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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 김홍집 (고종ㆍ1842~1896)ㆍ최후의 영의정ㆍ이시영 장인

by 당대 제일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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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金弘集ㆍ김굉집(金宏集)ㆍ1842~1896.02.11ㆍ53세)"은 조선 후기 문신ㆍ최후의 영의정(250대ㆍ1894~1894)ㆍ총리대신(초대ㆍ동학농민운동 이후)이었다. 청빈한 벼슬아치ㆍ갑오개혁의 총 책임자ㆍ"윤치호"를 통역관으로 채용하였다. 친일 개화사상가 (친일파 애국자)ㆍ"박규수ㆍ오경석ㆍ강위"의 문인이다.

 

1. 김홍집 (金弘集김굉집(金宏集)1842~1896.02.11향년 54)

•  출 생 : 조선 경상도 경주       •  사 망 : 조선 한성부       •  사 인 : 타살 (아관파천 때, 군중에게 피살)

 :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  별 칭 : - 경능(敬能)개명- 김굉집(金宏集). 원래 이름은 김홍집(金弘集)이었으나, 청나라 고종(高宗)의 휘가 "(弘歷)"이었기에 피하기 위해 김굉집(金宏集)으로 가운데 ()를 교체

 별 명 : 비 오는 날의 나막신       •  학 력 : 1868 (26) - 알성문과 급제       •  저 서 : 이정학재일록(以政學齋日錄)

 : 남양 홍씨       •  자 녀 : 아들- 김경희(金敬熙)- 경주 김씨       • 가 족 : - 김영작(金永爵1802~1868)- 창녕 성씨(昌寧 成氏? ~1870)  /  - 김항집(金恒集요절)김승집(金升集) 동생- 김증집(金證集

사 위 : 이시영 (李始榮1868~1953)

독립운동가조선말기 문신대한민국 부통령(11948.07~1951.05)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 "일가족 40"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09, "통합 임정" 수립이후, "김구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단정론"에 참여하였다 1948.07.20,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부통령선거" 직전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부통령에 김구가 나오면 합작할 의사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없다"고 자신의 "단정 안"에 반대해 "평양"을 다녀온 "김구"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대신 "임정을 대표한다."는 차원에서 "이시영"을 언급했고, 이런 이승만의 의향이 의원들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이시영"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홍집

1880,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개화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한편, "위정척사파 계열" 인사들도 중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급진 개화파"로 몰렸고, 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 체결하였다.

1896, "관제 개정" 이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일본" 측의 지원으로 "총리대신" 되었으며, "총리대신" 재직 중 "신분제 폐지단발령" 등을 강행하는 한편, 함께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개방을 단행한 뒤에는 "친일파"로 몰려, "아관파천" 때 살해되었다. 살해된 시신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시신은 도륙되어, 각 도로 보내졌으며, 백성들은 "수급에 돌을 던졌다"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의 시신을 씹는 자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2. 사망ㆍ효수ㆍ시신 도륙 (광화문에서 군중에게 피살)

1895.10.08 (을미사변)~ 1896.02.11 (아관파천을미개혁): 4차 김홍집 내각친일 내각

1895.10,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갑오개혁"을 날려버린 "고종"의 조치는 휴지장보다 가치가 없어졌고, "김홍집" 다시 구성된 내각에 참여했다. 이 때 참여한 인물들은 "친일 성향"이 강한 "유길준조희연" 등인데, 이들은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까지 추진하니, 학자들의 반발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집회"를 야기하였고, 중들의 반발이 격해졌다.

"김홍집""을미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었다이 때 "김홍집""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유길준(서리내무대신)"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다."는 만류로 그만뒀다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반외세", 이제 "국모 암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욕까지 먹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김홍집"의 운명도 대충 정해졌다"김홍집""총리대신으로서, 내각에 참여할 것"을 수락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총리대신 수락"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이 난세에 상감께서 잠을 못 이루고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이나 아끼려고 거부할 수 있겠느냐? 부득이 어명대로 승낙했으니, 내 생명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너희들도 미리 짐작하여라."고 못 박았다고 한다.

1896.02.11, "고종""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이 발생했다"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아관파천"이 일어났으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파 내각" 조직되었다"고종""공사관"에 오자마자, "을미4(김홍집(총리대신)유길준(내부대신)정병하(농상공부대신)조희연(군부대신)"에 추가하여, "장박(법부대신)"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처형을 명령한다"유길준조희연장박" 등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다.

