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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ㆍ악녀 (10인)ㆍ부덕 (6인)

개화파 : 김옥균 ① (고종ㆍ1851~1894)ㆍ갑신정변 주도자ㆍ부관참시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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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金玉均ㆍ1851~1894.03.28ㆍ43세) "은 친일 개화사상가ㆍ진보주의자로, 1884.12.04~12.06일,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 (甲申政變ㆍ개화당 3일 천하)"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한 이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1. 김옥균 (金玉均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1851~1894.03.28향년 43)

•  출 생 : 조선 충청도 회덕군      •  사 망 : 청나라 장쑤 성 상하이 (부관참시 후암장이전)      •  묘 소 : 한일합방 이후, 충남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로 이전되었다.      •  사 인 : 암살 (홍종우의 리볼버 권총에 의한 암살)

•  : 고균(古筠)별호 : 고우(古遇)      •  별 칭 : - 백온(伯溫)      •  종 교 : 유교불교      •  저 서 : 기화근사(箕和近事)치도약론(治道略論)ㆍ갑신일록(甲申日錄: 手記) : 김옥균의 저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아마 일본인)이 쓴 위작이라는 주장(김옥균이 다른 저서에서는 쓰지 않은 "일본식 한문체"가 다수 섞여 있음)

•  가 족 : 친부- 김병태(金炳台)친모- 은진 송씨  / 양부- 김병기(金炳基형조참의 좌찬성5촌 당숙) 6세 때 입양  /  양모- 전주 이씨풍양 조씨 (조영하/조성하의 당고모신정왕후의 사촌 (조성하- 이호준(이완용의 양부) 사위조영하- 조성하의 사촌 동생)    •  가 족 : 누이- 김균이매제- 송병의동생- 김각균(金珏均)8- 김형규9- 김좌진       •  자 녀 : 32김영진(金英鎭1876~1947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평안도 관찰사)

•  : 기계 유씨(유영환의 손녀)- 1아들 1(김영진)  /  후처-1 : 스기타니 다마(오타마(小玉)- 게이샤(24~25세 정도의 미인)금전적정신적 후견인후에 실업가의 부인이 됨  /  후처-2 : 마츠노 나카(松野なか게이샤)- 1(사다)   /   내연녀 : 나미 (망명 직후, 잠시 거주하던 집주인인 야마구치 신타로의 어머니)- 아들 1(미상)              - 1 : 송씨  / - 2 : 미상 - 서자 김학진(金學鎭)

김옥균

1910(융희4), "한일병합" 이후, 조선에서는 그가 생존하여 개혁정책을 펼쳤더라면, "한일 병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유길준박영효윤치호 "등은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한일 병합을 막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대 명문가 출신의 "급진 개화파", 1884년 초부터 "갑신정변"을 계획주도하였다"김병태"의 장남으로 6세에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성"에서 성장하였다"강화도 조약" 이후, "조사 시찰단"이 되어, "일본"에 가서 개화 문물을 체험한 후,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져, "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해, 개혁을 꾀했다"양부 김병기"를 따라, 강릉에서 "율곡학파의 서당"에서 학문을 접하고, 1870년 초부터는 "유대치박규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한성 봉은사의 중)"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고종10), 문과 알성시(謁聖試)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879, "이동인"을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한 뒤, 1881년 이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일본 유학생군사견습생 파견을 주도하였다1882, "임오군란" 이후,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이조참의호조참판외무아문협판" 등을 역임하며, "개화파의 확산"에 힘썼다.

