를 여러 번 수정, 개정 끝에 "대한문전"으로 펴냈다.

4. 사상신념

① 개화사상

실학의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ㆍ중국의 양무운동ㆍ변법론(變法論)ㆍ일본의 문명개화론ㆍ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ㆍ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폭넓게 받아 형성되었다. 군민공치(君民共治),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ㆍ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ㆍ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ㆍ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하였다. 비실용적이고 관념론적인 도덕과 학문 대신 현실에 맞는 학문과 기술을 배울 것을 역설하였다. 아무리 명분론적으로 옳고, 이상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사상, 불필요한 학문이라 봤다.

② 취장보단(取長補短)ㆍ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주장

"취장보단(取長補短)"이라 하여, 전통의 장점은 살리고, 전통의 단점은 서구의 장점을 도입하여 보완하자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 서양의 최신 과학 기술ㆍ문명은 받아들이되, 우리 고유의 것을 부정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를 무모함ㆍ준비 미숙ㆍ준비 기간의 짧음을 지적하였고, "갑신정변"에서 희생된 동지들이 "동도(東道)"를 부정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점도 함께 지적하였다. 그는 윤리적ㆍ정신적인 것은 우리 것을 중심으로 하고, 정치ㆍ제도ㆍ문물 등은 서양의 것으로 할 것을 주장, "온건한 개량주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③ 입헌 군주제하에서 점진적 개혁론

종래의 "상고주의(尙古主義) 사관"을 비판하고, 문명의 진보를 주장하였다. 그는 "개화"를 당연한 것을 넘어, 인간사회가 "지선극미(至善極美)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가 미개화ㆍ반개화ㆍ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사관(文明進步史觀)"을 제시하였다. 

점진적이고 자발적인 변화ㆍ개혁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조선이 개혁하는 개혁 방법의 하나로 "입헌군주정"의 도입을 들었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지하고 있었고, "입헌군주제" 하의 점진적인 변화ㆍ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구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그는 "영국"과 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입헌군주국을 "이상향"으로 여겼지만, 현실적인 모델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후발개발국이라는 차원에서 더 가깝고 그의 정치적인 후원자이던 "메이지 일본"이었다.

④ 지방자치제ㆍ입헌군주제

"지방자치제도ㆍ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대안으로 생각하였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를 설치ㆍ운영했다. "윤치호ㆍ서재필ㆍ박정양" 등과 함께 "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고, 그들 주도로 "중추원"을 설치할 때, 적극 지지하였다. "일본ㆍ미국"의 상ㆍ하원 "양원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중추원"조차 "왕실ㆍ수구파ㆍ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는 체제개혁ㆍ절대군주론ㆍ군주의 절대권에는 반대하였으나, 폭력 혁명론ㆍ공화제보다는 군주가 다스리는 체제를 선호하였다.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고 있었고, "영국"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보았으며, 그의 개화사상에 나타난 이러한 개혁론은 "갑오경장"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⑤ 적자 생존론ㆍ우승열패론ㆍ사회진화론

그는 "생존경쟁ㆍ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조선에 처음 도입하였다. "경쟁"이라는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경쟁론"이라는 글을 통해서, 1883년에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사람은 그였다. 그는 "우존열멸ㆍ강승약패"는 천도(하늘의 뜻)ㆍ인사(인간의 만사)의 당연지사로 파악하였다. 그는 "우승열패ㆍ적자생존ㆍ생존경쟁"은 필연적인 것이며, 자연계나 동물의 세계는 물론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만물의 기본 원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경쟁이야말로 "사회진보의 원동력"이라고 확신하였다.

특히 자신의 저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미개(未開)ㆍ반개화(半開化)ㆍ개화(開化)라는 단계적 발전론으로 압축되는 문명관을 제시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진화론" 관련 서적을 접한 그는 "하늘의 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찰스 다윈- 진화설ㆍ에른스트 헤겔- 적자생존설ㆍ우승열패론" 등을 비롯한 사회진화론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것이 하늘의 도리, 순리로 해석하였다.