지금 나섰다가는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는 "일본군""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오!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라고 뿌리친 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일개 순사"에게 붙잡혀, "정병하(농상공부대신)"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분노한 군중들에게 돌을 맞고, "매국 친일당의 두목"으로 몰려, 집단 구타당하다가 끝내 숨졌다.

군중들은 이에 끝내지 않고, 이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그 시체를 끌고 가면서 그야말로 "광화문~ 종로거리"를 피의 거리로 만들어버렸다살해된 시신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시신은 도륙되어, 각 도로 보내졌으며, 백성들은 "수급에 돌을 던졌다"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의 시신을 씹는 자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연좌"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한성부 사저"에 있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했다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는데, "이시영"에게 시집간 딸 등 이미 출가한 딸들만이 연좌제를 피하였다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안장되었으나, "625한국전쟁" 뒤에,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로 이장하였다.

한편 살아남은 "유길준ㆍ조희연ㆍ장석주""경술국치" 때까지 살아남아,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그나마 강직한 "유길준""남작 작위"를 거절했고, "조희연"은 죽을 때까지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다(반납해서 세습하진 않음)"장박"은 대대로 "작위"를 세습했다.

3. "갑오개혁"의 총책임자

① 1894.06.25~12.17(갑오개혁) : 제1차 김홍집 내각→ 일본의 강압→ 독자적 개혁 추진 시기

※ 군국기무처 : 일본 강압으로 설치된 "관제ㆍ세제ㆍ학교ㆍ군사ㆍ산업" 등을 개혁하기 위한 임시 관아

1894.02월, "동학농민운동(~ 1894.10)"이 일어나자, "총리교섭통상사무"가 되어, "청ㆍ일본"을 중재하면서, "민심수습과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강조했다. 1894.07월, "일제"의 강요로 세워진 초 정부적 내정개혁 기구인 "군국기무처의 총재관"이 된다.(제1차 김홍집내각).

이 당시 그의 활약은 놀라운데, 12월에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1차 갑오개혁의 총 책임자"가 되어서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했다. 이 시기는 "청일전쟁ㆍ동학농민운동" 때문에 "일본"의 간섭이 조금 약해지고,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대놓고 쫓아내려고 할 정도로 억압했고, "일본"은 도리어 섭정으로 뛰어들었던 "흥선대원군"을 배제하고자 하면서, "김홍집"은 가장 의욕적ㆍ독자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청일전쟁ㆍ동학농민운동"이 "일본"의 의도대로 끝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가 귀국한다.

② 1894.12.17~1895.07.07(2차 갑오개혁):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박영효 단독 내각→ 친일 내각  

1884.12월, "박영효"는 동문수학자들(김옥균ㆍ윤치호ㆍ서재필ㆍ서광범ㆍ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1894.07월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자, 8월에 귀국한 뒤, 12월에 "내부대신"에 임명되어, 7개월가량 재임했다. "일본"의 후원ㆍ압력으로 귀국한 "박영효"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하여,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의정부"는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ㆍ군제 개편" 등을 하였다.

※ 홍범 14조 : 1895.01월 제정ㆍ발표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성격의 문서ㆍ청(淸)의 종주권을 부인,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공포하고, 근대적 개혁을 총괄하여 성문화한 의미가 있으나, 일본의 간섭과 의도 하에 작성

점진적인 개혁을 펼치려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였고, "일본"의 지원을 받은 "구 급진개화파 박영효ㆍ서광범" 등 계파와의 갈등이 심화되어서, 결국 "김홍집"은 사임하였다.(사실상 박영효 단독 내각) "박영효"는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 서리"가 되었다. 곧이어 "박영효"는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2차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행정ㆍ군사ㆍ교육"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도 오히려 "구미식 행정"의 채택을 주장했다. 1895.04월, "삼국간섭"이 일어나고, "박영효 내각"이 붕괴된다.

※ 삼국 간섭 (1895.04.23.): 청일 전쟁(1894.07~ 1895.04)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자, "러시아 제국ㆍ독일 제국ㆍ프랑스 공화국"이 "일본 제국"의 철수를 요구하여, 관철한 사건