1883.04(고종20), 독도에 주민을 입주시켜 "독도 유인도화 정책"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시행케 했다1883.06, "서재필서재창이규완" 등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1884년 초부터 "박영효" 등과 정변을 기도, 1884.12.04~12.06일,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 (甲申政變ㆍ개화당 3일 천하)"을 일으켰으나"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한 이후"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청나라"로 망명했다1894.03.28,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홍종우"에 의해, 리볼버 권총으로 암살당했다사후, 시신은 "부관참시"되어, 8도에 효수되었으나, 1895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권되고, "" ,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2. 김옥균 암살 (1894.03.28) 부관참시 이후 (04.28) 가족사

"김옥균"이 역적이 되자, 문중에서는 ""자 항렬의 이름을 ""자로 바꿨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남긴 머리카락과 옷을 묻은 "무덤(가묘)"를 만들고, "위패" 일본의 한 신사에 안치한 뒤, 제사를 지냈다.

생부 "김병태" : 즉시, "충남 천안군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생모 "송씨"여동생 :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동생 "김각균" : "대구 감영"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본처 "기계 유씨" : 7세 된 딸과 함께, "충남 옥천군" 관비가 되었다.            후처-1 "스기타니 오타마(小玉)" : 어느 일본인 실업가와 결혼하였다.            후처-2 "마츠노 나카": "사다"를 데리고, 행상과 노동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3. 평가비판

① 긍정적 평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명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가 "중인 신분임"에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 "박규수ㆍ오경석"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접하고, "서방에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를 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적 위정척사파"들의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반대, 비판하였지만 족벌체제로 변질되는 "민씨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 스스로 개항을 하여, 외국의 선진문물과 장점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처음에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을 추진했으나, 민씨 일족의 부패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 청나라의 영향력 등에 부딪치자,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쿠데타를 기도, 준비하게 된다.

② 부정적 평가

"청나라ㆍ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외세의 개입"을 비판하면서도, "갑신정변" 당시에는 "일본"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사전준비가 치밀하지 않았던 점과 정변의 주체 세력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그때까지 조선에서 "수구파(守舊派)"의 후견 세력인 "청나라" 등의 영향력이 조선사회 내에 막강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4. 망명일본에서 유배연금중국 망명 결정  (참조 : 김옥균 ②  4. 망명생활 )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였다. "야마테초"에서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통해, 그는 "일본 고위층 우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중 1명인 "도야마 미치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암살하는데, 참여한 낭인 조직의 하나인 "겐요사(玄洋社)"를 조직하기도 했다.

조선에는 "김옥균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민씨 정권"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으로 자객을 파견하였다.

일본 망명 중에도, 그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민씨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김충식(언론인)은 "자객 밀파의 원인"을 그가 스스로 자초했다고 보았다. "자객 밀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김옥균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  성격이 급한 김옥균은 일본에 와서도, 명성황후 정권을 전복하려 절치부심했다."는 것이다.

① 일본에 의한, 유배ㆍ연금 (4년간)

"청나라"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1886.07월부터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08~1890.04월까지 "홋카이도(北海道)"에 연금을 당한다. 1890년에 석방되었고, 그 뒤 "도쿄"로 돌아오자, 그는 "청나라"로 망명을 기획한다. 1894.02월, "청나라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기로 결정한다.

② 연금 해방,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과 담판을 위해, "청나라" 행

"일본"에서의 거듭된 재기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아직도 조선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청의 실권자"를 만나서, 협조를 얻어 보려 했다. "연금"에서 해방되어, "도쿄"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청나라"로 들어가 실권자 "리훙장(李鴻章)"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리훙장"에게 연락이 닿자, 마침 일본주재공사로 새로 부임한 "리징방(리훙장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편지를 건네주었다. "청나라 행"을 결심한 그는 스스로 막일을 다니면서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백방으로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사카"의 한 후원자에게서 경비를 지원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동료들은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비밀리에 행동하고, 여러 명의 수행원과 함께 가도록 권했으나, 그는 "일본인 와다"와 심부름꾼 1명만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김옥균"의 이동 정보는 곧 "조선 조정의 간자"에 의해, 조정으로 전달된다.