⑥ 문명개화론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ㆍ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ㆍ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를 당면 과제로 제시하였다. 그는 저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도 조선의 과학기술이 낳은 위대한 성과로 "이두ㆍ고려자기ㆍ거북선ㆍ 금속활자"를 들고 있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 500년간 문인들만을 우대하고, 기술자ㆍ군인들은 천대하면서 이러한 훌륭한 기술과 성과들이 사장되었음을 역설했다.

그는 과학ㆍ기술의 천대가 조선을 멸망의 나락으로 이끌었다고 확신했다. 미개의 상태에서 반개 또는 문명으로 가야 되고, 문명화를 위해서는 문호를 열고, 내정을 개혁하고 개화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적한 것처럼, 서구의 표면적인 기술 문명 이전에,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과 공공성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⑦ 문명개화ㆍ주체적 관점

일본과 서양은 문명이 발전된 문명화된 상태였지만, 완전히 문명화된 상태는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서구 사회도 아직 고도의 문명화는 이루지 못한 것으로 내다봤다. 그 근거로 노예 제도ㆍ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지적했다.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자각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서양의 제도ㆍ사상을 받아들이되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비판적 입장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개화ㆍ개혁에 민중들의 참여가 적극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지식인이나 소수의 정부 권력자들보다 일반 국민들의 태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 문명과 미개를 결정한다고 전망했다.

⑧ 교육ㆍ계몽 중요론

일찍부터 교육이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교육을 통해 무식과 무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일관된 신념이었다. 국민 교육의 중요성을 토로하는 국왕 고종에게 바친 상소문 "언사소(言事疏)(1883)"에서도 나타난다. "교육의 도(道)가 융성해지지 않으면, 인민들의 지식이 넓어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반드시 빈약하게 될 터이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체로 지식과 기력 양자는 교육에 달려 있으며, 교육의 길은 국가의 시책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는 교육을 통해 무지함을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중들이 쉽게 깨우칠 수 있도록, 한글의 사용ㆍ보급을 건의ㆍ역설하기도 했다.

⑨ 외교관

"일본"을 통해서라도 "근대화를 이뤄보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조선"을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던 그는 "탈 중국화"를 최대의 과제로 인식했다. "서재필"의 "독립문ㆍ독립협회" 외에, 중국으로부터 정신적으로도 독립할 것을 역설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윤치호"와 달리, "유길준"은 서구에 대해 극단적인 패배감이나 열등감을 갖지 않았고, 내면에 침잠해버린 "윤치호"와 달리, "유길준"은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자식의 식견을 동포들과 공유하는 데 힘썼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은 통상 상대에 불과하며,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고 일갈하여, 동시대인들의 "긍정 일변도 미국관"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약소국이 생존하려면, 반드시 강대국에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인식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같은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⑩ 강력한 치안론

"갑신정변" 실패 이후, 민중을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ㆍ훈련ㆍ개조의 대상으로 본다. 통제되지 않고 훈련되지 않은 민중들은 폭도나 야수와 같다고 봤다. 따라서 그는 "강력한 경찰ㆍ군대를 통한 사회 통제"를 당연히 여겼다. "박영효ㆍ유길준ㆍ윤치호ㆍ서재필"은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이 각자 달랐지만, 일본식의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역적(동학ㆍ의병)"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봤다. 이러한 이들의 "강력한 경찰권 주장"은 당시 유일하게 반발없이 채택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경무부 대신(경찰청 총장) 서리 이근택(1865~1919)"이 3~4명 이상이 모여서 속닥거리면 엄벌하겠다는 "계엄령"을 내린 것은 식민화 훨씬 이전인 1901.06.22일의 일이다.

⑪ 국방력

그에 의하면, 군사력은 그 나라를 충분히 방어할 정도면 족하다는 것이 유길준의 지론이었다. 청년기의 그는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방위력은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공세적 군사력은 부정하였고 군사력으로 약소국을 멸시하는 "야만적 행실"에 비판적이었다. 만년에도 군사력은 모든 국권의 기본으로서, 세계제패ㆍ러시아의 팽창ㆍ일본의 확장을 가능하게 만든 추진력으로 봤다. 그는 자기 방위를 넘어선 필요이상의 군사력 사용도 부정하였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국민들에 대한 헌신성, 진정성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전쟁 도발에는 비판적이었다.