이 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 러시아 정책"을 폈다.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게 했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 가오루"의 권고를 무시하고 연립 정파였던 "김홍집 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고종"은 "김홍집"을 파면, 05.17일에는 "갑오개혁" 무효를 선언해버렸다. 1895.03월, "김학우 암살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된 "이준용(흥선대원군의 손자)"를 체포했다. "박영효"는 "서광범"과 함께, "이준용"을 "의금부 지하감옥"에 감금한 뒤,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거리 시위ㆍ일본 영사관ㆍ청나라 영사관" 등을 찾아다니며, "손자 이준용"의 석방ㆍ구명운동을 벌였고, "박영효ㆍ서광범"의 "이준용 심문 과정"에서 악형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여론의 악화를 초래했다. 4월, 다시 "내무부 대신"에 임명되었으나, 07월 초, "반역 음모사건(고종 양위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고, 연이어 같은 시기에 "명성황후 시해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ㆍ이규완ㆍ우범선"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 공사관"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1895.07월, "박영효"는 별도로 "명성황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조선"의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여 "고종"은 단 1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제휴를 통해,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기원했으나,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다.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는 "왕후"의 능력ㆍ권모ㆍ계략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암살하여, 화근을 뿌리 뽑아야 된다."고 결심했다. 

1895.07월로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박영효"는 "유길준"을 자기의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이에 "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고종"에게 밀고했다. "박영효"는 "유길준"에 의해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바꿔 입고 변장하여,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 나와, 강 자락의 "용산"에서 증기선을 타고 도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따로 "대원군ㆍ이준용"의 "왕비 암살 모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③ 1895.07.07~ 10.08(을미사변ㆍ3차 갑오개혁): 제3차 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 친러 내각

1895.07월, "박영효의 반란음모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주도, "김홍집"과 다시 제휴하고, 거기에 "친미파ㆍ친러파"를 더해서, "3차 갑오개혁"을 시도했다. 

※ 박정양(1842~1905): 외교관(조선의 첫 주 미국대사)ㆍ내각총리대신ㆍ온건 개화파 정치인

학부대신(1차 김홍집 내각)ㆍ내각총리대신(김홍집 내각이 붕괴 시, 과도내각)ㆍ학부대신(2차 김홍집 내각)ㆍ과도내각을 조직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수구파ㆍ위정척사파"의 방해로 실패했다.

④ 1895.10.08 (을미사변)~ 1896.02.11(아관파천ㆍ을미개혁): 제4차 김홍집 내각→ 친일 내각

"을미사변"이 일어난 10.08일 아침, "고종"이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스기무라(서기관)ㆍ통역관"을 데리고, "경복궁"으로 들어왔다. 아침 8시경, "고종"은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통사"에는 "미우라"가 "고종"을 알현한 곳이 "건청궁"으로 되어 있다)

"미우라(일본 공사)ㆍ스기무라(서기관)ㆍ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국 공사ㆍ러시아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홍집 내각"은 3가지 조칙을 기초하여, "고종"에게 서명하라고 요청했다. "고종"이 거부하자, 그들은 서로 서명하고 물러났으며, "일본" 군인들도 궁궐에서 철수하였다. 이날 "군부대신"은 "안경수"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조희연"으로 바뀌었고, "권형진(경무사ㆍ치안 담당)ㆍ유길준(서리내무대신)ㆍ어윤중(탁지부대신)ㆍ장박(법부대신)ㆍ서광범(학부대신)ㆍ정병하(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황후 시해"를 방조ㆍ묵인한 이들이다.

⑤ 1896.02.11.(아관파천)~ 1897.02.20. : 박정양 친러파 내각     ⑥ 1897.02.20~ : 대한 제국

4. 평 가ㆍ친일 의혹

그는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1910"한일합방" 이후에는 "친일파"의 득세를 불러온 "역적"으로 단죄되어, 재평가 받지 못하였다"일본"의 변화된 관제와 복식을 "조선"에 도입하려 했다일설에 그는 자신이 "군국기무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 보좌" 명목으로 "일본공사관 직원 4~ 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 매국 행위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있다.

26살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파란 많은 벼슬길에 나왔다그가 벼슬길에 나오자, "명문가의 배경"에다, 성품이 부드러운 탓인지, 순탄한 길을 걸었다그런데도 그는 집 1칸 마련하지 못하는 "청빈한 벼슬아치"였다어찌나 가난했는지, 부인은 하나뿐인 "은비녀"를 저당 잡혀 찬거리를 마련하느라고, 머리에 꽂을 날이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그는 30대에 벌써 실무의 총 책임자격인 "참의 벼슬"을 받았다. 실로 촉망받는 "소장 정치가"였다.

그의 행실이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하고,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하지만 "을미사변"을 방조한 점,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하는 조칙"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점 등 여전히 그의 정치적 기준에 대한 논란으로 남아있다.

또한 구한말의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이끌며, 개항과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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