5.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과정  (참조 : 김옥균 ②  5. 김옥균 암살ㆍ조선의 자객 밀파)

1894.03.28, "상하이"에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텔뚱허양행(東和洋行))"으로 "조선 정부"가 보낸 "홍종우"에 의해, 호텔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은 저격암살당하였다"김옥균"은 일본 망명 시절, 단발을 하고, "이와다 슈사쿠"로 개명한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에도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홍종우"의 프랑스 요리 솜씨도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 김옥균의 일본 친구들 입맛까지 당길 정도였다"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 온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 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홍종우"는 이렇게 해서, 김옥균을 "상하이"로 꼬여냈고, 거사를 깨끗이 처리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김옥균을 제거했는지를 "청나라 측 경찰서"에서 변론하였다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 김옥균의 생존은 동양 삼국의 평화를 깨뜨릴 우려가 있다."   암살한 1번째 이유는, "공무""어명을 받든 것이다"라고 밝혔다.    암살한 2번째 이유는, "김옥균이 동양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1894.03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외국인 거주지 안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하였다다음 날 오후,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무를 보았다1894.03.27일 오후, "윤치호""청나라 상하이"에서 체류하며 지낼 때, "김옥균홍종우" 등 일행을 받아 들였다그는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 되었다.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

03.27,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30분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으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03.28,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일본인 와다"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인 "마쓰모토"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일본인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 챈 "자객 홍종우"가 때를 놓치지 않, 김옥균을 향해 "리볼버 권총"을 발사하였다그는 곧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4시 경 사망한다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윤치호""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 홍종우 (洪鍾宇ㆍ1850~ 1913?ㆍ향년 63세?)

대한제국의 근왕주의 개화파 정치인ㆍ최초의 프랑스 유학생"황국협회"에 섰던 인물로 "수구파"로 알려졌으나, 그는 본래 "개화파"였다.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급진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을 저격하여 암살했다.  그 뒤 과거에 급제ㆍ출사하였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신임을 얻어 요직에 올랐으며, "황국협회"의 회원으로 "개화파ㆍ독립협회"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역모죄"로 체포한 "개화파 인사들" , "이승만"에게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형을 감하여, "종신형"에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1900년대가 되면서, "대한제국" 내에서는 "일본제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자, 그는 점차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본" "일본"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김옥균"을 위인으로 추켜세우고, 그를 암살한 "홍종우" "테러리스트"로 매장했다.

6. 공개 "부관참시"

어느 일본 신문사에 실린 기사삽화사건이 발생하자, "청나라 상하이 경찰""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시체""일본인 와다"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인계하기로 했다"일본 영사관"에 인계된 시신은 일본인 지인과 김옥균 추종자가 손톱발톱을 잘라내어 봉지에 담아, 유품으로 "일본 도쿄"로 보냈다그런데 "일본 정부""조선 개화파"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겨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김옥균 사체" "청나라"에게 넘겼고, "청나라 정부""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 하여,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고 한다"홍종우"는 단번에 "실력파 황실 관료"로 부상한다. < 대역부도(大逆不道) 옥균(玉均) >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공부하며,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발돋움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에 옮길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한편 조선은 "김옥균 암살이 국가의 경사"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1894.04.27.(고종32), 선박으로 "김옥균 사체"가 옮겨졌고, 04.28"조선"에 도착한 시신은 "강화도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되었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씌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04.28일자, 일본 "시사신보"에는 양화진에서 김옥균의 시신을 참시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김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 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6치씩, 13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임금(고종)의 이름을 빌려서, 민비와 민영익이 십년을 벼르다 벌인 철저한 복수극이었으리라. !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시신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느 기간 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시신을 다 모아서 장례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까?" < 일본 시사 신보, 1894.04.28일자 >

그의 가족 역시 연좌제에 의한 처벌이 건의되었고, 생부 김병태는 처형당하고 모친 등은 음독 자결하였다또한 이 사건으로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항렬자를 ""에서 ""로 바꾸기도 한다.

"개화파 인사들"을 선각자로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능지처참연좌제 등의 악형을 목격하면서, "박중양""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갑신정변"의 최후를 본 청년지사 "박중양""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 분개하면서, 지탄하였다"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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