⑫ 군국주의적 관점

납세ㆍ징병ㆍ노동을 피지배층ㆍ민중이 지녀야 할 최고의 고상한 덕목으로 선정했다. 인간다운 인간의 덕목으로 "납세의 의무ㆍ징병을 통해 병사가 되는 의무ㆍ땀 흘려 노동할 의무"를 제시하였다. 저서 "노동야학독본"의 제1장에서는 인간의 도리와 권리와 의무 등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제1과 사람)는 것은 서두에 실린 훈화이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도리"는 과연 무엇인가? "신하와 백성이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국가의 윤리적 기본이며, 귀천ㆍ상하의 차례가 있는 것이 사회의 윤리적 기본이다"라는 게 바로 사람과 짐승의 경계선을 긋는 도리이다."(제2과 사람의 도리) "문명개화론"을 주장했지만, 그는 인간은 귀천이 엄연히 나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대ㆍ순사"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가 개념을 모델로 삼아, 조선인들도 국가와 주군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생정신을 가지라고 설파하였다. 국가를 위해, 임금 또는 지도자를 위해 희생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며, 당연히 희생할 것을 요구했다.

⑬ 징병제 주장

그는 "세금 납세ㆍ병역ㆍ노동이 백성의 도리요, 인간의 도리"라고 역설했지만, "고종"은 그의 말을 묵살하였다. "징병제"를 주장했고, "고종"에게 여러 번 건의하였지만, 역시 민중을 증오ㆍ불신하던 "고종"은 그의 "징병제" 제안을 전면 거부한다. "징병제"에 끌려간 1940년대보다 훨씬 이른 1890~1900년대에 "유길준ㆍ서재필"은 "징병제가 곧 국민을 만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⑭ 단발령ㆍ양복 착용 주장

1894년, "갑오경장" 이전부터 "단발령"을 주장했고, 1894년 초부터 "고종"을 상대로 단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단발을 확신한 이유는 관리가 편리하고, 위생적이라는 점이었다. 1894.10월, "고종"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미국 체류 시절부터, 단발의 필요성과 용이성을 체감하였다. 1883년 일본에서 돌아온 뒤, "보빙사" 통역으로 선발돼 상투에 갓을 쓰고 미국에 갔던 그는 머리를 서양식으로 자르고, 양복으로 바꿔 입었다.

한복이 지나치게 소매가 길고 넓어 활동하기 불편한 것,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조선식 복장"은 미국에서 "곡마단 복장"으로 놀림 받을 정도로 낯설었기 때문이다. "갑오개혁" 때, "내부대신"으로 "단발령"을 주도하였고, 단발에 대한 확신이 선 그는 직접 "단발령"을 공포하고, 손수 가위를 들고 "세자의 머리"를 깎아 큰 파문을 일으켰다.

⑮ 의병에 대한 비판

구한말 의병 중, 의병을 사칭한 강도들의 존재와 의병임을 내세워 횡포부리는 자들을 비판하였다. 일본의 조선병합ㆍ을미사변ㆍ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의병들이 나타났지만, 이 중에는 의병의 이름으로 민가를 약탈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의병을 사칭하는 자ㆍ의병의 이름으로 민폐를 끼치는 자들의 존재를 지적했다.

⑯ 권력ㆍ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타락한다고 보았다. 정치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도덕ㆍ정의로운 정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1900년대, 그의 국제정치관은 도덕이 기능하지 못하는 국제사회의 권력정치 현실을 "개탄"한 것이지, 권력정치 자체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인간을 권력지향적 존재"로 파악하였다. 어떠한 권력 또는 도덕적 명분과 같은 차별성을 만들고, 자신의 우월함을 한없이 입증해내려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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